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와 그의 아내 - 3
우리 엄마가 엄마가 아니었을 때를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엄마는 그냥 늘 엄마로 있었던 것 같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엄마였던 것처럼. 하지만 그건 나의 엄마니까 그럴 것이다.
분명 엄마도 꼬꼬마 때가 있었고, 학교도 다녔고, 깔깔 웃었던 추억도 있으리.
엄마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가시나들이 촐싹거리노!
쓸데없이 가시나들이 밥을 와이리 많이 먹노!
이렇게 말씀하시며 엄마의 할머니가 밥숟가락을 뒤집어서 이모들 머리를 딱딱 때리셨단다.
"엄마를?"
"아니 엄마의 언니들."
"엄마는?"
"엄마는 너무 어리기도 했고, 또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어."
아마도 할머니의 숟가락이 꼬꼬마 분순이에게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 같다.
우리 엄마 '분순이'는 동네 기와집 셋째 딸이었다. 맞다.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
우리 엄마가 살던 동네는 척과라는 곳이었다. 척과에서 뒷산으로 넘어가면 부산이고, 앞산으로 넘어가면 울산이다. 부산과 울산 사이의 산속 마을에 박 씨 집성촌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적 외갓집에 가면 동네에 들어서면서부터 인사를 했다. 어느 한 집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다. 만약 지나쳤다면 다시 돌아와 신발 벗고 방 안에 들아가서 할머니 손을 잡고 한참을 안부를 여쭤야 하는 가까운 친척댁이었다. 이웃사촌이 아니라 진짜 사촌들이 모여 모여 살았으니 남이라고 할 수 있는 집이 없었다.
아이고~~~ 분순이 아이가~! 은제 왔노?
니는 누고? 야가 미칼라가?
아이고야 길에서 만나믄 몬 알아보겠다!
니는 이가 아들이고, 니가 그 짬보가?
나는 미칼라. 남동생은 이 씨니까 이가 아들. 막내는 너무 울어서 짬보였다.
이렇게 외갓집은 우리만 갔다 하면 동네가 들썩들썩했다. 어렸을 적 내 관점에서는 우리는 척과에서 굉장히 환영받는 존재였다. 외할머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동네의 모든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다 알아보시고, 언니 오빠들이 우리를 데리고 산으로 계곡으로 놀러 다녔던 기억이 있다.
느그가 이스방네 아~들이가?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아니더라도 그러셨을 분들이다. 누군지 모를 수가 없는 동네니까. 그런 동네에서 자라서 그런지 우리 엄마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천성이 밝은 분이다. 그런데 이번에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엄마가 우리 엄마가 아닐 뻔한 이야기를.
내가 4살, 막내 이모가 2살, 외삼촌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너네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 심장마비로. 그때가 5월이었고, 6월에 외삼촌이 태어났지.
옆에 큰할아버지가 외할머니를 보고 너무 딱하셨는지 애를 하나 양녀로 보내라고 하셨대. 그 할아버지는 아들 하나 딸 하나 이렇게 둘 밖에 없었거든.
외삼촌은 핏덩이니까 안 되고, 막내 이모도 2살밖에 안됐으니까 내가 유력한 후보가 된 거지. 언니들은 너무 크고.
그런데 외할머니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아무리 훑어봐도 안 되겠더래.
어렸을 적 분순이는 '벌벌이'였다. 겁도 많고 잘 울어서. 그래서 할머니는 더 보내지 못했을까?
지금의 우리 엄마를 생각해보면 정말 그랬을 것 같다. 똑 부러지는 깍쟁이보다는 어리숙함이 더 어울리는 엄마다. 그래서 주변을 더 돌아보고 앞뒤 계산 없이 남을 도와주다가 곤란한 일도 많았을 우리 엄마. 깍쟁이는 득과 실을 따지지만 벌벌이는 마음이 가는 대로 손을 내미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