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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기사의 긍지와 자신감 상실 그리고 AI 동반자화

인공지능 길들이기

by 안영회 습작

<인공지능과 공존을 강요 당할 창작의 미래>에 이어서 <먼저 온 미래>의 3장 <가장 중요한 문제>를 읽고 쓰는 글입니다. 이번 글은 처음부터 제가 쓰지 않고 <인공지능 길들이기>에서 익힌 인공지능과의 공존 방법을 적용해서 쓰기로 합니다.


바둑계에 먼저 온 미래

그래서 우선 밑줄 친 내용을 모아서 인공지능에게 전달한 후에 이를 담는 주제를 받아보고 전체 구성을 결정하기로 합니다.[1]

지난 글을 쓰며 받은 자극에 이어서 3장을 음미(吟味)해 보니 책 제목이 전하는 메시지가 분명해집니다. 다음 문장이 이를 부연합니다.

"바둑 역사를 길게는 5000년으로 보거든요. 그 5000년 동안 바둑의 패러다임은 인간 중심이었는데, 그게 끝난 거죠. 단순히 포석이 변했다는 수준이 아니라 우리가 바둑을 대하는 방식, 바둑의 토양이나 문화 같은 게 송두리째 다 바뀌어 버렸어요. 알파고 이전까지 바둑을 도(i)로 봤던 관점이라든가, 입단 제도라든가, 관전 문화, 프로기사들의 삶, 아마추어 기사들의 삶 등등 바둑의 전 영역에 걸쳐서 패러다임이 바뀐 거예요."

그렇지만, 개발자 경험 때문에 AI FOMO를 겪고 있기는 해도 저자가 전하는 상실감과는 아직 거리가 먼 느낌입니다.


바둑 다음은 문학, 그다음은 우리의 일상 전면?

그러다 만나 다음 문장은 전혀 다른 메시지를 선사합니다.

"이전의 책들은 모두 폐기해야 해요."

마치 기득권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느낌이죠. 다음 문장은 멸칭화된 '나때'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예전에 바둑을 배우면 그냥 나보다 센 사람이 '여기서는 이렇게 두는 거야, 저기서는 저렇게 두는 거야' 하는 거였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사실은 그걸 가르쳐 주는 사람도 완벽하게 이해가 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요. 연구회에서도 고수 한두 명이 의견을 제시하면 '그렇습니까' 했어요. 고수들이 자기가 둔 바둑을 복기하고 의견을 제시하면 다른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그런 모양을 외우게 돼 있어요."

기득권 몰락의 양상은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대한민국 국민 다수는 지난 정권을 장악했던 검찰의 몰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추측컨대 군사정부가 사라진 후에 보이지 않는 권력을 언론과 함께 나누던 검찰의 힘은 각성된 대중들과 뉴미디어의 힘 앞에 공룡처럼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다음 문장을 보면 대법원장[2]으로 대표되는 법관들의 낡은 인식이 떠오릅니다.

제가 알던 세계 한쪽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어요. 지구가 네모나다고 알고 있었는데 둥글다고 하면 그걸 순식간에 받아들일 수는 없잖아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제가 누리던 이점들도 인공지능에 의해 변질될 수 있다는 책의 메시지입니다.


저자는 알파고 충격의 상징적 인물인 이세돌 9단의 말을 전합니다.

은퇴하는 순간까지 "바둑은 나의 전부였고 앞으로도 전부일 것이라고 말했던 그가, 그러나 이제 직업으로서의 프로기사는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이는 프로기사들의 상금 수입이 줄어서가 아니다. 긍지와 관련된 문제다. 사람은 의미 있는 일을 자신이 잘 해내고 있다고 믿을 때 긍지를 얻는다. 나는 다른 직업에서도 인공지능으로 인해 긍지를 잃을 사람이 많아지리라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넓은 영역에서 어떤 일의 의 미와 인간의 유능함을 납작하게 짓눌러 버릴 것이다. 그 영역에서 문학은 예외일까?

그리고 바둑계에 먼저 왔던 미래를 문학에 투사합니다.

문학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질까? 어마어마한 작품을 써낸 인공지능이 "안나 카레니나』가 『오만과 편견』보다 4.7퍼센트 더 문학성이 높다'라고 주장하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중략> 10년 전이었다면 기사들은 가치 판단을 숫자로 표시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 자체에 웃었을 것이다.

처음엔 문학은 승부의 세계인 바둑과 다르기 때문에 수치화가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인터넷 공간에서는 모든 콘텐츠에 평점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제 생각을 바꿨습니다.

만약 소설을 사람처럼 잘 쓰는 인공지능, 혹은 사람보다 더 잘 쓰는 인공지능이 나온다면, 문학계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벌어지리라고 나는 예상한다.


다른 분야에도 'AI 일치율' 시대가 올 것인가?

한가한 고민을 하지 않는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요?

그때가 되면 '인공지능이 문학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같은 한가한 고민을 할 여유는 사라진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 그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같은 고민은, 실제로 그 분야에서 쓸 만한 인공지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바둑계가 이미 그 상황을 10년째 겪고 있습니다.

지금 Al 공부를 아예 안 하면 시합에서 한 판도 못 이겨요. 어쨌든 먹고살기 위해서 승부를 하는 사람은 이 AI 시대를 무한긍정하면서 가야 하기는 하거든요.

인공지능을 긍정하는 일도 쉽지는 않습니다.

인공지능들은 수치는 보여주지만 설명을 해주지는 않는다. 어떤 수가 좋은 수고 어떤 수가 나쁜 수인지는 바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수가 왜 좋은 수인지, 혹은 왜 나쁜 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인간 기사들은 인공지능의 바둑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일반론으로 다루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 뿐인 것이죠. 저자는 대표적인 환경 변화를 복기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이 프로기사들에 대해 가장 신기하게 여기는 것이 복기(復碁)다. <중략> 여기에 내가 돌을 둘 때 무슨 생각을 했다, 상대는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다, 그때는 내가 이 길로 갔고 상대는 이렇게 뒀다' 그런 식으로 다 연결이 되어 있어요. 만약에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 의미 없는 곳들에 돌을 두면 30초만 그렇게 둬도 저희가 기억을 못 할 겁니다.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으니까요. <중략> 알파고 대 알파고 대국을 보면 어디에 두다가 갑자기 다른 곳에 둬요. 그런 때 뭔가 뚝뚝 끊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한판의 스토리가 쭉 이어져 나가는 게 아니에요. <중략> "저도 보면 이해를 못 해요. 이해를 못 하는 수가 많아요. 금방 이해되는 경우도 있고, 한참 생각해 봐야 이해되는 경우도 있고, 끝까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도 많아요."

바둑을 모르는 제 입장에서도 인공지능의 침투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얼마나 인공지능처럼 두는가' 이것이 프로기사들의 실력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2010년대 후반 바둑계에서는 'AI 일치율'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중략> 정확한 수치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제 느낌에는 80~90퍼센트의 기사가 Al 포석을 그대로 둬요. 처음 30~40수 정도는 그냥 암기한 포석을 서로 '따다다닥' 두죠.

바로 'AI 일치율'이란 개념이죠. 마치, 답안지 보고 외운 후에 따라 하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인공지능처럼 둬라.' 이것이 알파고 이후 프로기사들의 목표였다. 인공지능처럼 두기 위해 인공지능처럼 느껴야 했다. 인간의 감각을 억누르고 지워야 했다. 인간이 쌓아 올린 바둑 지식은 잊어야 했다.


프로 기사의 긍지와 자신감 상실 그리고 AI 동반자화

다음 단락은 'AI 일치율'을 수용하는 힘든 과정을 생생하게 설명한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처음에는 바둑을 두고 AI로 복기하지 않았어요. 상처받아서요. A로 검토해 보면 너무 못 둔 수가 태반이었거든요. 내면의 상처가 컸어 요. 바둑에 자신이 없어진 거죠. 전에는 '이 정도면 잘 뒀지' 싶었던 것도 AI로 보면 하수의 바둑으로 나타나고, 두는 수마다 혹평을 받으니까. 여전히 자신은 없는데 이제는 납득하죠. Al를 적대적으로 여기지 않고 동반자나 친구로 받아들이기까지는 5년 정도 걸렸네요.

인공지능을 긍정적으로 보는 프로 기사도 있습니다.

신진서 9단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학습 도구로서 인공지능이 대단하다고 느낀다고 했다.

게다가 인공지능에게 포석을 배우는 방법은 사실상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셈입니다.

신진서 9단은 '아예 외워서 두는 수는 보통 20~30수에서 끝이 난다'라고 말했다. 뒤집어 말하면 AI 포석을 20~30수까지는 외워서 둘 수 있다는 얘기다. <중략> 이다혜 5단은 인공지능의 바둑을 현대미술에, 젊은 초일류 기사들을 큐레이터에 비유했다. 그녀는 "걔들이 연구를 많이 하다 보니까 패턴 같은 걸 인식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저자는 이세돌 9단의 은퇴 이유를 인용합니다.

<경향신문> 인터뷰에서는 "Al라는 절대 넘을 수 없는 장벽 앞에서 느끼는 허무와 좌절"이 은퇴의 직접적인 이유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다수의 프로 기사들은 생존을 말합니다.

이겨야 한다.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고 가장 큰 욕망이었다. <중략> 여러 프로기사가 '인간의 바둑' 혹은 바둑의 예술성을 묻는 내게 그런 고민을 할 겨를이 없었다, 먼저 살아남아야 했다'라고 고백했다.

생존을 위해 인공지능의 권위를 받아들이죠.

프로기사들이 삼삼 침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 수를 따라 두는 것은 인공지능의 권위 때문이다. 그 권위는 놀라운 실적에서 나왔다.

그리고, 인공지능 등장 이전에 배웠던 바둑을 사랑하는 방식은 마음속에 보관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바둑을 다르게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동안 사랑했던 바둑은 이제 떠나보내줘야 할 거 같아요.

여기서 저자는 프로 기사들의 처지를 자신의 직업에 투영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만약 내가 소설 쓰는 법을 그런 식으로 인공지능에게 배운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프로 기사도 소설가도 아닌 독자들에게도 함께 생각해 보자고 권합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전문가들은 인공지능 덕분에 삶의 질이 더 높아질까? 최소한 덜 바빠지기라도 할까? IT 회사들의 광고에 나오는 모델들처럼 어렵고 귀찮은 일을 모두 인공지능에게 맡긴 채 가족과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을까?


주석

[1] 프롬프트 인용을 위해 퍼플렉시티 페이지를 공유합니다. 경험 삼아 <페르소나를 이용해 다른 사람의 재주를 모방하기> 기법도 적용해 봅니다. 원래 답보다 마음에 듭니다.

[2] '희대요시'라는 멸칭(蔑稱)으로 불리는 인물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화면에서 정치질하는 모습을 보면 흡사 지동설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던 중세 종교 지도자들의 근엄함이 이런 모습이었겠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온 미래>를 읽고 쓴 글

1.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은 먼저 온 미래였다

2. 인공지능과 공존을 강요 당할 창작의 미래


지난 인공지능 길들이기 연재

(16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16. AI는 저장된 기억을 검색하지 않고 패턴에 의존한다

17.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핵심은 정보의 조합과 응용 과정

18. AI의 환각을 일종의 수평적 사고로 보자

19. AI 환각과 확률론적 모델링의 근본적인 한계

20. 인공지능은 언어적 일관성에 의존하는 새로운 지능이다

21. 모든 브레인스토밍은 항상 AI를 활용한다

22.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은 먼저 온 미래였다

23. 포토샵 대신 나노바나나로 갈아타는 첫 발을 떼다

24. 페르소나를 이용해 다른 사람의 재주를 모방하기

25. 다음에 나오는 단어를 예측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가?

26. 인공지능이 반드시 가야 할 길이 있을까?

27. 인공지능은 새로운 표현 방식과 언어를 제공한다

28. 다양한 수준에서 AI에 따른 직업의 변화를 면밀히 보자

29. 인공지능의 들쭉날쭉함을 포용하기

30. 인공지능과 공존을 강요 당할 창작의 미래

31. 인공지능은 허구적 믿음을 이식받은 놀라운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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