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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Sep 14. 2021

욕망과 거품에 대해서 - 욕망 탐구 III

묻따풀 훈련 No. 3

지난 글에 이어 이번에는 최봉영선생님의 페이스북 글을 기준으로 묻고 따지기를 해봅니다.


생각이 미치는 범위가 욕망의 공역

최선생님의 첫 번째 문장을 따라갑니다. 욕망의 생산자가 임자인 나란 사실을 알면 그다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말로써 생각을 펼칠 수 있기 때문에 생각이 미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에 담아서 욕망으로 꾸며낼 수 있다.

욕망이란 주제에 대해서는 군더더기일 수 있지만, 임자인 제가 요즘 함수에 꽂힌 탓에 '치역인가? 공역인가?' 이런 사족이 따라 붙습니다. 이런 산만함도 욕망에 기인하고 있겠죠. 독자들에게 좋은 글을 생산을 방해하는 요소일 수 있지만, 나 자신의 삶이 묻어나는 함수가 욕망이란 은유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마냥 해롭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즉흥적인 풀이인데, 묻따풀 과정에서 나 자신에 대한 개취인정을 어느 정도 허용하기로 하는 사건이다. :)


다른 사람을 따라하는 일이 잘못인가?

아래 문장에 대해 이렇게 묻는다. 욕망을 부풀리는 일은 반드시 해로울까?

사람들은 어떤 욕망이든지, 그것에 "더"나 "더욱"이나 "끝없이"이나 "더없이"를 붙여서, 욕망의 크기와 세기와 정도를 한없이 부풀려나갈 수 있다.

나는 먼저 최근에 우연히 들으며 눈쌀을 찌푸린 사람들의 수다를 떠올렸다.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말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별 사람이 다 있다'고 마무리 했다. 의도가 무얼까? 사실 이런 류의 소통 방식을 취하는 사람은 흔하다. 나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면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기준으로 욕망을 펼치는 사람들을 본다. 그게 정말 나쁜 일인가? 무의식적으로 혐오하던 행위에 대해 스스로 묻는 꼴이다. :)


또 다시 머리속에 함수 기호가 떠오르고, 함수 관계의 출발지인 정의역을 떠올린다. 나는 아마 모방 혹은 본보기를 택하는데 대해서 암묵적으로 정의역에 대한 선호를 갖고 있는 듯하다.

정의역의 뜻은 그저 domain 이다. 정의를 잘 하느냐에 대한 책임은 임자에게 주어진다. (사족이지만, 내가 DDD를 좋아하는 이유를 또 발견한다.)


나는 정의역에 대해 아마도 Integrity를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 내가 말하는 Integrity는 소프트웨어 설계를 하면서 익힌 개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나 요즘 정치권에서 기사화 하는 공정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 아닐까 싶다. 너무 포괄적이니 조금 더 의미를 좁혀보면, 나는 아마 자신이 지향하거나 통제하는 자아와 거리가 먼 모방은 좋지 않다 생각하는 듯하다.

자신이 지향하거나 통제하는 자아의 범주에서 욕망을 통제하라
 

놀랍다. 연습삼아 했던 추상적 개념인 '욕망'에 대한 묻따풀 과정에서 평소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 자신의 가치관 편향을 이렇게 쉽게 발견하다니! 계속 해보자.


욕망의 거품은 해로운가?

보통 거품은 곧이어 붕괴할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욕망의 크기와 세기와 정도를 부풀리게 되면, 그것을 부풀린 만큼 욕망에 거품이 일어나게 된다.

곧 꺼진다는 뜻으로 부정적인 의미겠지? 사실 나는 잘 쓰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앞서 정의한 욕망에 대한 나의 선호에 빗대어 볼 수 있다. 자아와 무관하면, 다시 말해서 내가 지향하는 내 모습도 아니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모습도 아니라면 거품이라고 말할 수 있나?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공교롭게 주말에 아이가 나에게 했던 질문에 대해 고민한 탓이다. 아들을 목욕시키는데 '아빠, 비누방울은 액체야? 기체야? 고체야?' 이렇게 물었다. 당장 떠오르지 않아 목욕 후에 구글링 해보고 설명을 해줬는데, 그때 아래 이미지를 발견했다.

공기의 부피탓에 일시적으로 커진 비누방울 즉, 거품은 오래가지 못한다. 거품이 커지게 하는 요소는 인위적 결합(계면활성제) 역할과 공기로 인한 허상이라고 생각해보면 비유이긴 하지만 문제요인이 조금 더 분명해진다. 계속해서 계면활성제같은 자극이 필요할 수 있다. 금새 욕망을 극대화 하기 위해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공기를 물이 감싸는 상황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환경에서 오래 버티기 어려운 일이 나에겐 지속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라는 지혜를 떠올리게 한다.


거죽에 낀 거품을 통해 보는 욕망

묻따풀이 다소 난해해지는 지점에 도착했다.

욕망에서 거품이 일어나, 거죽에 끼게 되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거죽에 낀 거품을 통해서 욕망을 바라보게 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욕망의 거죽에 낀 거품에 눈이 어두워서 끊임없이 짓고, 만들고, 꾸미고, 부수고, 허물고, 버리는 일을 거듭하고 있다. 사람들은 욕망의 거품 위에서 반짝이는 거품 정치, 거품 경제, 거품 종교, 거품 예술, 거품 교육 따위를 붙잡고서, 더 신나고, 더 멋지고, 더 즐거운 세상을 꿈꾸고 있다.

일단, 거죽이란 말을 자주 쓰지 않아 찾아보았다. 구글링 첫 페이지에도 잘못된 정보가 많다. 자주 쓰지 않는 말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국립국어원의 ‘가죽’과 ‘거죽’ 중 바른 표현은? 에 대한 설명에서 거죽의 뜻을 알 수 있다.

둘 다 맞습니다. ‘거죽’은 ‘물체의 겉 부분’을 뜻하고, ‘가죽’은 ‘동물의 몸을 감싸고 있는 질긴 껍질, 또는 동물의 몸에서 벗겨 낸 껍질을 가공해서 만든 물건’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두 표현 모두 가능합니다.

그런데, 거죽에 낀 거품이란 무엇일까? 이 부분이 쉽지 않다. 그게 우리의 편향일 수 있고, 습관으로 굳어진 행태나 믿음의 형태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내 몸 자체가 이미 거죽에 낀 거품의 저장소일 수 있다. 이런, 젠장. 글을 쓰는데, 자꾸 '그렇다'고 확신이 든다. 자꾸 몸이 불편해지는데 끊지 못하는 해로운 음식을 떠올리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거품을 어찌할 것인가?

묻고 따져보니 처음 페이스북에서 아래 문장을 봤을 때와 전혀 다른 상태에 도달했다. 처음 읽을 때는 막연한 이야기로 내 삶과 무슨 상관인가 했다.

욕망 부풀리기가 버릇으로 굳어지면, 사람들은 그것에 갇혀서 벗나지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모두가 미친듯이 달려가고 있는 욕망 부풀리기에 대해서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다. 욕망 부풀리기에서 빚어지는 기후ㅡ환경ㅡ생태ㅡ자원 문제를 마주하게 되면, 모두가 유식한 무식쟁이가 되어 버린다. UN본부에 모여 있는 점잖은 어른들 앞에서, 어린 그레타 툰베리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꾸짖는 일이 벌어지게 된 까닭이다. 이는 21세기의 초장에 벌어진 가장 얄궂은 코메디의 하나이다.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 이렇게 묻는 듯하다.

'어쩔 수 없다. 모두가 그러고 있지 않은가?' 라는 핑계로 살던대로 살 것인가?

그리고, 지난 욕망 탐구에서 인용한 고미숙선생의 주장이나 도올선생의 주장 역시 막연한 담론이라 생각했는데,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묻고 싶지 않지만, 묻는다. ㅡㅡ^


그리고, 나의 내면을 빠르게 답한다.

당장 어떠한 답을 말할 수는 없지만,  죽기 전까지 모른척 살지는 않기로 (계속 묻따풀이라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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