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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Sep 13. 2021

하면 된다와 고통을 귀하게 여겨라

진한 일상의 기록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가 지나가고 그 경험을 토대로 비교적 순조로운 상황에 도달하면서 배운 바가 있다. 지인들과 그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퇴근하고 읽는 <노자가 옳았다> 13장에서 관련 글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글을 쓴다.


貴大患若身 고통을 귀하게 여겨라

바로 이 문장인데, 도올선생의 풀이는 아래와 같다.

贵大患若身 큰 환란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을 귀하게 여기듯 하라

그리고, 이에 대한 노자의 보충 설명이 뒤따른다.

及吾無身 吾有何患!
내가 몸이 없는 데 이르면 나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아버지 장례식 때를 떠올렸다. 밀려오는 슬픔을 다스리려고 새벽에 장례식장에서 나와 한참을 걸었다. 아버지가 가신 길을 반추하던 끝에 어느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 문득, 아버지가 나에게 알려주는 듯했다. 이렇게 허망하게 가는 것이니 살아 있을 때, 훗날(죽음, 먼 미래)을 기약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고...


몸과 마음의 하나됨

근래 몇 년 사이에 나는 몸과 마음의 하나됨을 배우고 있다.

노자가 "신身"을 중시하는 태도, 인간의 모든 문제상황이 이 "신" 하나에서 나온다는 노자의 주장은 오늘날 전 인류가 한번 다시 생각해봐야 할 소중한 명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고대동아시아 사유의 원형prototype이다.

현대 도시인 다수가 그렇겠지만, 머리쓰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데다가 몸쓰는 일을 게을리하는 편이다. 그러던 중에 감정이 몸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고, 다혈질 성향으로 인해 관계를 망치는 일들을 돌아보면서 이제야 이런 데에 관심이 닿은 듯하다. 그래서, 노자 13장이 남다른데, 관련 내용을 더 인용해보자.

목표는 몸이라는 거대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모든 요소들간의 조화이며, 이 조화를 위하여 필요로 하는 미덕이 바로 "총욕약경"이라고 보는 것이다. 총의 상황이든, 욕의 상황이든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놀란 듯이 하라는 것은 그 몸의 조화, 그 질서를 깨뜨리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욕망에 대해   떠오른다. 더불어 191쪽의 서구 사상 비난 내용을 보면서, <데카르트의 오류> 통해 과학적으로도 데카르트식 인식이 틀렸음을 알게  시점이 모두 최근이란 점이 우연이 아니란 생각도 든다.

플라토니즘 이래로 이미 정신적, 이성적 가치의 우위가 확보되었고 그것이 기독교의 영혼설과 결합하여 중세를 지배했고, 더더욱 한심한 것은 근세를 주창한 데카르트가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를 통하여 정신mind과 물질matter이라는 이원실체를 확립했다는 것이다. 정신은 사유를 속성으로 하고 물질은 연장을 속성으로 하여 상호교섭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도덕주의적 엄격주의의 폐해

더불어 191쪽에 나오는 도올선생의 글을 보며 또 한가지 의문이 풀렸다.

"성즉리性卽理"라는 강력한 테마를 주창했다. 따라서 자연히 정감적인 인간정서의 폭을 상실하고 마음에 내재하는 선천적인 도덕원리의 핵에 집착하여 도덕주의적 엄격주의moral rigorism로 빠져들어 갔다. 그 폐해의 가장 치열한 장이 조선왕조 문명의 전반에 깔려있었던 주자학정통주의 문화현상이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숙지하고 있는 문제다. <중략> 주희가 아무리 "성즉리性卽理"를 말했다 하더라도 송명유학의 핵은 [대학]이 말하는 "수신修身"에 있다. 유학은 "수신"을 말했지 "수심修心"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조선 후기의 사대부들의 경직성이 어딘지 모르게 어릴 적 다녔던 교회에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교회에 다니지도 않았고, 딱히 교회에 관심이 없어 그 이유를 몰랐다. 근데 지금 보니 80년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도덕주의적 엄격주의moral rigorism 탓이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 목사나 전도사들은 위선을 전도하는 듯이 보였다.


당시(지금도) 학교나 직장에서 현대인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 듣지 않고, 일방향으로 귄위주의 체제에서 받은 대로 따라했다. 교장이 아이들 마음도 모르면서 훈시하는 것과 동일하게.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는 할 수 있다. 다만, 무용하다는 주장을 할 뿐이다. 우리가 원죄가 있으니 학교나 직장에서 겪은 고통은 잊고, 일요일에 교회에 나와서 하느님 나라에 있는 듯이 하라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걸 설명하는 말로 도덕주의적 엄격주의는 무릎을 탁 치게 했다. 돌연, 북경에서 한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랑하는 동생(친동생 아님)이 쓴, 북경에서 교회는 어떻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가라는 글이 떠오른다. 1980년대 후반 내가 교회에서 느낀 느낌과 매우 유사한 인상이다. 30년 넘게 흐르는 동안 교회는 유물처럼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하면 된다 II

마지막으로 살면서 스스로 '하면 된다'를 두번 째로 떠올린 근래 일화로 글을 마무리하자. 가장으로서 내가 바라는 가정을 운영하는 일도, 스타트업 대표로서 조직 하나를 운영하는 일도 모두 버겁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바로 글 서두에 언급한 시기다. 그 시기를 지나오는 터널 끝에 등장한 단어는 '하면 된다' 였다. 2016년에 첫 번째 '하면 된다'가 머리속에서 튀어나왔는데, 5년이 지난 후에 또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미가 사뭇 달랐다. 마침, 페북 지인이 올린 링크의 글 제목이 '될 때까지 계속 시도하라'는 의미에 가깝다. 어차피 삶의 종착지는 내가 결정하지 않고, 일의 결과도 내가 결정할 수 없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할 것이가 아닌가 뿐이다. 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하면 된다. (대신 언제 될지, 그 모습이 어떨지는 알 수 없다.)


고로, 계속 하되, 지속할 수 있는 모습으로 해라. 그리고, 내 몸을 계속 할 수 있는 상태로 지배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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