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탓이 아닙니다
1. “다 같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라는 표현을 일상에서도 흔히 접하게 됩니다. 상담실에서 ‘자기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분들은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것이지만 뭐든지 과하니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 중에 겸손하고 친절해 보이지만 뭔가 불편한 느낌을 주는 분들이 있으신가요? 자기애는 외현적 자기애와 내현적 자기애로 나뉘며, 일반적으로 ‘자기애’라고 하면 외현적 자기애를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현적 자기애가 자신의 특별함을 과시하고 타인의 주목을 끄는 데 집중한다면, 내현적 자기애는 겉으로는 겸손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강한 우월감과 취약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내현적 자기애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2. “상처로 인한 건강하지 못한 자기애”
자기 심리학자인 코헛은 어린 시절 ‘자기애’가 채워지는 방법에 대해 칭찬을 받거나(거울 반응), 괜찮은 사람과 가까이하거나(이상화 대상)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이 채워지지 못했다면 어린 시절의 방법을 성인이 되어서도 고수하게 되는데 타인의 칭찬을 갈구하거나, 잘난 사람과 가까이 함으로써 ‘자기애’를 채우려 하게 됩니다.
대상을 늘 갈구하지만 자신이 채워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분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나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나에게 칭찬을 해줄 사람인지,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나의 ‘자기애’를 채워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관심도 단물(?)이 빠지면 언제 손절할지 모르기 때문에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렵고, 피상적으로 관계를 맺거나 파국에 이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직접적이든, 은근한 방식이든 관계를 끊게 만드는 행동을 하여 상대를 지치게 만들고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으면 상대방을 탓하며 자신은 피해자가 되어 상대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합니다.
3. “보이는 게 다가 아닌”
내현적 자기애는 겉으로는 겸손하고 내성적이며 조용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강한 우월감과 취약성이 공존하는 특성을 가집니다. 스스로를 낮추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타인의 인정과 보상을 은근히 기대하는 방식으로 자기애를 충족합니다. 또한, 타인의 평가에 극도로 민감하여 거절이나 비판에 대한 방어적인 반응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들을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고, 그들을 ‘친절하다’ 거나 ‘따뜻하다’ 등으로 단순하게만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과 깊이 관계를 맺다 보면 ‘진짜 어떤 사람이지?’하는 느낌도 들고, 공허하고 텅 빈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이는 상대가 감정적으로 교류하기보다 피상적인 관계만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4. “감추기 위한 분노”
내현적 자기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며, 이는 회피성 성격장애와 비슷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현적 자기애는 공감 능력이 부족하고, 비판이나 평가에 대해 적대적인 분노 반응을 보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분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애쓰기 때문에 다른 사람 마음에 신경 쓸 에너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공감하지 못합니다. 갈등이 있을 경우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건 이런 점에서 매우 어렵습니다. 사과를 할 수 있으려면 상대 입장을 헤아리기도 해야 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판이나 평가에 대한 분노 반응은 회피성 성격장애와 달리 매우 적대적으로 반응하게 되는데, 이분들의 분노는 분노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분노를 통해 남 탓을 해야 내 탓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크면 클수록 감추고 싶은 게 큰 것 같습니다.
5. “그것은 사랑이 아닌”
이러한 특성은 결국 인간관계를 도구적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들에게 사람은 사랑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이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보다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현적 자기애인 사람이 ‘자신의 어려움만’을 토로한다면, 당신을 통해 심리적 위안이나 관심을 얻으려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상대가 자신을 위로해 주길 바라면서도, 자신의 감정적 필요가 충족되지 않으면 상대를 비난하거나 죄책감을 주어 통제하려는 특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갈등이 생기면 자신을 희생자로 만들고, 현실을 왜곡하며 모든 문제를 상대 탓으로 돌리는 데 매우 능숙하기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이 되레 사과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합니다. 이것이 내현적 자기애에게 상처 입은 분들이 경험하는 공통점입니다. 만약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더 이상 되레 사과하지 마시지 바랍니다. 당신의 아픔은 진짜입니다. 뭔가 속상한 기분이라면 진짜로 속상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6. “가족 안에서”
내현적 자기애를 가진 부모는 자녀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순응하는 자녀에게는 애정을 쏟지만,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자녀에게는 냉담하거나 분노를 표출합니다.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자녀들은 대체로 갈등을 원하지 않는 민감하고 공감 능력이 있는 아이들입니다. 이러한 아이들은 부모에게 더 친절한 대우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아이에게 좋은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완벽해지도록 노력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형제자매가 다르게 대우받는 것을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찍 터득하게 됩니다. 이는 모든 일이 완벽해야만 한다는 압박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만듭니다. 또한 조건 없는 사랑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성인이 된 후에도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맺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건강한 사랑의 기준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7. “이 관계, 나에게 건강한가?
가까운 내현적 자기애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면, 아래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1) 그들이 친절을 나약함으로 보는가?
그들은 힘의 상하관계에 집착하기 때문에 상대의 친절함을 배려가 아닌 나약함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친절한 태도를 무시하거나 이용하려 한다면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해보셔야 합니다.
2) 그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며, 내 감정이 존중받는가?
내가 어떤 감정을 표현한다고 해서 상대가 다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다만 감정이 지속적으로 무시당하고, 함께 있을 때 묘한 불편함, 긴장감이 느껴진다면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고민해보셔야 합니다. 상대의 불합리한 행동 때문이라고 결론이 내려진다면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 분명히 경계를 설정하고,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3) 말뿐인 약속을 반복하지 않는가?
나를 위하거나 좋은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말은 하지만, 실제 행동이 그렇지 않다면 그 말이 진심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현적 자기애는 기본적으로 관계에서 노력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4) 갈등이 생기면 피하거나 화를 내지는 않는가?
피하거나 화를 내는 건 갈등에 대한 회피적인 반응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이런 반응을 보일 때 매달리거나 설명하고 반박하는 건 큰 감정 소모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상대 통제안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입니다. 상대가 지속적으로 감정을 무시하거나 불편한 긴장감을 유발한다면 명확한 경계를 설정해야 합니다.
8. “내가 있어야 할 곳인가?”
상담실에서 자기애적인 분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이 살아오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그들도 '피해자'일 수 있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다만, 살아오면서 상처가 있었다고,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당연한 명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오면서 상처가 있어도 서로 돕고, 나누면서 건강한 관계를 맺는 분들도 많습니다.
건강한 관계에서는 상대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존중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자기애적인 면이 있던, 그런 분들에게 피해를 입고 있던 당신은 건강한 관계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참고 문헌]
스테파니 몰턴 사키스(2011). 가스라이팅. 수오서재.
크레이그 맬킨(2017). 나르시시즘 다시 생각하기. 푸른숲.
브렌다 스티븐스(2023). 나르시시스트 관계수업. 유노라이프.
우도 라우흐플라이슈(2021). 가까운 사람이 자기애성 성격장애일 때. 심심.
데비 미르자(2025). 그 사람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입니다. 수오서재.
캐릴 맥브라이드(2011). 과연 제가 엄마 마음에 들 날이 올까요?. 오리진하우스.
최영민(2011). 쉽게 쓴 자기 심리학. 학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