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원에서 나가야 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13. 직업교육
시간은 흐르고 있고, 우리들도 한두 살씩 나이를 먹고 있었다.
재활원에서는 우리들이 독립해서 살 수 있도록 도장파기, 마사지 같은 직업훈련을 시켜주었다. 원생들로서는 너무나 고마운 일이고, 나의 삶에 가장 필요한 일이었지만.
나는 도장 파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길을 가다 도장 파는 아저씨의 부스 안을 본 적이 있다.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아주 작은 박스 안에 하루 종일 갇혀서 오지 않는 손님만을 멍하니 기다리는 아저씨의 모습.
그나마 오는 손님들도 퉁명스럽기가 이루 말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저렇게 될 것만 같아서 정말 싫었다. 걷지 못한다 해서 생각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공부를 못해서 중학교를 못간 것도 아닌데 직업도 고를 수 없고, 먹고 사는 것을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평생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냥 도장집이 너무 싫었다.
나는 뭘 하고 살아야 하나.
언제까지나 재활원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모님이 주신 돈으로 먹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도장파고 마사지하고 그런 거 밖에 없는 걸까?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내가 무엇을 특별히 잘 하는지 내게 어떤 기술이 맞는지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것보다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재활원에서 가르쳐주는 기술을 열심히 배우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관심 가는 분야가 딱히 없었다.
그래도 해보는 데까지는 해봐야 하니까 수업은 열심히 들었다.
어느 날 재활원 게시판에 일본으로의 1년 직업연수 광고가 붙었다.
웅성웅성 난리가 났다.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이고, 선진국이었다.
모든 것이 우리나라랑 달라서 장애인들이 직업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나라에서 여러 가지 제도를 잘 만들어놓았다는 얘기를 굉장히 많이 들어왔다.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여기 있는 우리들 중엔 제대로 된 학교를 가 본 적조차 없는 애들이 더 많았다.
국민학교 졸업장이 있는 내가 최고 학력자니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우리나라에서는 길거리를 맘대로 다니기조차 어려운 환경인데.
장애인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 시설을 갖춘 공장이라? 거짓말 아닐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외국을 다녀온 적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일반인들도 외국 가는 게 쉽지 않은데, 나 같은 장애인들이 외국에 나갈 수 있다고?
물론 갈수만 있다면 꼭 가고 싶었다.
외국이라는 것도 그렇고, 장애인들이 일을 할 수 있는 공장이라니 내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하루하루를 살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새로운 길을 열렸고,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언제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 알지 못하는 세계, 내가 본 적 없는 문이 내 눈 앞에 있었다.
그 문을 열게 되기까지 쉽지 않았지만,
그 문을 열었을 때마다 후회한 적이 있었던가?
답은 간단했다.
신청서에 내 이름을 적었다.
많은 원생들이 일본 연수에 신청서를 냈고, 함께 바이올린을 배우던 차인홍, 비올라 신종호, 나를 포함한 5명이 함께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