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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과 태영 Oct 17. 2020

체화당의 두 가지 실험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것, 동네 만들기 

첫 번째 실험.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해 보는 것

 

  공동체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욕구(needs)를 파악하고 살피는 것은 공동체가 개인보다 우선시되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의 시대에서 특히나 중요하게 요구되어진다. 2012년 체화당 운영진들이 해외탐방단 시커스(SEEKER:S) 2기에 선발되어 오사카 교통의 중심지인 우메다 역에서 한 정거장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아만토 마을을 방문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오사카 카페거리로 유명세를 타면서 골목이 다시 활기를 찾고 도시재생의 모범 사례로 주목 받고 있는 곳이다. 이곳의 대표 니시오 준과 인터뷰에서 “아만토는 한자로 天人,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곧 행복한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스텝들이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 주었으면 한다.”며 개인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동체를 강조했다. 3일간 머무르면서 만난 스텝들이 대단히 적극적이고 자유로워보였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체화당의 처음도 그랬다. 첫 간사였던 김혜진씨는 2001년 이제 막 문을 열었을 때 당시 체화당 콘셉트가 ‘네가 하는 일의 공간을 내주겠다.’라는 것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자신이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야기 창작이 하고 싶어 체화당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2002년 매주 토요일 자기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을 한 가지씩 가르치는 ‘토요강좌(약칭 토강)’라는 프로그램이 기획되었다. 그룹 동물원의 김창기씨가 ‘일상이 되어버린 음악’을 주제로 토강의 시작을 열었다. 그녀는 토강의 아홉 번째를 ‘판타지 문학의 이해, out of this world’를 주제로 진행했다. 토강에 대해 그녀는 “누구나 한 가지쯤은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이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개인 콘텐츠를 정리하고 나누는 기회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라고 회고했다. 몇 해 전 마을사업 아이템으로 크게 유행했던 사람책 도서관의 전신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체화당은 이렇게 늘 한 걸음 앞서 갔다. 


  이렇듯 체화당의 처음 역시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개인 작업 공간(실천적 공간)이자 서로의 관심사를 나누는 사회적 공간인 셈이었다. 그녀는 2003년 대산문화재단의 ‘대산창작기금’을 받은 첫 번째 소설 <아로와 완전한 세계>를 통해 작가로 데뷔했다. 그리고 2005년 <프루스트 클럽>에서 등장하는 카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신이 경험한 체화당을 모델로, 독서클럽 역시 체화당에서 경험한 것들이 많이 녹아 들어갔다고 밝히고 있다. 체화당으로 자신의 일을 발견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체화당 후반, 배울이 출신 매니저들이 운영해 나가기 시작하는 2015년 이후부터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양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동네탐험대, 마을음악회에 이들의 색깔이 진하게 입혀졌고, 요리, 목공 등 직접 하고 싶은 일들을 중심으로 친구와 이웃을 초대하는 작업들이 자연스러워졌다. 체화당이 마주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경영의 어려움, 공간 정체성 혼란 등-은 여전했지만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 일감으로 만들어나가는 그들이 과거 운영진들에 비해 훨씬 활기찬 보였던 이유가 있었다.


두 번째 실험. 동네 만들기


  체화당의 실험 일부를 묶는 두 번째 특성은 동네만들기, 마을만들기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의 민주화 운동과 1991년 선거를 통해 지방자치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사회를 변화시켜가려는 움직임 안에 ‘주민’이 본격적인 주체로 호명받기 시작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건강한 먹을거리라는 일상의 문제를 중심으로 소비자협동조합운동도 본격화되고, 1990년대를 거쳐 공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장되며 다양한 형태의 대안교육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특히 일본사회에서 가장 격렬했던 사회변혁 운동주체의 대명사로 지금도 회자되는 전공투(전학공투회의의 줄임말) 세대들이 지역사회로 침투하여 벌였던 혁신 자치체 운동과 일본 고유의 지역적, 산업적, 역사적 맥락이 버무려져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마찌즈쿠리 운동이 한국에 소개되며, 이 같은 한국 시민사회의 흐름에 큰 자극을 주었다. 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다름 아닌 ‘마을만들기’이다. 그렇게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마을만들기라는 명칭과 함께 관련된 일감들이 활발히 등장하기 시작한다. 신촌에 체화당이 문을 연 2001년은 그런 움직임이 막 태동해가던 시기였던 셈이다.


  체화당 어린이학교-동네탐험대 

  체화당보다 앞서 만들어진 신촌민회의 지속적인 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시민사회운동학회’가 있었고, 일부 멤버가 체화당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이들은 2003년 1월 겨울부터 체화당 초기의 간판격 일감 중 하나인 ‘체화당 어린이학교’를 시작, 2004년 여름학교까지 네 차례 꾸려 나갔다. 당시 회의록을 보면 그 목적이 “지역사회의 초등학생에 대한 교육활동을 통해 마을만들기”에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학부모(주민) 조직을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찌 첫 술에 배부르랴 작업의 성격상 단 번에 만들어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에 아쉬움이 남았지만 마을을 대상으로 한 체화당의 첫 프로그램으로 체화당에 대한 주민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갖게 했다. 2005년 7회 체화당 어린이 여름학교까지 꾸준히 학부모 조직을 위한 시도는 계속 되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주민들에게는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소비되어졌고, 우리 역시 결국 뚜렷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린이를 대상하는 일감이 이대로 끝난 듯 했으나, 9년 만인 2014년에 배울이들 중심으로 ‘동네탐험대’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콘셉트의 기획이 이어져 갔다. 하지만 이때는 주민 조직을 염두하지 않는 동네 언니, 오빠가 되어 말 그대로 프로그램 자체에 집중했다. 동네탐험대는 체화당이 사실상 카페 영업을 중단한 2019년에도 봄, 가을 두 차례 더 열렸고, 그 이후에도 다음 개최 일정을 수시로 문의해 올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형성하고 있다. 윤혜진 매니저의 적극적인 추진력으로 강원도 춘천에서도 진행될 정도로 그 인지도는 어느새 신촌을 넘어서고 있었다.  


  체화당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닫을 때까지 체화당이 마을카페로서의 실체를 인근에 거주하는 지역 주민들에게 확인시켜주는 가장 효과적인 프로그램은 바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기획이었다. 정주성이 낮고, 마을이라는 개념이 정작 본인의 일상생활에서는 낯선 청년기의 스텝들이 마을의 실체를 스스로 확인하기에도 가장 효능감이 높고, 주민들과의 관계 형성에도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탐험대로 그 명칭은 변화했지만, 기본적으로 일상이 일어나는 장소와 어떤 식으로 관계 맺을 것인지 어린이들과 소통하려 했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마을을 키워드로 하는 기획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대상으로 어린이를 떠올리는 습관은 실제 도시의 지역사회라는 공간이 생활공간으로서는 얼마나 빈약했는지 반증하는 사례이다. 그러니까 마을에서 학교를 하고 탐험도 할 사람이 어린이밖에 없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먹거리 관련 일감

  신촌의 지역성 중 하나로 20대 거주자가 유독 많다는 것을 꼽을 때, 체화당의 ‘마을’은 그 20대 거주자를 향해야 한다는 강박은 당연히 있었다. 강박이라기 보단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놀랍게도 대다수의 ‘마을’이름을 지닌 사업들이 여전히 어린이와 청소년이 포함된 4인 정상가족의 이미지 안에 존재하고, 신촌이라고 그런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20년 전에도, 생활이 불안정한 20대 동료 시민을 초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인식되는 것은 역시 ‘같이 먹는 자리’를 만드는 것일 테다. 


  2004년 체화당에는 ‘목뭘먹’이라는 소모임이 있었다. 줄임말이 요새 유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저 정도의 줄임말은 세기 말부터 존재했다. ‘목뭘먹’은 ‘목요일엔 뭘 먹지’의 줄임말이다. 매주 목요일에 모여 오천 원 이하 재료비를 가지고 만들 수 있는 메뉴를 공유, 함께 만들고 먹는 소모임이었다. 요새 말로 하면 소셜 키친(Social kitchen)이나 소셜 다이닝(Social dining) 같은 소모임이었다. 참고로 이전까지 소강상태였던 체화당은 이 모임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자연스레 운영진으로 등장하면서 다시 생기를 되찾는 구심점이 되었다. ‘목뭘먹’ 이후에도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 먹는 모임들은 꾸준했다. 2017년, 2018년 요리에 관심과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권다은 매니저가 진행한 반찬 만들기 프로그램까지 체화당이 문 닫기 직전까지 ‘먹을거리’는 꾸준한 키워드였다고 볼 수 있다. 


  체화당 마을음악회-여기는 음악가 마을 

  제1회 체화당 어린이학교가 열린 그 해 8월 23일 제1회 체화당 마을음악회(‘음악이 있는 우리 동네’)가 열렸다. 지역사회를 위한 장이자 소통의 장이 되고자 음악회를 기획했고, 지역음악회로 자리 잡는 것을 과제와 목적으로 했다. 이후 부정기적이긴 했지만 계속 이어져 오면서 명실공이 지역음악회로 자리 잡았다 평가할 수 있겠다. 김혜리 매니저와 김현씨는 2006년 11월 이후 끊어졌던 마을음악회를 2년 6개월 만에 부활시킨 데 대해 여덟 번 째 체화당 음악회 ‘다시 꿈꾸는 마을(2009.6.6.)을 가장 기억에 남는 일감으로 꼽았다.

  마을만들기가 지금처럼 제도화되기 전 시점에 만들어졌던 체화당 마을음악회는 그 진행 과정이 십시일반 말 그 자체였다. 달짝지근한 식혜로 이미 마을에 소문이 자자했던 체화당 골목 끝 할머니는 체화당 행사가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식혜로 마음을 대신해 주셨고, 체화당으로 올라오는 길모퉁이 이대 영문과 김연옥 교수도 늘 먹거리로 후원했다. 그리고 우리는 근처 상가들을 찾아다니며 마을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음악회라며 따로 홍보는 어렵다며 후원을 부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홍보가 인지상정이거늘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었는지 아니면 취지에 공감해서였는지 흔쾌히 후원금이나 물품으로 지원해주었다. 트럼펫을 연주하는 동네 어르신 등 개인과 이화여대부속고등학교 혼성합창단인 한올, 이화여대, 연세대, 봉원교회 오케스트라, 대신교회 합창단, 봉원사 등의 기관의 참여 아래 이루어져왔다. 2005년 제5회 음악회 ‘10월의 어느 멋진 밤에’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영산재(바라춤, 나비춤)를 봉원사가 아닌 체화당 마당에서 볼 수 있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여러 형태의 지원금은 의도치 않았지만 우리 스스로가 설 수 있는 생태계 만드는 일을 뒷전으로 만들어버렸다. 마을공동체 사업에 크게 의존한 나머지 행정의 일정에 따라 마을이라는 공간도 11월부터 3월까지 잠시 멈춰 서는, 웃지 못 할 상황도 있다. 이는 수단으로 활용되어져야 할 지원 사업이 목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리라. 아니면, 우리가 왜 ‘마을’을 만들려고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잃어버렸거나. 적어도 보조금을 받기 위해 마을을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마을음악회가 이어져 가는 가운데, 2014년 ‘여기는 음악가 마을’이라는 업그레이드 버전의 음악회도 탄생했다. 배울이들이 주민과 만나 이야기를 채집하고, 그 이야기들을 노래로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된 프로젝트로, 동네에 오래 거주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체화당을 오고가는 손님들까지 주민의 대상을 확장하고 노래의 형태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주목할 만했다. ‘재구성’이라는 체화당의 문화적 유산이자 학습 공동체로서의 방법론으로 지역사회와 직접 만나는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음악적 성과들이 궁금한 분들은 유튜브에 ‘음악가 마을’을 검색해 보시길 바란다. 전부는 아니지만 나름 엄선된 따듯한 영상들이 올려져 있다. 


  원룸축제 

  원룸축제는 봉원교회와 교회 내에 자리한 북 카페 샘뜰이 “지역의 청년들에게 서로 만나 대화할 수 있는 기회와 원룸생활에 필요한 정보와 물품을 제공”하고자 2009년 5월 시작되었고, 지역의 청년들이 자신의 축제를 만드는 과제와 목적으로 했다. 왜 원룸축제인고 하니, 말 그대로 이 동네(봉원동, 대신동, 신촌동일대)가 원룸이 워낙 많은 동네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원룸에 사는 이른바 ‘파편화된 일상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관계를 맺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그 목적이 드러난 명칭이기도 하다. 이 명칭은 후에 그 의미를 더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원룸마을축제’가 된 적도 있었고, 하숙집을 운영하는 분들의 귀여운 항의가 있어 ‘원룸 하숙마을 축제’가 되기도 했다. 봉원교회는 종교기관으로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초창기부터 지역사회의 기관으로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나가고 있었다. 


  2011년 봉원교회의 박용권 담임 목사의 제안으로 제3회 원룸축제에 신촌민회와 체화당이 일부 참여하게 되면서 이후 지역 파트너로 원룸축제를 함께 진행해나갔다. 청년의 주거권을 주제로 인근 청년, 학생, 외국인 등 다양한 1인 가구의 주거 현실 및 주거형태를 조사하고 이를 분석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당시 매니저였던 김원영씨는 운영진과 함께 이 근방에 살 곳을 구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위해 인근 하숙, 원룸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지도로 제작해 자료집에 담았다. 다음 해 겨울 이 자료집을 들고 한 모녀가 찾아왔다. 어디에서 구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고,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고 전했다. 체화당으로 문의가 올 정도로 이후 체화당 근방에 집을 구하려는 학생들에게 실질적으로 활용되었다. 


  다음 해에는 체화당이 원룸축제의 전체 기획을 맡았다. 거리는 공공장소 중에서도 가장 공공성이 큰 장소다. 그래서 ‘거리에서 만나자’라는 구호를 내걸게 되었다. 청년 개인이나 다양한 그룹들이 참여했고, 이 때 서대문구의 적극적 지원 아래 차량 통제가 되고, 서대문구청장이 방문하는 등 주목을 받기도 했다. 공동체를 만들기에는 어려운 조건일 수 있는 원룸-하숙 마을이라는 특성을 브랜드로 축제를 기획한다니 행정도, 언론도 관심 가질만한 주제였던 셈이다.

  거주는 하고 있지만 스스로가 주민이라고 느끼는 청년들이 얼마나 있을까. 사실 이들에게 거주의 의미는 그저 숙(宿)일 뿐이다. 오히려 이곳이 청년을 위한 동네로 알려져 청년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게 된다면 누군가는 인생의 한 자리로 이곳을 선택하게 되지는 않을까 상정해보며 외부에서 동력을 얻고자 전략적으로 순서를 바꿔 외부의 청년들을 불러 모우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그 근방에 거주하고 있는 청년들이 발견되고 이들이 서로 관계 맺는 자리, 더 나아가 후일 거주자들이 만들어 가는 축제이기를 바랐던 주최 측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운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도시공간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우리도 이 때 이 한계를 넘지 못했다. 서울처럼 대중교통이 잘 발달되어 있는, 심지어 심야버스까지 다녀 24시간 이동이 가능한 도시에서, 사적 영역이 온전히 보장되기를 바라는 감각의 청년 세대들에게 마을은 어떤 장소일 수 있는지 질문이 부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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