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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교리 집

목수와 그의 아내 - 5

by 미칼라책방

어렸을 적 살았던 도마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고 동네 이름도 바뀌었다.

'이리 오너라~' 소리치며 들어가야 할 것 같은 큰 대문이 있었던 집.

도마교리 집이 그립다.

나는 꼬꼬마 때 몇 년 살았지만, 아빠는 거기서 나고 자라 손주 볼 때까지 사셨다.

게다가 아빠가 우물을 파고 할아버지와 함께 기와를 얹었으니 그 집에 대한 그리움을 말해 무엇하리.

아빠에게 도마교리 집에 대해 물었을 때 아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추억들을 꺼내셨다.


"아빠, 군대 다녀와서 집 지은 얘기 좀 해 줘."

"관서네 집은 내가 총지휘를 했어. 그리고 고모 친구 미옥이네랑 피 서방네 하고, 준회네 집도 내가 지었지."


도마교리 우물을 4길이나 파고 물이 콸콸 나오는 그 집을 뒤로하고 군대에 간 아빠는 제대하고 돌아와 동네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이 경험이 여태껏 우리를 먹이고, 키우고, 공부시킨 아빠의 자산이 되었다.

처음엔 '둔대리 목수' 밑에서 일꾼으로 집을 지었고, '관서네 집'은 아빠가 감독을 하면서 완공하셨다.

그래서 집 지은 얘기를 하면 '관서네'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아빠의 자존심이자 자랑이니까.


"관서네 집 지을 때 동네 사람이 무시도 많이 했어. '니가 무슨 집을 짓냐!'면서."

"왜?"

"그때 내가 어렸으니까."

"몇 살이었는데?"

"스물셋."


스물셋에 집을 짓다니.

지금이라면 가당키나 했을까?

그 시절에도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청년이었던 아빠는 걱정했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매일 새벽 안골에 있는 기와집 앞을 서성거렸다.


"매일같이 안골에는 왜 갔어?"

"멋진 기와집이 있거든. 그 집 보고 연구하는 거지. "


해.jpg



23살 청년은 동네에서 튼튼하기로 유명한 그 집을 바라보며 매일 아침 해를 맞았을 것이다.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잘할 수 있다!'는 결심을 양 손에 들고 논을 갈기 위해 집으로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수많은 걱정과 결심을 담았을 아빠의 두 손을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왼쪽 새끼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계셨다. 늘 험한 일을 하시니 손이 성하면 이상할 정도이다. 아빠의 두 손에 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담아 드리고 싶다.


"아빠! 다른 건 몰라도 구들 놓는 건 되게 어렵던데 , 그건 어떻게 배웠어?"

"군대 가기 전에 도마교리 집 지을 때 부산 아저씨하고 놔 본 게 다야."

"그걸 3년이 넘도록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어?"

"내가 너한테만 살짝 말하는 건데 내 머리가 워낙 비상해야 말이지."


비상한 머리의 아빠와 그 딸인 나.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아빠와 그걸 진짜라고 받아치는 나의 상황이 너무 웃겼다.


"그때 아저씨가 짜귀를 만지지도 못하게 했는데 몰래몰래 대짜귀를 내려쳐가지고 아저씨한테 혼도 많이 났어. 그러면서 배운 거지."

"왜 못 만지게 하셨는데?"

"연장 상할까 봐 그런 거지. 아무렇게나 만지면 나도 다칠 수 있고."

"그럼 아저씨 뒤돌아섰을 때 만지는 거야?"

"아니. 점심 드실 때 얼른 나와서 요리조리 해보는 거지."


그렇게 나의 젊은 아빠는 정월부터 모내기 전까지 동네에서 집을 지으셨다. 모내기부터는 먹고살기 위한 고군분투의 농사가 시작되었다.

농사 지을 때 어땠냐고 물었더니 아빠는 '먹고살기 힘들었지...'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정말 약해진다.


먹고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먹고살기 위해 농사를 지으셨다.


그 옛날에는 자녀들 중 농사를 담당하는 아들이 있었고, 공부를 담당하는 아들이 있었다. 나의 아빠는 농사 담당이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아빠가 일 대신 공부를 했더라면 정말 큰 일을 도모하지 않았을까...

아빠 본인도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몰래 중학교 입학시험도 보셨단다. '6등'으로 합격하고도 돈이 없어서, 그리고 농사를 지어야 해서 포기하셨다. 나의 어린 아빠는 공부를 못하게 된 그 날부터 밤마다 싸리문을 붙잡고 한 달을 우셨다. 듣고 있는 나도 마음으로 울었다.

머리가 비상한 아빠 때문에 웃고, 배움에 목마른 아빠 때문에 울었다.

이런 아빠를 내가 많이 닮았다. 외모도 성격도 제일 많이 닮았다. 그렇다면 비상한 머리도 닮고 싶다. 하지만 내 머리가 비상하다면 그건 엄마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목수의 아내가 주장한다.

이미 내가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아빠와 엄마는 당신을 닮았네. 아니네. 맞네... 나를 두고 밀고 당기기를 하셨다.


"아빠, 전기 공사는 어떻게 해? 위험하잖아."

"전기학원 다녔지."

"학원? 그 시절에 학원이 있었어?"

"을지로까지 다녔어."

"돈이 없어서 학교도 못 다녔다면서. 할머니가 몰래 주셨어?"

"그게 아니라 내가 몰래 지고 나갔지.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진짜? 그걸 지고 을지로까지 갔어?"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니네 할머니 몰래 쌀 한 말을 들고 을지로에 갔어. 전기학원 등록하러."

"도마교리에서 을지로 다녀오려면 하루가 족히 걸렸을 텐데 거길 어떻게 몰래 다닐 수 있었어?"

"결국 들켰지 뭐. 그래도 어떡해. 이미 등록 해 놨으니까 다녀야지. 한 3개월은 배웠을 거야."


할머니 몰래 쌀 한 말을 들고 나섰던 아빠의 어깨가 오늘처럼 작아 보였던 적은 없었다. 본인의 공부가 부족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한이 있었던 아빠에게 을지로 학원 이야기는 나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게다가 1960년대에 도마교리에서 을지로로 간다고? 그게 가능했을까 싶다.

나는 국민학교를 도마교리에서 다녔다. 1980년대에 도마교리는 40분 정도를 걸어 나와야 정류장이 있었고, 거기서도 운이 좋아야 버스를 탈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산골에서 을지로까지 전기를 배우러 다녔을 아빠를 상상해보았다.


작지만 다부진 체구에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내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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