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네트워크, 우리의 성격을 변주해보려했던 실험들
체화당의 실험들을 정리하는 가운데 발견한 세 번째 키워드는 마을의 확장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 배움터나 마을만들기 같은 특징들은 결국 구체적인 장소(체화당)를 중심으로 개인 간의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서 배움 공동체를 만든다거나 마을이라고 하는 조금은 구체적이며 물리적인 장소를 중심으로 파편화된 개인들의 일상을 연결하려는 시도로서 쉽게 그 의도와 목표가 파악되는 편이다. 마을과 공동체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때나 지금이나 누구든 시도해봄직한 것들, 그것을 우리도 했던 것이고, 거기에 우리 색깔이 조금 더 입혀졌던 수준이랄까.
그런데 체화당에서는 그렇게 쉽게 어떤 특징들로 설명되지 않는 시도들이 있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시아라는 공간 범주나, 틈만 나면 등장하는 각종 네트워크 결성의 의지, 그리고 체화당이라는 장소의 성격 자체를 변주해보는 실험과 체화당을 넘어 과감하게도 신촌의 다른 사업자들의 성격마저 변주시켜 보려했던 실험도 있었다.
‘신촌 청년문화센터’ 구상
이신행 교수는 2004년 가을 자신의 수업에서 참여한 학생들에게 아시아 청년들의 교류의 장이자 학습 공동체로서 신촌 청년문화센터라는 주제를 던진 바 있다. 신촌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정치사회적 장소성을 미루어볼 때 충분히 꿈꿔볼만 한 것이었다. 수업 참가자들은 당시 구체적인 건물까지 구상해 볼 정도로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논의를 이어나갔다. 국경을 넘어 서로 연결된다고 하는 자유로움이 만들어내는 흥분이 자본주의의 팽창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도,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고민하는 좌파적 인식론을 지닌 이들에게도 모두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시기였다. 그러니 이 논의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촌 청년문화센터 구상이 던져지고 나서 다음 해부터 꾸준히 우리 안에서 청년문화센터의 한 자리를 만들어가는 만들어가는 흐름이 만들어졌다. 2005년 봄 신촌민회에서 외국인 조직을 담당한 안인주씨는 그 해 열린 체화당 음악회에 일본 유학생들과 함께 일본의 한 어촌 마을의 오도리(춤)를 선보였다. 뜨거운 반응 속에서 앵콜 요청이 들어왔고, 관객들이 한데 어우러져 오도리를 배웠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그리고 매년 여름 사회적 경제를 공부하는 일본의 츄쿄대(中京大) 학생들이 지도교수 나일경과 함께 체화당을 찾았고, 2010년 9월에는 풀뿌리사회지기학교와 함께 다섯 번째 한일교류 여름학기 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2007년 당시 체화당에서 활동했던 김가연씨는 신촌을 본거지로 아시아를 주제로 한 ‘code A’라는 이름의 단체(잡지 팀, 공간 팀)에서 활동하며 창간호 잡지를 발간했다. 아시아 되기, 아시아로 (세계를 다시) 생각하기 등을 토론 거리로 삼으며 이들도 아시아적 화두가 던져질 하나의 첫 자리로 신촌의 가능성을 봤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시도들이 장기적인 비전이나 구체적인 전략으로서 발전하고 실행되지는 못했다. 앞서 이야기한 2004년 수업의 결과물이나 이신행 교수가 제시한 구상도 구체적인 전략이야 당연히 부족했고, 비전으로서 작동하기에도 부족함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비전이 되기 위해서는 그 목적이 뚜렷해야 하고, 뚜렷한 그 목적이 참여자들의 동기를 자극할만한 것이어야 한다. ‘아시아’, ‘청년성’, ‘신촌’ 정도의 키워드와 국가로 상징되는 중앙권력으로부터 지역사회 내지는 초국가(Trans-Nation) 사이 어디쯤 독립적인 ‘자치적 공동체’이라는 사회적 의미만 존재했던 셈인데, 체화당 사람들은 더 적극적인 비전과 그 비전을 수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 전략으로 다듬는 작업을 하지는 못했다. 아쉬운 일이다.
지역문화카페운동, 카페연대
체화당의 운영진에게 주어지는 과제 중 하나가 카페연대였다. 짧게는 반년, 길게는 2년 정도 주기로 체화당 운영에 참여했던 주 운영진이 카페연대를 자발적인 계기로 자기 과제 삼은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체화당이라면 해야 하는 일, 체화당의 목적과 부합하는 규범적인 과제로 받아들였던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공기가 체화당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2013년 풀뿌리사회지기학교에서 개설된 ‘지역문화카페운동’이라는 이름의 과목을 통해 카페연대의 추구하는 목표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연세대 김왕배 사회학과 교수가 커피와 카페의 사회적 의미, 공간과 장소성, 장소 상실 등에 대한 이론적 검토, 현대판 서당을 지향했던 길담서원의 박성준 대표가 공간의 사회적 의미, 지역문화공간 사례로 부산의 생활기획공간 ‘통’, 카페 바인, 대구의 고전음악감상실 ‘녹향’, 헌책방 ‘물레’ 등이 분석되었다. 지역사회의 사회문화카페가 연대체를 결성해 사회적(Social) 공간으로 삶의 정치와 문화운동을 시도해 보는 것. 하지만 결코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2009년, 2011년 단 두 차례의 시도 정도만 있었을 뿐이었다.
김혜리 매니저가 시도한 카페연대는 홍대 ‘노란 코끼리’, 충무로 ‘얼티즌’이 함께 참여하여 2009년 12월 ‘지속 가능한 카페공동체’를 목표로 출범했다. 북카페답게 그 방식에 있어서 독서클럽 카페연대체를 선택해 진행했다. 북클럽 조직을 1차 목표로 두었는데, 초기에는 카페별로 독서토론 그룹을 만든 뒤 점차 영역을 넓혀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슈까지 두루 다루겠다는 목표를 공유했다.
3년 만인 2011년 김원영 매니저가 두 번째로 카페연대를 다시 결성하고자 노력한 바 있다. ‘놀라운가게’, 신촌 ‘쉬바펍’, 합정동 ‘당고집’과 ‘좋아서하는가게’, 홍대 ‘Object’ 등과 몇 차례 논의를 거쳤지만 각자의 사업체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않는 상황에서 연대라는 것이 사실상 실질적인 효과를 낳기 어렵겠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결국 구축되지 못했다.
이런 시도가 문자 그대로 연대(solidarity)에 가까운 시도였는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했던 노력이었는지 질문하게 된다. 2009년 즈음부터 스타벅스를 위시로 하는 다국적 기업이 일상 세계를 본격적으로 점령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역시 다국적 요식업 프랜차이즈가 대학 내에 들어오기 시작해 대학 상업화가 대학사회의 의제가 되던 시점이기도 하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풍경이 되어버렸지만 그런 점에서 체화당이 당시 분위기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사회문화카페를 연결하여 공동의 과제를 창출하고, 비즈니스 측면에서도 규모 있는 호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지 고민했던 시도는 분명 ‘연대’를 창출하고자 했던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물론 실패했지만 말이다.
지역 플랫폼
2012년 정동욱 매니저는 문화, 사회, 정치에 대한 아이디어의 발원지로서 카페라는 공간을 재발견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 시기 체화당은 새로운 생각과 아이디어들이 인큐베이팅되는 사회적 실험장(Social Lab)으로 지역연구 작업이나 컵밥 ‘부엌아띠’, TED를 넘보는 신촌지역 기반 대중 인문학 강좌 ‘OLIVE(Open Lecture Live)’, 다양한 공간에서 작품을 전시하는 ‘픽(PIX)’, ‘기본소득’ 운동그룹 등에게 장소 제공이라는 플랫폼으로서 적극 활용되었다. 이는 다른 사람들만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체화당 스스로 여러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을 만들어가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신촌이라는 대학촌의 지역문화 브랜드 구축을 장기적인 목표로 삼았다. 지역연구, 문화잡지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문화적 색깔을 가진 공간들을 발굴하고 알리는 작업을 통해 신촌의 자생적 문화기반을 다지고자 아래의 ‘신촌 문화 지도’ 제작을 시도했다.
[신촌. 유기농 영화제]
초기의 구상과 달리 체화당은 마을, 주민, 공간을 좀 더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정체성이 체화당을 채웠고, 또 여러 수식어들이 체화당을 설명하긴 했지만, 가장 편하게 이 공간을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이 결국 ‘마을카페 체화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을’이라는 개념은 사실 상상에 가까운 개념이기도 하다. 특히 서울이라는 대도시 공간, 익명성이 주는 자유로움이 익숙한 청년 세대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규범적으로 ‘마을’이 중요하다고 인지하기 시작한 어떤 계기나 학습이 있었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일상생활과 그 일상을 구성하는 욕망이 자신이 중요하다고 인지하는 ‘마을’과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마련이다. 체화당은 끊임없이 그런 자기 고민이 규범적 지향과 긴장하는 공간이었다.
그런 긴장이 만들어 낸 기획 중에는 [신촌. 유기농영화제]가 있다. 도시의 장소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신촌에 특히 많이 존재하는 호프, 카페, 만화방 등의 공간이 관계가 형성되는 커뮤니티 거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다른 목적으로 지어진 공간도 지역사회에 인계되어 비공식적 교류이 중심지로 활용될 수 있음을 타진해 보았다. 소비자가 아닌 시민이 되기 위해선 장소에 대한 애착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시민성을 만들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도시 공간에 존재하는 그런 공간, 즉 카페와 호프, 만화방 같은 공간이 도시를 살아가는 시민 개인에게는 거주하는 집과 학교나 직장과 같이 자기 정체성을 투여하는 장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의 마을은 어쩌면, 동이나 구처럼 구획된 면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자기 정체성을 부여하는 점(집, 직장, 학교, 카페나 호프와 같은 단골 가게, 공원이나 도서관 같은 공공공간 등)과 점을 잇는 선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이런 고민에서 일상의 공간이 영화관이 되는 [신촌. 유기농 영화제]를 2016년 김민주 매니저와 체화당의 오랜 기획자 김지연씨가 공동 기획했다. 국내외 개인 및 그룹들을 적극적으로 연계해나가고, 전국 대상의 홍보에 들어간 결과 예상치 못한 매진 행렬에 우리의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지역사회와 커뮤니티에 대한 관심을 기존의 공동체적인 방식에 고정시키지 않고, 커뮤니티의 구성원과 그 장소성에 대한 도시적, 미래적 실험이었다. 마을과 공동체, 협치(거버넌스)와 도시재생, 풀뿌리운동 등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의존해야 할 것 같은 흐름들이 여기저기에서 만들어지고 있지만, 정말 이런 흐름들이 나와 우리의 일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당위에 가까운, 그러니까 공동체가 필요하다, 아래로부터 혁신이 만들어져야한다는 수준의 구호만 있을 뿐, 어떤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미래에 의존해야 할 이 변화의 흐름에 참여할 수 있을지는 정교하지 못한 것 같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상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많은 기획이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그 기획이 이왕이면 서울과 같이 일상이 철저히 도시적 삶의 형태로 구성된 장소에서 구현될 때 다른 방식의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내일의 커뮤니티는 ‘소속의 융통성(Flexibility)’이라고 일컫는,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사람들과의 관계와 자신이 속하는 그룹을 선택할 수 있는 구조는 편안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