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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과 태영 Oct 16. 2020

신촌동 2-93 번지

카페 체화당의 시작 

  자신의 삶을 실험하는 카페가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2-93번지 여기, 있었다. 

  카페 체화당.


  과거형으로부터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카페 체화당이 공식적으로 문을 연 것은 2001년이고, 그 곳이 정리 수순에 들어간 것이 2020년 6월이니 대략 스무 해 가까이 이 공간은 여러 사람들의 노력과 마음이 모이는 자리였고, 동료들과 해보고 싶은 일을 실험해볼 수 있는 베이스캠프로 역할했다. 체화당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함께한 시간과 고민, 질문들을 정리하고 있는 우리들 역시 체화당이라는 장소에 접속해 이곳을 교실 삼아 성장한 사람들이다. 


신촌, 실험의 자리


  행정구역상 서울 서대문구에 속한 신촌은 여러 대학이 위치한 대표적인 대학촌이고, 2호선 신촌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도심 상업지역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서대문구 신촌동(창천동, 대신동, 대현동, 봉원동, 신촌동 5개의 법정동을 묶어 신촌동이라는 행정동이 되었다.)이 신촌을 의미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마포구에 위치한 노고산동 인근도 ‘신촌’의 일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이자 풍수지리가였던 하륜이 새로운 수도로 강력히 주장한 지역으로 조선 건국과 함께 주목받은 역사도 있다. 조선시대 ‘새터말’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해 ‘신촌(新村)’이라는 지명으로 굳혀졌다고 한다. 새로 생겨난 마을이라는 뜻으로 아마 전국 각지에 있는 여러 ‘신촌’들이 대부분 그러했을 것이다. 


  신촌은 그 이름처럼 새로운 문물, 문화를 받아들이는 산실 구실을 했다. 일제강점기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인 대학들, 연희전문대학(1917년), 이화여자전문학교(1935년 신촌으로 이전)이 들어서면서 서구 근대학문과 사상이 유입되는 창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신촌은 ‘대학촌’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서강대학교, 추계예술대학교, 명지대학교 등의 대학들이 인근에 자리 잡으면서 신촌은 젊은 지식인들의 세계가 되었고, ‘청년문화’라고 불리는 여러 새로운 시도들이 신촌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원두커피, 언더그라운드 음악, 패션, 록카페, 사회문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새롭고 대안적인 문화가 시도된 무대였고,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는 사회적 격동기에 신촌은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렇듯 신촌은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비전을 제시하며 과감히 그 실험에 뛰어든 경험이 있다. 적어도 대학이 더 적극적으로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에 대학촌이라는 특징이 만들어 낸 환경적인 조건 덕분일 것이다. 2018년 8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신촌을 재조명하는 ‘청년문화의 개척지, 신촌’이라는 전시회가 개최된 바 있다. 청년과 청년문화는 신촌을 한국 사회에서 문화뿐만 아니라 사회, 교육, 정치의 최전선으로서 상징성을 가진 지역으로 자리하게 했다. 체화당이 신촌에 자리 잡아 신촌이라는 지역사회에 의미를 부여해 온 맥락은 이런 이야기들로 이루어져있다. 


신촌동 2-93번지


  김혜진 첫 매니저가 그린 아래 그림을 따라 여러분을 체화당이 자리한 곳으로 안내해보겠다. 실제 체화당은 우리에게 익숙한 2호선 신촌역 인근에 위치한 상업지구로서 신촌과는 조금 떨어진 장소에 위치해있다. 이제는 ‘구 주소’라고 불리기도 하는 지번 주소로 말하자면 ‘신촌동 2-93번지’가 체화당의 주소다. 이화여대 공대 정문에서 왼쪽으로 난 골목길로 접어들자마자 만나게 되는 체화당에서는 금화터널을 오고가는 8차선 도로를 지척에 두고도 골목 밖의 차 달리는 소리가 순식간에 음소거가 되면서 신촌에도 이런 동네가 있었나 싶나 할 정도로 한적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림. 김혜진]


  금화터널로 들어가는 고가도로 맞은편에 위치한 대신동, 봉원동과 함께 체화당이 자리한 신촌동은 원래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 사택이 밀집해 있어 고즈넉하고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주택가였다. 그리고 대학 인근 마을답게 하숙촌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2000년대 들어서며 급격하게 원룸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져 지금은 ‘원룸마을’이라 불리 울 정도의 장소가 되었다. 그 중 체화당이 들어서 있는 건물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이신행 교수(2007년 은퇴)가 건축학과를 이제 막 졸업한 제자에게 의뢰하여 지어졌다. 그리고 자신의 건물 중 지상 1층과 지하 1층을 과감히 개조한 공간을 지역사회에 열었고, 체화당은 2001년 11월 공식적으로 오픈했다.  


  특히 체화당이 위치한 신촌동 2-93번지 일대는 유난히 꽃과 나무가 많다. 뒤로 무악산(안산), 앞으로는 이화여대의 단정한 교정이 에워싸면서 골목 초입의 집 마당에는 봄 마다 목련이 피었고, 5월이 되면 어김없이 피는 붉은 장미 덕분에 체화당 골목을 오고가는 주민들은 체화당 앞 테이블에서 일상 속 잠시 휴식을 갖는다. 하지만 이후 넝쿨이 너무 과하게 자란 나머지 좁은 골목에 들어오는 택배 차량과 SUV 차량의 운행에 방해 요소가 되어 봄철 체화당으로 제기되는 대표적인 민원 사항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커다란 닻이 기대어 있는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내 마음은 호수요’를 지은 시인 파초 김동명의 사택이었던 곳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본격적인 여름을 알리는 7월이 오면 담벼락에는 ‘그리움’, ‘영원한 기다림’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 능소화가 가득히 피어나면서 체화당과 잠시 경계를 허물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능소화가 피던 그 담벼락은 이화여대가 직장 어린이집을 지으며 일부 허물어져 아쉽게도 예전만큼 풍성한 능소화의 풍경을 감상할 수 없게 됐다.


  체화당이 자리한 동네는 주거지로서는 상당히 작은 규모인데, 여러 개신교 교회와 김옥균 등 조선 말 개화파 인사들의 집결지였던 태고종의 큰 사찰인 봉원사, 그리고 함석헌 선생이 가졌던 종교로 알려진 퀘이커의 서울 모임 장소가 위치해있다. 체화당 바로 뒷골목에 위치한 퀘이커 공동체는 본인들의 예배 장소를 대안대학 풀뿌리사회지기학교의 교실로 사용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고, 봉원교회와 대신교회, 봉원사는 신촌민회에 참여하거나 마을음악회에 함께 하는 등 체화당의 좋은 이웃이 되어주었다. 특히 지역사회를 건강히 만드는 것에 큰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 간 봉원교회는 체화당의 스무 해를 기억하는데 있어 빠질 수 없는 파트너였다. 봉원교회는 1970년대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한 역사가 있고, 그 정신을 민회운동으로 이어가겠다는 내용을 50주년 기념 비전 선언문에 넣은 따뜻하고 훌륭한 교회다. 


  이 밖에도 체화당 옆 골목길을 따라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보이는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박사와 독립운동가 정일형 박사의 집, 금화터널 위로 넘어가면 2005년 8월 여섯 번째 ‘체화당 어린이학교’를 통해 지역 어린이들에게 파라과이 전통문화를 전해준 파라과이 대사관저, 김자경 오페라단, 올해로 27년이나 된 그림책 서점 초방 등 의외의 장소들이 숨바꼭질 하듯 꼭꼭 숨어있다. 마을음악회가 열릴 때면 대가없이 물품이나 후원금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작은 가게들. 체화당은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사회와 꾸준히 연결되고 있었다. 위치가 늘 문제라고 지적받아왔지만 이는 전적으로 사업성의 측면에서만 본 것이었고, 어떤 것을 하고자 했는지에 따라 상당히 매력적인 자리였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우리가 해왔던 일들 중 어떤 것들은 분명 신촌역과 붙은 어느 상가 건물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수도 있고, 체화당에 축적된 분위기는 그 자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공기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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