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따풀 훈련 No. 5
최봉영선생님의 최근 페북글을 감상하고, 재빠르게 따라가는 시도입니다. 한 페친은 댓글로 한편의 시와 같다고 평하셨습니다. 명문이라 감상을 해보시길 권합니다.
대체로 명료한 글인데 11번 항목이 이해가 가지않아 페북으로 질답을 주고 받아 단서를 얻었다.
11번 글을 보자.
한국사람은 ‘우리’라는 임자가 말을 잣대로 삼아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일의 줏대로 삼는 것을 ‘그위’라고 불렀다. 그위는 ‘그+우+이’로서 ‘그 위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때 ‘그’는 낱낱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그것’을 말하고, ‘우’는 낱낱의 마음속에 자리한 ‘그것’이 모두의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이’는 모두의 ‘위’에 자리하고 있는 ‘그것’이 하나의 줏대로서 바로서 있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이 목청을 떨어서 우는 일에서 ‘울음’이 나오고, 사람들이 ‘울음’을 함께 하는 일에서 ‘우리’가 나오고, 사람들이 ‘우리’로서 함께 하는 일에서 ‘그위’가 나와서, ‘그위’의 아래에 자리한 낱낱의 ‘아름’이 모두 ‘아름다움’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보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위라? 처음에는 beyond나 over를 말하나 싶었는데, '그+우+이'라는 분해와 조합에 대한 설명은 몇 차례 따라 읽어 보아도 석연치 않아 앞서 보여드린 페북 질답이 오갔다. 그리고, 검색해서 찾은 결과로 대한민국 역사는 한국인이 지닌 ‘사람다움’의 열망이어야 라는 마찬가지로 최봉영선생님이 쓰신 글이 나왔다.
컬럼이 다루는 내용이 포괄적이고 분량도 적지 않아 관심사를 좁혀 '그위'만 이해하기로 한다. 브라우저에서 Ctrl+F 단축키로 페이지내 검색해보면 3개가 걸린다.
'그+우+이' 조합으로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그위를 공(公)과 관(官)에 대응하는 우리말이란 점은 알겠다. 그리고 이를 낱낱의 개체를 넘어서라고 표현하니 운치도 있고, 마음 어디에선가 웅장한 기운이 생기는 듯도 하다. 마치 오랫동안 추구해온 이상적 삶의 방향을 부를 이름을 몰랐는데, 방금 안 듯도 하다. (과장인가?)
다시, 선생님의 '울음'과 '우리'에 주목해보자. (감상은 생략하고) 따라가서 소화해보자. 묻고 따져보자.
1~4의 내용을 따라가 보면, 울음에 대해 (생소하지만) 명쾌한 문장놀이가 펼쳐진다. 독자분들도 원문을 직접 보시길 바라며 여기서는 내가 초점을 둔 표현만 추출한다.
나의 울음과 함께 해 줄 수 있는 이들을 만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우는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유전자에 갖추고 있기 때문
새들이 큰 소리로 우는 것
내가 울어야 하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어 알린다
위 표현들을 두고 약간의 분석을 덧붙이면(습관적으로 하는 말이었는데, 방금 뜻을 찾아보고 수정) 아니, 인용한 문장에 기초해서 나의 문장놀이를 해보자.
울음의 동기에 함께 해줄 이를 부르는 욕구가 있었구나. 육아 경험으로 울음 하면 (1) 배고프다 (2) 똥을 쌌다 (3) 엄마가 안 보인다 (4) 졸린다 중에서 자동으로 뭔가를 살피는 사고 모형이 바로 튀어나왔다. 근데, 그 중간에 누가 나와 함께 해줘라는 욕구가 있었다니!
지금보니 성인들도 매한가지이구나. 우는 대신 우울증에 걸려서 문제지.. ㅡㅡ^ (삼천포 금지. 돌아가자)
욕망이 아니라 욕구다. 유전자에 기인한 행위로 인간만이 갖는 특징이 아니라 동물도 유사한 행위를 하니까.
봉화와 같은 신호다. 그치. 앞서 언급한 나의 육아 기억 일부(보기 1~4 조합)는 모스 부호나 봉화랑도 유사한 구성이다.
여기까지 따라가 보면 자연스럽게 이전 글의 말과 연결점이 생긴다. 울대를 활용하여 소리로 욕구를 표현하는 행위의 결과물이 울음이다. 비슷한 신체 기관을 활용하여 욕망을 표현하려면 울음으로는 어렵고, 말을 해야 한다. 말이 하지 않고, 상대(애인, 부부, 친구, 가족 등)가 내 맘을 몰라준다는 투정을 하지 말고... ㅡㅡ^ (삼천포다. 돌아가자.)
선생님의 문장놀이 9번에서 욕망을 찾을 수 있다. 욕망은 바라는 욕(慾)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 보고자 하는 행위(혹은 의도)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사람들에게 말은 어떤 것을 느끼고, 알고, 바라고, 이루는 일을 하는 잣대이다. 사람들은 말이라는 잣대에 기대어,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만들고, 쌓고, 이어왔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하나의 ‘우리’로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일을 더욱 깊고 넓게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다시 우리와 연결점이 생긴다.
최선생님 문장놀이 기준으로 10번이다.
사람들이 ‘우리’라고 여기는 것과 ‘우리’가 함께 만들고, 배우고, 쓰는 말과 ‘우리’가 생각을 펼쳐서 이룩해 놓은 온갖 지식과 기술은 모두 저마다 갖고 있는 낱낱의 마음속에 '그것'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은 낱낱의 마음속에 '그것'으로서 자리하고 있는 ‘우리의 것’을 바탕으로 삼아서 함께 어울려서 살아간다.
최선생님 책을 처음 읽고 큰 나인 우리라는 표현(문장놀이)에 감탄하면 쓴 글이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논리적으로 펼쳐보면 '큰 나'는 두 가지 방향이 가능하다. 나란 개체가 커질 수가 있고, 나와 같은 개체가 여럿일 수도 있다. 전자는 발전, 성장, 진화 등의 개념과 연결할 수 있고, 후자는 집합이 떠오른다. 최초에 질문을 던졌던 그위 그리고 낱낱의 개체를 넘어서나 큰 나인 우리로 더불어 사람답게 같은 우아한 문장놀이가 다시 떠오른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