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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과 태영 Oct 16. 2020

어느 한 정치학자의 제안과 실험

공론장과 새로운 학교, 그리고 카페 

 그럼 체화당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체화당의 제안자인 한 정치학자의 제안과 그 제안에 담긴 여러 고민을 복기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체화당은 자신의 건물의 1층과 지하를 학생들이 지역사회를 조직하는 장소로 활용해줄 것을 기대하고 제안했던 이신행 교수의 기여로 시작될 수 있었다.   

  이신행 교수는 토론과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한 정치학자였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학내 YMCA 조직인 ‘청록 하이Y’를 이끌었고, 대학교 시절 경동교회에서 청년 지도를 담당하면서 동시에 종로에 위치한 서울YMCA에서 대학생 간사로 ‘학생사회개발단’을 통해 농촌 활동(농활)을 기획한 바 있다. 미국 유학 생활 중에도 뉴욕 한인YMCA, 뉴욕코리아 커뮤니티 창설 등 늘 현장에 있었다. 정치학자로서 그의 연구주제는 소수자(minority) 그룹이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를 통해 사회변동의 주체가 되는 과정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1981년 연세대학교 강단에 서게 되면서 토론과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한 그의 고민을 연계한 청년 훈련과 연구 활동을 실제 교실에 응용해 왔다. 특히 1980년대부터 학생들과 20여 년간 실험한 ‘토론공동체’는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김정환의 <임진왜란> 등을 교재로 삼아 일반(일방)적인 강의 형태가 아닌 학생들이 스스로 발제한 뒤 토론을 통해 생각과 지식을 가다듬어가며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여기서 자신의 언어라 함은 연극, 연주, 자작곡, 몸짓, 팬터마임, 그림, 시등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재구성은 이신행 교수의 가장 중요한 교육방법론 중 하나였고, 체화당이 공유하는 중요한 문화가 되었다. 그러다 교재가 지리산을 이야기의 한 자락으로 깔고 있다면 과감하게 지리산 왕시루봉으로 현장수업을 떠나기도 했다. 한국의 많은 섬과 산은토론의 공명을 더해주는 자리였다. 토론공동체와 더불어 방학 때가 되면 학생,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함께 세계의 풀뿌리 현장을 보는 ‘풀뿌리의 세계성’이라는 프로그램도 2004년(뉴욕)까지 꾸준히 진행되었다.


  이신행 교수의 토론과 현장성이라는 원칙은 신촌에 구체적인 실험으로 연결되었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신촌민회다. 1991년 이신행 교수의 수업을 통해 지역사회의 새로운 회의체를 조직하는 일감을 부여 받았던 학생들은 신촌의 여러 기관과 단체를 엮어 신촌민회를 구성하고 각 기관과 단체가 대의원을 파송하도록 해 회의체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리고 역시 지역사회에 공간 거점이 될 장소를 준비하고자 했던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쌓여 2001년 카페 체화당이 문을 열었고, 지역사회와 뜻있는 젊은이를 잇겠다는 포부를 갖고 체화당을 캠퍼스로 2004년 12월 풀뿌리사회지기학교가 개교하고, 2005년 첫 번째 신입생을 맞이했다. 풀뿌리사회지기학교, 민회, 카페 이 세 가지 일감을 우리는 ‘풀-민-C’라고 불렀다. 풀-민-C는 각 지역과 부문이 지니고 있던 문제점이 주민이나 연고자, 관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생활사회적으로 표출되고(카페 체화당), 표출된 문제가 사회 아젠다로 정리되고(신촌민회), 사회 아젠다로 나타나기까지의 과정, 변수, 처방들이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는 ‘사회지기’를 기르는 학교(풀뿌리사회지기학교)로 이어지는 구상이다. 체화당은 공간으로서 매우 복잡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종합적이며 완결적인 사회운동모델로서 제안된 맥락의 결과이기도 하다. 


공론장과 새로운 학교, 카페  


  카페는 이제 밥집만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가게가 되었다. 카페는 커피를 비롯한 음료를 소비하는 공간이 그 본질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대화를 나눌 장소를 빌리는 심정으로 음료를 사 마신다. 그 뿐 아니라 개인의 작업공간으로서도 카페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며 바야흐로 카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공공영역도 모임 공간으로서의 카페 기능에 주목해 이제는 행정복지센터, 교회,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일상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금은 어디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었지만 체화당이 문을 열었던 2001년 당시만 해도 민들레영토(1994년)가 대학가에 막 들어서기 시작했을 뿐이었고, 인근에는 북 카페 프린스턴 스퀘어(1998년)가  비슷한 느낌의 공간으로 종종 소개되고 있었다. 지금은 이미 도서관과 주민센터 기능을 가져간 듯 한 스타벅스 역시 1999년 이화여대 앞에 처음으로 문을 열었으니까 체화당을 시작하던 시기에는 그 흔한 커피 전문점도 드물었다. 그러니 카페가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것을 도모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조금이라도 존재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게 1992년 신촌민회 재창립에 이어 2001년 11월 문을 연 체화당은 사람들이 모이면 지역 현안에 대한 주민들의 공론이 형성되고 지역사회의 문제를 풀어가는 방안을 모색하게 될 것이라는 공론장으로서 시작, 당시만 해도 이는 하나의 ‘카페 실험’에 가까웠다.   


  한편, 헤밍웨이는 자신을 작가로 성장하게 해 준 프랑스의 카페들을 ‘새로운 학교’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1페니 대학교’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1페니는 문학과 지성의 장에 들어가는 입장료였다. 이처럼 카페가 학교, 교실로서 재발견되고 충분히 역할 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체화당은 카페의 형식을 빌린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학교, 자기 삶을 준비하는 교실이었다. 삶의 자리에서 사실 우리 모두는 어설프고 불안정하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어느 한 자락에서 자신을 가장 가까이에 두고 자신의 인생과 맞닥뜨리는 방법, 예상 가능한 삶에 질문을 던지며 자신과 사회의 관계를 매우 실천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해 보인다. 새로운 생활방식을 제안하는, 건강한 삶을 함께 담아내는 공간, 체화당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인생을 실험을 해볼 수 있는 실천적 공간, 실험장으로서 20년 역할 했던 체화당 역시 그 자체로서 이미 하나의 실험이었던 셈이다. 


‘체화당’이라는 이름


  ‘체화당’이라는 이름에 대한 질문도 참 많았다. 샤브샤브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에는 ‘채선당’ 아니냐는 문의 전화가 체화당에 대한 질문보다 많았던 적도 있었고, 20년 시켜 먹은 백반가게의 영수증은 20년 째 ‘채화당’이라고 적혀서 온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애써 수정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체화당이라는 이름의 원래 주인은 따로 있다. 체화당은 경북문화재자료 제178호로 지정된 경북 상주에 위치한 조선시대 가옥(재실)의 이름으로 류성룡의 문화생인 월간 이전이 강론하던 곳의 명칭이기도하다. ‘체화(棣華)’란 ‘어깨동무하고 선 산벚나무처럼 배움과 뜻을 함께 한다’는 뜻에서 우애를 뜻하는 말로 이전(李琠: 1558∼1648)과 이준(李埈:1560∼1635) 형제의 우애를 상징하는데, 임진왜란 시기 국란을 극복하기 위해 의병을 조직하고, 종전 후에는 지역사회 교육을 실천하며 사설의료기관 존애원을 만드는 등의 공동체적 노력이 만들어진 장소로 알려져 있다. 실제 후손이기도 한 이신행 교수는 그런 의미를 이어가고자 ‘체화당’이라는 이름을 빌려왔다. 하지만 신촌 체화당을 거쳐 간 이들에게 상주 체화당의 존재는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다수가 실제로 그 존재를 잘 모르기도 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신촌 체화당은 상주 체화당의 이야기와 별개로 배움과 뜻을 함께 하는 우애의 장소로서 역할하기 시작했고, 신촌의 체화당은 이 장소를 거쳐 간 사람들에게 고유명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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