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 8
* 5월 12일
* 두런두런 다락방 회원님들과의 값진 토론
펠리시테의 모습은 흡사 종교적으로 승화한다는 느낌이었어. 그녀의 순박한 마음에 동화되어서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고, '이게 인생이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어.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마음 가는 대로 살았던 그녀.
그런데 그 마음이 순박하디 순박해서 차라리 사랑의 완전한 형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극찬을 받았다. 누구에게? 우리 독자들 말이다. 펠리시테는 동물 같은 헌신으로 주인마님과 그녀의 딸, 조카를 사랑했다. 마지막엔 앵무새에 이르기까지 펠리시테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그 객체들이 없었다면 펠리시테는 살지 못했을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둘 곳이 있어야 살 수 있다.
헤로디아는 우리에게 살로메보다 덜 알려진 인물이에요. 그 자체로서 우리는 남성 중심적인 시각을 답습한다고 볼 수 있죠. 요한의 목을 치게끔 주도한 건 헤로디아였고 수동적으로 따랐던 건 살로메였어요. 남성 입장에서는 수동적 인물인 살로메를 다루기가 훨씬 쉬웠던 거죠. 헤로디아는 너무 능동적이라 남자들이 싫어해요.
아... 나는 굉장히 수동적인 사람인데 나 이제 어쩔.
헤로디아가 두려워했던 것은 말이 가진 힘이었다. 앎과 말이 가지는 권력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고 최고의 자리에서 휘둘러지고 있다. 우리의 정치 현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여론몰이를 볼 수 있는 스토리였다.
무엇이 옳은지 고민하기보다 맛깔스럽게 꼬시는 작업에 우리가 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보자. 정신 똑띠 차리고. 기록에 대한 통찰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성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도 책을 읽으며 문자만을 볼 것이 아니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살로메는 많은 작가들이 사랑한 소재였다. 팜므파탈도 그랬고,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도 그렇다. 동일한 상황을 여러 시각으로 다양한 입장에서 봤던 재미도 있었다.
쥘리앙의 이야기는 개연성 부분에서 조금 약했던 것 같다. 특히 부모가 온 재산을 탕진해가며 아들을 찾아 헤맸다는 장면이 그랬다. 그 부모는 아들이 계시대로 잘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잠결에 죽었기 때문에 행복한 마지막이었을 것 같다. 이불을 들추고 자기를 찌르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는 않았을 테니.
오이디푸스와 강하게 연결되는 작품이었다. 살육에 대한 쾌감을 추구하던 쥘리앙이 나름대로는 그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으나 명분만 남았다. 마치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처럼.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 성지 탈환이라는 고귀한 명분이 활활 타올랐던 1차 전쟁 말고는 나머지 모든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자기네들끼리 공격하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던 십자군 전쟁.
조금 어려운 책이었어. 뒤에 작품 해설을 읽고서야 겨우 이해했을 정도였어. 보봐리 부인을 생각하며 읽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묘사가 너무 지루했어.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보봐리 부인보다는...
그래서 다음에 보봐리즘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 역시 우리 회원님들의 수준이 이 정도.
어떤 리뷰어가 이 작품을 베토벤의 소나타에 비유해서 너무 좋았다고 하신 걸 보니 모두 쉽지만은 않은 책이었던 건 확실하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얕은 통찰력을 한탄했는데 이 토론으로 조금은 깊어진 것 같아 굉장히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