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한창이던 3년 전, 친정 가까운 과천으로 이사 오면서 신랑과 다양한 산책 코스를 개발하며 다녔다. 나름 A, B, C, D, 혹은 A-1, A-2, D-1, D-2까지 재미 삼아 변주해 가며 코스를 만들어 다녔는데, 그중 한 코스가 정부청사 옆쪽으로 은행나무와 벚나무 길을 따라 언덕과 군부대를 지나 과천 야생화자연학습장 벤치에 앉아 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경로이다.
언덕길이 잠깐 경사가 있기는 해도 거리가 멀지 않아, 꽃이 피어나고 잎이 파릇파릇해지는 따뜻한 봄날이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에는 더없이 한적하고 좋은 산책길이다.
관악산에서 내려오는 물길 옆에도 미선나무가 간간이 심어져 있고, 야생화학습장에도 둥그렇게 여러 그루를 심어놓아 매년 3월 중순에서 말 경에 하얗고 소담하게 핀 미선나무 꽃을 볼 수 있다.
미선나무는 개나리처럼 잎보다 꽃을 먼저 피워 내는데 개나리보다 꽃이 작고 하얀색이며, 은은한 향이 있다.
열매가 우리 전통 부채인 ‘미선’을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미선나무는 한반도의 고유종으로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고 있어 영명도 Miseonnamu로 불린다.
미선나무의 열매는 한창 더위를 지난 9월쯤 성숙하는데, 그해 모두 떨어져 버리지 않고 다음 해까지 매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묵은 가지의 마른 열매가 새로운 가지의 꽃과 함께 그대로 달려 있어 생동하는 봄기운이 대조적으로 느껴진다.
거꾸로 된 하트모양의 묵은 열매가 달린 미선나무 꽃가지 하나를 스케치하다 보니 절로 마음이 평온해진다.
구도를 잡고 구조를 명확하게 살펴가며 하나하나 그려 나간다.
전체 가지를 눈앞에 가져다 놓고 그릴 수는 없기에, 부분 부분 다각도에서 촬영된 사진 여러 장을 참조로 하여 스케치를 하다 보니, 간혹 꽃의 크기가 크게 그려지거나 작게 그려지는 부분들이 있어, 크기를 여러 차례 조정해 가며 스케치를 완성했다.
한 가지를 그리고 나니 왠지 외로워 보이기도 하고 심심한 듯 느껴지기도 해서 무작정 한 가지를 더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묵은 열매도 더 많이 달리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가지들이 미선나무의 특징을 더 잘 보여주는 듯했다.
일은 이미 벌여놓고 나서 나중에서야 두 개의 가지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고민에 들어갔다.
두 가지를 모두 트레이싱지에 옮겨 이리저리 배치해 가며 고민해 본다.
겹쳐 볼까, 연결해 볼까, 옆으로 나란히 두어 볼까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지만, S자 형태로 위아래로 배치하는 조금 색다른 구도로 결정하게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예쁘게 물들어 가는 여름 열매 가지를 추가해서 그릴 계획이었는데 아직 관찰이 끝나지 않아 나중에 열매 관찰 후 가지를 추가해 그릴 공간이 넉넉하게 필요했고, 두 번째 이유는 가지를 겹쳐보니 꽃이 겹쳐져 더 풍성하게 보이기는 하는데 뻗어 나가는 가지의 가늘가늘한 선이 덜 부각되어 보이기도 해서 완전히 분리해 나란히 놓아주고 싶었다.
충분한 고민 없이 순식간에 결정하고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충동적이었던 듯하다. 평소의 나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듯한 특이한 구도이다.
꽃 채색에 들어가기 전 기본색의 조합과 밀도를 테스트해 본다.
특히 흰 꽃의 경우는 색조를 결정하고 채색을 진행하여야 하는데, 내가 관찰한 미선나무 꽃은 따듯한 크림색을 띠고 있고, 노란색의 꽃밥과 올리브그린과 밝은 적갈색의 꽃받침 색이 투영된 음영을 가지고 있다. (미선나무 종류에 따라 분홍빛이나 푸른빛 꽃을 가진 경우도 있다.)
총상꽃차례로 두 송이씩 마주 엇갈려 나는 특성상, 겹쳐지는 꽃잎의 앞뒤 관계와 색변화를 조심스럽게 표현해 주어야 한다. 정면으로 보이는 꽃의 색 톤과, 뒤쪽에 겹쳐진 꽃잎의 앞뒤 색을 어떻게 표현할지 미리 색을 만들어 가며 테스트해 보고 결정하였다.
채색에 들어갈 때는 언제나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고……
작은 통모양의 꽃이지만 네 갈래로 갈라진 꽃잎이 예쁜 굴곡을 가지고 있고 날아갈 듯 가볍게 바깥으로 말려 있어 하나하나 음영과 모양을 만들어 가며 채색하였다.
새로 난 줄기는 둘레가 사각 모양이고, 90도씩 엇갈리듯이 작은 가지들이 마주나 있다. 길게 자라난 가지는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사각의 결을 그대로 표현해 가며 채색하였다.
스케치 당시 참고한 사진 자료는 개나리처럼 장주화(암꽃)와 단주화(수꽃)가 섞여있었는데, 결국 위아래 두 가지 모두 암술머리가 돌출해 나온 장주화로 그려져 버렸다. 조금 더 신중했더라면 한 가지는 단주화의 특성을 드러내며 그려주었을 텐데 조금 아쉬워졌다. 외양에만 신경 쓰며 그림을 그리다 보니 식물 특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고, 아직 갈 길이 멀구나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꽃을 채색하다 보니 갈색으로 마른 열매를 어서 채색해 보고 싶어졌다.
열매의 외곽은 얇은 날개 같기도 하면서 굽이지고 휘어져 있는데, 열매의 중심부는 볼록하게 두꺼워지며 양쪽으로 두 개의 종자를 보호하고 있다. (간혹 종자의 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고 미성숙한 경우도 있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며 비와 눈을 맞고 찬바람에 말라 가면서도 가지에 단단히 매달려 있었을 열매는 시간을 버텨낸 강인함을 바스락거리며 속삭인다.
얇지만 다양한 색감과 질감을 가진 미선나무 열매의 개성과 매력을 그림에 제대로 표현해주고 싶었다.
거꾸로 된 하트모양의 미선나무 열매는 가운데 부분이 살짝 볼록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납작하고 얇은 느낌을 주도록 채색하여야 한다.
둥근 형태 때문에 잘못 음영을 주면 공처럼 둥근 열매로 보일 수 있어 주의하여야 한다.
외곽의 날개 부분은 밝은 색으로 남기고 가운데서 뻗어나가는 맥을 살려 가며 섬세한 질감에 중점을 두고 채색하였고, 종자가 들어있는 가운데 부분은 볼록하게 살짝 튀어나온 느낌을 줄 수 있도록 음영을 주어 채색하였다.
꽃과 묵은 열매 채색을 마치고 나서, 푸른 잎이 자라나고 열매가 익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노랑연두로 아기 같았던 미선 열매가 5월 말 드디어 익어 가며 진분홍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원래 계획이 초록 잎과 분홍 열매가 달린 가지를 추가해서 그리려고 공간을 비워 두었던 것인데, 막상 예쁜 가지를 스케치하고 그려 넣으려다 보니, 작고 흰 미선나무 꽃이 같은 공간에 그려질 화려한 잎과 열매 색에 압도되어 매력을 잃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워졌다.
단조로운 흰 꽃이 화려한 색조 옆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까?
차분한 노랑연둣빛 열매로 그려주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싱그러운 열매냐 화사하고 생동감 넘치는 열매냐를 두고 고민하였지만, 역시 꽃처럼 화사하고 매력적인 색깔을 가진 열매로 결정하였다.
담백하고 소박한 꽃을 피우지만 열매만큼은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 주고 싶었다.
붉게 물들어 가는 하트모양 열매를 채색하다 보니 마음마저 즐거워졌다.
미선나무가 하얗고 소담한 꽃을 소복하게 피워 냈지만, 나의 열매는 화사하고 열정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열매가 익어가는 시기의 잎도 함께 그려주어 잎의 모양과 나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표현되도록 하였다.
초록빛 잎까지 채색을 하고 나니 한결 활기가 느껴지는 그림이 된 듯했다.
아래위 두 꽃가지 사이의 우측 공간은 비워 두기에는 아쉬워서 흩날리는 꽃을 흩뿌려 채워 주었다.
실제로 미선나무 꽃은 암술머리를 포함한 씨방과 꽃받침 부분은 그대로 가지에 붙어있고 통꽃 부분만 쏙 빠지듯이 떨어져 버리는데, 그림에는 한 송이 한 송이 그대로 가지에서 분리되어 흩날리듯이 그려 주었다. 사인을 할 위치 바로 옆에도 한 송이 그려 넣고 작품을 마무리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왜 이런 구도를 잡았는지 참 즉흥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색다른 구도로 완성하는 과정이 나름 즐겁기도 했다.
작품을 그리던 시기가 바로 작년 이맘때였다.
당시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암 투병을 시작하시면서 온 가족이 힘들던 시기였는데, 퇴원 후 거동이 불편한 상태에서 건강이 늘 좋지 않던 엄마마저 쓰러지면 어쩌나 모두가 심각했었다. 일 년이 지났고 힘들어하던 항암치료도 거부하신 지금이지만, 두 분이 따로 또 같이 바쁘게 일상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음에 감사하다.
마당을 가꾸고, 꽃구경 다니며, 약속을 만들어 친척과 친구들을 만나는 하루하루의 일상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두 분이 나란히 책상에 앉아 스도쿠를 풀고 숨은 그림 찾기를 하신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마치 덤으로 얻은 시간인 것처럼 감사하게 살아가노라 이야기하신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이 다시없을 따뜻한 봄날임을 알고 향기로운 삶을 살아내는 두 분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아본다.
나의 삶도 미선나무 꽃처럼 은은하게 향기로울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최지연 作
미선나무 Miseonnamu
Abeliophyllum distichum Nakai
수채화 Watercolor on paper
364×515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