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시
1. 요즘 가장 자주 듣는 부모님들의 걱정 중 하나는 자녀들이 ‘공부를 안 한다’입니다. 절박하고 간절한 그 마음이 때로는 안타깝기도 합니다. 물론 공부하지 않는 것이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일로 보일 수도 있어, 부모 입장에서 당연히 속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아이는 공부가 하기 싫은 걸까요, 아니면 부모가 기대하는 ‘공부’가 싫은 걸까요?
2. 얼마 전 한 식당에 갔는데, 아이가 음식을 흘리니 엄마가 “이렇게 흘리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깨끗이 먹어야지. 옷도 더러워지잖아.” 하는 걸 듣게 되었습니다. 말투는 다정하고 친절했지만, 아이의 표정은 어딘가 불안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 장면만 보고 판단하긴 어렵겠지만, 부모는 아이가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서 사람들이 자신을 ‘좋은 엄마’로 봐주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3. 공부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녀의 학업에 과도하게 집착하시는 부모님들과 얘기 나누다 보면, 아이의 성적, 대학이 곧 자신이라고 동일시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는 일이 곧, 자신이 ‘좋은 부모’ 임을 증명하는 일처럼 여겨지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자녀를 위하는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아이를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4. 주로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진 부모가 자신과 자녀를 과도하게 동일시하는데, 그들은 아이들이 무언가를 잘 해내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활기가 넘치게 됩니다. 반대로 아이들이 무언가를 잘 해내지 못하면 우울하거나 분노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아이보다는 자신의 목적이 우선되는 것은 아닌지, 자녀를 통해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가끔 공부에 흥미 없는 자녀에게 공부 얘기만 하시는 부모님들 보면, 차라리 부모님이 공부하셔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5. 사람들은 자신이 갖지 못하거나 잃어버린 것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성적이 떨어졌다고 죽는 학생, 투자한 돈을 날렸다고 죽는 사람, 실직했다고 죽는 사람, 실연당했다고 죽는 사람, 이들은 모두 잃어버린 것과 자신을 동일시했기에 삶의 의미도 함께 상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님들은 왜 자녀의 성적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될까요?
6.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성공이 중요한 이유는 실제 내 안에 그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결국 외적인 성취가 내 존재를 증명해 주는 유일한 기준이 되는 셈입니다.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타인의 평가에 나를 맞추려는 불안은 내가 타인을 계속 평가하고 있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고, 즉 내가 그것에 민감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의 조건을 가지고 계속 못났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타인도 그렇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의 평가가 두렵다는 것은 자신이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들킬까 봐 두려운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습니다.
7. 저도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주위에는 자기 삶을 살지 못하는 ‘헛똑똑이’들이 참 많습니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못하고, 남들의 인정에만 급급한 사람들 때문에 많은 일이 벌어집니다. 그들은 학벌이나 돈, 외모, 권력, 명예 등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장해 준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루어 낸들 만족하기보다 또 갖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고 불안하게 될 텐데 말입니다. 자신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더 많이 가지려 하면, 끝내 가지지 못할까 봐 또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8. 우리의 삶은 대체로 여유 있고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결핍을 채우는 방향을 택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 결핍을 채우기에 가장 그럴듯한 학벌, 직업,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진로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삶이란 만회하고 회복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나의 결핍일지도 모릅니다. 기대는 결핍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핍을 채우려 애쓰는 것도 삶이겠지만, 너무 채움에만 목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