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에서 MBTI 유형을 묻는 건 너무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
"MBTI가 뭐예요?"
"ISTJ에요."
"잇티제시구나!"
"네? 잇...?"
"잇티제. ISTJ 말이에요."
"아.. 잇티제!"
나름 요즘 사람처럼 소통한다고 생각했는데 또 한 발 늦었다. ISTJ는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영 더디다. 실은 혈액형으로 말하는 것이 조금 더 편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전에는 나를 소심한 소문자 a형이라고 소개했었다. 아마도 ABO 혈액형으로 말을 트는 것이 더 편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 이를 테면 A형은 신중하고 소심 / B형은 성격대로 하는 유형 / 바보 아니면 천재라는 AB형 / O형은 성격이 좋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래서 4가지면 땡이었는데 MBTI는 16가지나 되니 이걸 다 외우는 건 고사하고 S와 N이 뭐였는지, T와 F를 구분하는 테스트는 왜 그렇게 많은지, J의 맞은편 알파벳은 뭐였는지도 헷갈린다. 아, 맞다! P!
항간에 MBTI가 가짜라는 말을 들었다. 진짜 검사는 엄청 비싸기도 하거니와 전문가에게 심층 면접을 거쳐야 나오는 성격유형이라고 했다. 우리가 16 Personalities 중에 고르는 이것은 잡지 맨 뒤에 나와 있는 심리테스트 같은 거라면서 믿지 말라는 주장이었는데 가짜라고 하기에는 맞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설령 가짜면 어떨까. 내가 나를 알고 남을 아는데 편리하고 그래서 서로 사귀는데 유용하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우선 내 것부터 외웠다. 나는 잇티제(ISTJ)다.
잇티제는 매사에 신중하고 충실하며, 일에는 성실하고, 모든 것에 안정을 추구한다. 그때그때 느낌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걸 두려워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친동생이 ENFP라 나랑 너무 안 맞다는 걸 평생 증명하면서 살아왔으니 말 다했다. 잇티제 중에 특히 여자는 가정에 정성을 기울인다고 하던데 내가 딱 들어맞는 경우다. 남자를 만날 때도 뻥카를 남발하거나 허세가 보이면 안녕히 가시라고 정중하게 보내드린다. 단점이라면 융통성이 부족하여 고지식하다는 소리를 꽤 듣는 편이다. 규칙에 민감하여 신호위반 같은 걸 못 참고 보수적이라 깊이 사귀기가 참 어렵다. 하지만 일단 마음속에 들어오면 무한신뢰하는 것이 잇티제 여자의 전형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나를 I 유형으로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업무를 통해 알게 되거나 운동하면서 만난 친구들은 "네가 I라고? 거짓말!"이라면서 나를 적극적인 E라고 몰아간다. 이럴 때 I는 그냥 둔다. 아니라고 하면서 바로잡고 싶지만 상대방이 껄껄 웃으며 거짓말 말라고 하면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I가 98%거든...' 겉으로는 그냥 웃는다. 내향형은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는 데 있어 소심하다.
나를 잇티제로 보지 않는 건 고도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강사 생활을 했으며, 여러 조직에서 차이고 밟히는 중에 아... 사회생활 이렇게 하면 내가 뭣도 아닌 게 되는구나 깨달으면서 낯선 이들 앞에서 방긋방긋 웃을 수도 있으며 갑작스러운 제안에 오케이를 외칠 수도 있게 되었다. 좋아! 라고. 잇티제의 거절 방법은 정중하고 침착하다. 하지만 짜장면 먹으러 가다가 오늘은 갑자기 떡볶이가 당긴다는 그녀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는 걸 어째. 좋을 수밖에. 좋아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걸 나는 육감적으로 알 수 있다.
나는 전형적인 잇티제로서 스케줄러를 굉장히 사랑한다. 계획과 실천과 평가를 차례대로 진행해야 안정감을 느끼니 여행이라도 한 번 갈라치면 2주 전부터 준비에 준비를 거듭한다. 변화 없이 진행했을 때 큰 보람을 느끼지만 남들이 보면 참 재미없게 산다 싶을 것이다. 뭐, 인생은 각자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거니까. 내가 ENFP 친동생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반대로 동생은 나에게 지루하지 않냐고 자주 묻는다.
"지루하지 않아?"
"아니. 굉장히 좋아."
"으이구~ 재미없어."
"난 재미 좋아."
"뭐 색다른 거 없나...?"
엔프피 동생은 방방 뛰면서 새로운 그 무엇을 찾아 탐색을 시작한다. 끝까지 끌고 나가는 힘 대신 새롭고 신기한 걸 찾는 능력은 탁월하다. 아마 동생도 적지 않은 나이이니 직장에서는 나름 사회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한다. (그렇길 간절히 바라는 잇티제 언니의 마음...)
잇티제의 삶을 힘들어하던 시기가 꽤 길었다. 다수 앞에 서서 입이 떨어지지 않아 등줄기가 흥건했던 기억, 갑작스레 보자며 근처라고 전화하는 지인, 낯선 곳에서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듯 뛰는 심장을 부여잡느라 애썼던 시간들이 '네, 저는 잇티제 여자입니다' 인정하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다행스럽게도 사회화 교육이 잘 먹혀서 지금은 덜 떨고 덜 두근대며 더 웃을 수 있다. 넉살 좋다는 말도 가끔 듣는다. 교육의 결과가 좋은 만큼 기분도 좋으니 아마도 더 나아질 것이다.
그러니 잇티제를 주변에서 보신다면 여유로운 웃음 한 번 부탁드린다. 한 박자 쉬면서 기다리면 입을 뗄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활동적인 내향형 인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