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잡생각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커리어와 직업에 관한 이야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연애와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이 두 가지 주제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영역이라고 생각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삶을 경험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야 할 대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나를 지지해 줄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인간은 일과 사랑이라는 두 축 위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영역은 지금의 나에게 여전히 너무 어렵다. 간결하게 정의하기에도,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기에도 쉽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 현재까지 내가 내린 중론이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나에게 여전히 무척 어렵다. 세상에는 사랑을 설명하려는 수많은 책이 있고, 영상 매체에서도 사랑은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목소리가 넘쳐난다. 마치 상황마다 정해진 답이 있는 것처럼 들릴 때도 있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는 사랑을 설명하는 일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철학자는 개념으로, 작가는 이야기로, 과학자는 은유로 사랑을 붙잡으려 하지만, 막상 그 문제가 내 앞에 다가오면 여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이해한다기보다 체험한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때로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것 같다가도, 또 어떤 순간에는 비논리의 영역으로 흘러가 버린다. 사랑은 결국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마치 오뚝이처럼 흔들리며 존재하는 경험 같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에는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첫째, 사랑은 교집합을 늘려가는 과정이다. 두 사람은 본래 전혀 다른 궤도에서 출발한다. 언어도 다르고, 습관도 다르고, 세계를 바라보는 눈도 다르다. 그러나 조금씩 서로의 영역을 내어주며 겹쳐지는 부분을 키워갈 때, 비로소 둘만의 풍경이 만들어진다. 그 교집합은 처음에는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공유하고, 때로는 다툼을 거치면서 서서히 면적을 넓혀간다. 사랑이란 결국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너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가꾸는 일, 그 사이에 작은 정원을 키워가는 일이 아닐까 한다.
두 번째는 사람과 사랑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균열은 있다. 트라우마, 과거의 상처, 아직 해결되지 못한 콤플렉스 같은 것들. 연애의 초반에는 대개 그런 균열을 감추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드러난다. 사랑이 깊어진다는 것은 바로 그 순간, 상대의 균열을 마주했을 때 등을 돌리지 않는 일이다. 어떤 이는 어린 시절의 가난 때문에 돈 문제에 예민할 수 있고, 또 다른 이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불안으로 쉽게 집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불완전함을 고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 또한 그 사람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사랑은 흠 없는 조각상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금이 간 자리를 함께 어루만지는 일이다. 일본 전통 공예인 ‘킨츠기(金継ぎ)’가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이어 붙여 오히려 더 아름다운 무늬로 남기는 것처럼, 사랑도 불완전함을 지우려 하기보다 그것을 함께 빛나는 흔적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다.
세 번째는 균형이다. 사랑에서 균형이란 단순히 공간이나 시간을 공평하게 나누는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무게를 맞추는 일이다. 한쪽은 말로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지만 다른 한쪽은 침묵 속에서 표현할 때, 균형은 서로의 방식을 조금씩 배우며 두 사람만의 언어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어떤 이는 불안에 기울고, 다른 이는 신뢰에 기울 때, 균형은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달래주면서 동시에 신뢰를 단단히 세우는 데서 생겨난다. 또 한 사람은 늘 새로운 자극을 원하고, 다른 한 사람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안정을 찾을 때, 균형은 고요한 일상 속에 작은 변주를 더해주고, 변화 속에서도 머무를 쉼터를 함께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또, 사랑은 어느 한쪽의 힘으로만 끌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쪽이 끝없이 잡아당기고, 다른 한쪽이 끝없이 끌려가는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진짜 균형은 단순한 타협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감정의 리듬을 새롭게 조율해 가려는 두 사람의 의지 속에서 가능하다. 그렇기에 사랑에는 노력과 끈기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고민하고 배운 사랑의 시점들을 돌아본다면, 나는 스스로에게 0점을 줄 수밖에 없다. 20대의 연애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사랑이란 결국 독립된 두 사람이 각자의 완전한 세계를 유지한 채 만나는 것이라 믿었다. 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 독립이라는 것이 각자의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사실상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래서 서로의 삶이 겹치는 교집합이라는 개념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졌다. 겉으로 불편함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꺼이 삶을 함께 나누려 하지도 않았다. 불완전함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균열을 껴안기보다, 단점을 먼저 보고 그 그림자에 마음을 붙들리곤 했다. 나 또한 불완전한 존재임에도, 상대의 부족함은 유독 크게 다가왔다. 그 불편함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물었다. “이 관계가 내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을 함께 만들어가기보다, 어쩌면 늘 계산의 판단의 저울 위에 올려놓았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균형 역시 지켜내지 못했다. 상대가 느끼는 불안과 흔들림에 다가가 함께 무게를 나누어야 했지만, 나는 언제나 제자리에 머무른 쪽이었다. 상대가 끌어당기면 끌려가고, 멀어지면 멀어지는, 수동적인 존재에 가까웠다. 돌이켜보면, 20대의 연애는 완벽한 사랑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헛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교집합의 필요성, 불완전함의 수용, 감정의 균형이라는 과제는 모두 그때의 실패 속에서 조금은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사랑이란 잘 해내는 기술이 아니라 계속 배워가는 과정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는 늘 고민하게 된다. 누구나 한 번쯤은 묻지 않을까. 나를 깊이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하는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까. 한쪽은 안전하지만 심심하고, 다른 한쪽은 뜨겁지만 불안하다. 쿤데라는 아마 우연과 운명 사이의 긴장을 이야기했을 것이고, 프롬은 성숙한 사랑을 대칭적인 결합이라 정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사랑은 언제나 그 중간 어딘가에서 흔들린다.
독립적인 연애도 마찬가지다. 각자 자기 길을 살아내면서도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성숙한 형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독립은 사랑이라기보다 병렬적인 공존에 가깝다. 서로의 세계가 닿지 않는다면, 굳이 연애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실험했던 방식이 떠오르지만, 그들 역시 평생을 두고 균형을 시험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 어떤 이는 끝내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과의 사랑을 꿈꾼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순간, 모든 오해가 사라지는 듯한 안도감. 그러나 한쪽만 이해하는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진짜 이해란 서로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그것을 함께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 금이 간 도자기를 금으로 이어 붙이는 "킨츠기(金継ぎ)"처럼, 균열을 함께 빛나게 만들려는 태도가 없다면, 이해는 곧 피로로 변한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답을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랑의 형태가 가장 좋은지에 대해서는, 오래된 철학자와 작가은 은연중에 답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정작 내 삶 안에서의 최적화된 결론은 정작 정의하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사랑은 언제나 불완전한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중요한 건 내 불완전함을 드러낼 용기, 그리고 상대의 불완전함을 함께 감당할 각오다. 나는 다만 그 질문에 대답해 가며,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형태를 조금씩 만들어갈 뿐이다.
나는 공부하는 재무와 사랑이 때때로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재무의 세계에서 벌어진 결과와 현상을 정리하는 일은 결국 일정한 노력이 쌓일 때 가능해진다. 수많은 데이터와 사건들을 모아 해석하고, 이론을 대입하며, 원인을 찾아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뛰어난 석학들이 과거의 시장을 분석하며 사회적 현상을 정리하는 책과 논문들을 보면, 마치 세상에는 언제나 답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에 대해 철학자들이 남긴 글도 비슷하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복잡하고 불가해한 감정을 개념으로 정리하고, 명제와 언어로 깔끔히 포착하려 했다. 그 글을 읽다 보면, 사랑조차도 마치 논리의 체계 속에 담아낼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재무와 사랑의 공통점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 어떤 명쾌한 답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재무는 사건이 발생한 후에야 비로소 해석할 수 있다. 현재를 예측하려 하지만, 결국 시간이 흘러 과거가 되어야만 그 의미가 드러난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변수들이 너무 많고, 그 변수들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그래서 과거가 된 사건만이 분석 가능하며, 그제야 우리는 일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랑도 그렇다. 순간의 감정과 선택은 그 자리에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때 나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왜 그렇게 끌렸을까”를 되짚을 수 있을 뿐이다. 현재의 사랑은 언제나 불완전한 계산식처럼 남아 있고, 해답은 늘 미완성으로 흔들린다. 그래서 사랑은 재무처럼, 분석의 대상이자 동시에 끝내 해석되지 않는 미지수로 남는다.
사랑은 다차원 방정식과 닮아 있다. X에서 Z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변수가 그 안에 숨어 있다. 성격, 학력, 재력, 외모, 가치관, 습관, 말투와 취향, 심지어 잠을 자는 방식이나 하루를 시작하는 리듬까지도 모두 변수로 작용한다. 그 변수들은 끝없이 세세하게 갈라지며, 사람마다 다르고, 또 같은 사람이라 해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더 나아가 상대가 나의 필요와 기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내가 상대의 요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역시 또 다른 변수로 덧붙여진다. 결국 사랑의 방정식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늘 미지수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방정식 속에는 상수항 C가 존재한다. 변수들이 요동치고, 해답이 달라지고, 해석의 방식이 바뀌더라도, 그 상수항만은 방정식 안에 반드시 남아 있는 자리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람마다 사랑을 풀어내는 태도와 접근은 다르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계산하려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직관으로 답을 구하려 한다. 그러나 결국 각자의 삶 속에서 붙잡고 있는 것은 저마다의 C다. 그것은 형태가 달라져도 사라지지 않고, 어떤 이에게는 언제나 변치 않는 상수로 남는다.
어쩌면 사랑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끝내 풀리지 않는 방정식 속에서, 흔들리는 변수가 아니라 남아 있는 C를 의지하는 일. 상황이 변하고 마음이 달라져도, 그 상수가 있다는 믿음 하나가 우리를 다시 관계 속으로 불러들이고, 결국 사랑을 계속 시도하게 만든다.
사랑은 마치 상대성이론과도 같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시간은 전혀 다른 속도로 흐르고, 무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느껴진다. 어떤 사랑은 눈부시게 빠르게 흘러가고, 또 어떤 사랑은 오래 머물며 느리게 번진다. 그래서 사랑은 수학처럼 명확하지 않다. 완전함을 추구하면서도, 결국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은 이렇게 끝없이 분석하고 고민할 때보다, 단세포처럼 단순할 때 가장 그 예쁜 모습을 드러낸다. 계산도 이론도 없이, 그저 “좋으니까 좋다”라는 마음 하나로 움직일 때, 사랑은 가장 투명하고 가장 강렬하게 빛난다. 나는 그 순간이 사랑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