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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 모두 안녕했으면
잡초가 피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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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Oct 1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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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 야외 테라스가 있는 집에서 살게 되면 누구나 홈 파밍을 꿈꾸게 된다. 나 또한 예외는 없었다.
정원 꾸미기에 필요한 재료들을 갖추고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
싱가포르의 예측 불가한 기후를 만나 보기 좋게 망했다. 운 좋게 싹을 틔우더라도 폭우가 한번 쏟아지면 화분의 흙이 다 파헤쳐져 빗물에 쓸려나가기 일쑤였다.
기후를 이겨보기 위해, 날이 좋은 날은 내어놓았다가
비가 오면 집안으로 들여놓기도 했다.
내
손으로 키워낸 유기농 토마토 따위를 식탁에 올리는 상상을 하며 그 수고로움을 견뎠다.
예고 없이
비가
쏟아졌던 어느 오후, 우산도 없이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왔건만 토마토와 딸기 그리고 데이지의 새싹들은 비와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그날 이후 테라스 정원에 대한 로망을 놓아버렸다.
놓음과 동시에 모든 의지는 사라졌다.
빗물에 흙이 반 정도 덜어진
빈
화분들은 그 자리에 방치되었다.
날이 좋은 날 테라스에 빨래를 널 때면 화분에 돋아난 잡초들을 목격하기도 했다.
심어놓은 것도 없을뿐더러 한바탕 비가 오면 쓸려가 버릴 잡초였기에 굳이 솎아내지 않았다.
테라스에서 무얼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적도의 태양 아래 말린 태양초 따위를 생각했다.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며 빨래나 말리던 일상이었는데,
방치된 화분에서 특별한 잡초 하나를 발견했다.
근래 내린 강한 빗줄기에도 살아남아 보랏빛 꽃망울을 터트린 저것은 필시 잡초가 아닌 꽃이다.
우연히 피어난 이름모를 꽃
요즘은
답답한 일상의 연속이다
.
회사 문제는 골치가 아프고,
이유 없는 짜증이 늘어난다.
이럴 때면 훌쩍 여행이라도 떠나곤 했는데 이 시국에는 그럴 수 없다. 21세기에 창궐한 감염병으로 인한 제약이 너무 많다.
쓸모없다고 생각한 빈 화분에도 꽃이 피어나듯,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지만
그 속에서
우연히 꽃을 피울 수도 있지
않을까?
가장 바꾸기 쉬운 것이 생각이라더니
.
..
자연이 놓아준 작은 보랏빛 선물은 답답한 일상을 여유 있는 일상으로 바꿔놓았다
.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자 집안에서 글을 쓰게 되고 그로 인해 브런치 작가라 불리기도 하니, 조금 답답하고 지겨운 일상이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이다.
화분들은 치우지 않고 둘 것이다.
언젠가 살며시 꽃을 피워줄지도
모르니까
꽃 이름을 알게 되어 추가한다.
초록 창의 꽃 이름 검색 찬스를 이용했다.
잡초가 피워낸 꽃 이름은 '여름 제비꽃'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그 사이 몇 번의 비가 지나갔지만 여름 제비는 무사히 두 번째 꽃을 피워냈다.
keyword
일상
파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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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하게 바라본 일상을 그리고 쓰는 '그리고'입니다. 저의 글이 순간이나마 공감과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다큐멘터리 작가를 꿈꾸던 공기업 대리, 싱가포르로 이주하여 집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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