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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칼라책방 Jun 04. 2023

1종 보통 운전면허

이력서를 참 많이도 썼습니다. 장애인복지관을 향한 구애를 하느라 자기소개서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랬던 이유는 이력서에는 쓸 수 있는 내용이 몇 줄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경력 칸은 허허벌판과 같았습니다. 관공서에서 아르바이트한 것이 다였으니까요. 이렇다 할 인턴 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어학연수를 다녀오지도 않았으니 나의 이력서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자격증 칸에는 사회복지사 1급과 운전면허 1종을 제일 먼저 적었습니다. 나머지는 기타 등등 자격증들이었죠. 


제가 입사할 때만 해도 1종 운전면허를 가진 여직원이 많지 않았습니다. 1종 보통 운전면허를 왜 땄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저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아버지가 성인이 되었으니 면허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먼저 권하셨습니다. 그러면서 2종 말고 1종을 따라고 하셨습니다. 여학생이 스무 살에 운전면허 학원을 다니는 것도 선구적인 일인데 2종이 아닌 1종이어야 한다고 하신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아빠. 1종을 왜 따?

1종이 있어야 일이라도 하지.

나보고 트럭이라도 몰라고?

너 그럼 결혼해서 신랑 놀고 있으면 가만있을 거야? 배추장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나보고 배추 장사하라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저는 이때 매우 서운했습니다. 철이 없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의도는 딸내미의 스펙을 한 줄 추가할 수 있는 노하우를 알려주신 건데 제가 그걸 못 알아들은 거죠.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운전면허는 취득했습니다. 필기는 한 번에, 실기는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만에 합격했습니다. 합격의 기쁨은 잠시였고 이후 트럭은 고사하고 승용차를 몰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 가끔 연습한다고 요리조리 핸들을 돌린 적은 있었지만 정식으로 운전을 한 건 대학원 다닐 때였고 1종 보통 운전면허가 빛을 발한 건 복지관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복지관에서 이용자들과 외부 프로그램을 진행하려면 제일 먼저 차량배치를 확인해야 했습니다. 복지관 차량이 여러 대라 하더라도 그날 그 시간에 기사님과 배차 일정이 딱 맞아 떨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몇 달 전부터 모월 모일에 예약을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거나 상황 조정이 안 되면 지입차량을 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미니버스 같은 걸 대절한다고 하죠.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지입차량을 이용하는 경우는 연중행사가 아니면 예산을 지원받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외부 프로그램을 진행하려면 복지관 기사님의 긴밀한 협조를 위해 공을 들여야 야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좀 달랐습니다. 1종 보통 차량 운행이 가능했으니까요. 제가요, 허허. 1종 보통은 15인승 승합차까지 운행이 가능했으며 제가 담당한 프로그램의 이용자는 10명 남짓했습니다. 보조교사와 자원봉사까지 태우면 15인승이 꼭 맞았습니다. 그래서 공원, 전시회, 현충탑, 갯벌, 대형마트, 뒷동산, 미술관 등 현장학습을 자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차량만 확보되면 "지금 나갈까?"라면서 계획 없는 나들이도 종종 했습니다. 


노란색 15인승 봉고차를 운전할 수 있는 덕분으로 장애인복지관 사회복지사 생활을 재미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차를 운전할 수 있었던 건 1종 보통 운전면허를 가졌기 때문이며, 그 면허증은 이름도 성도 모르는 존재 여부 조차 확실하지 않았던 미래의 남편을 위해 배추장사를 결심한 덕분이었습니다. 그 결심이 복지관 이용자들의 나들이에 쓰일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저도 아버지도 심지어 남편도 몰랐던 1종 보통 운전면허 결심 덕분에 바깥바람 많이 쐬는 장애인복지관 사회복지사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두 배로 사'라는 제목은 저의 딸아이가 의사, 변호사, 판사가 좋은 직업이라면 회복지는 '사'가 두 번이나 들어가므로 두 배는 더 좋은 직업이라고 하면서 사회복지사 엄마에게 지어준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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