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아신스 Hyacinth

영혼이 담긴 향기

by 그린 꽃받침


춥고 긴 겨울이 지나고 이른 봄 피어나는 히아신스는 달콤하고 진한 향기로 찬란한 봄을 알리는 식물이다.


공통주제를 구근식물(알뿌리식물)로 정하고 향기로운 히아신스를 작품으로 옮기기로 마음먹은 뒤 양재동 꽃시장에서 히아신스를 종류별로 사다가 꽃 피울 날만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식물의 시간은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아 느린 것 같지만 언제나 계획적이며 꾸준하고 또 알차게 준비하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지난가을부터 추운 겨울을 지내며 꽃 피워낼 이 시간만을 위해 오랜 시간 견뎌내고 에너지를 비축해 왔을 것을 생각하면, 잠깐의 노력에 마음대로 안 된다고 어렵다고 포기해 버리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드디어 꽃봉오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잎과 함께 꽃 봉오리가 어느 정도 자라나기까지 열흘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이때부터는 빠른 속도로 꽃봉오리가 자라나 4일 만에 하나씩 꽃을 피우기 시작하더니 이후 2일 만에 모든 꽃을 활짝 피워내 진한 향기로 주위 공간을 가득 채웠다.


히아신스는 블루스타라는 이름에 걸맞게 청보라색 꽃을 눈부시게 피워내고 다시 일주일 만에 모두 사그라졌다.

초기에 꽃을 피우기 시작할 때는 깊고 푸른색이었다가 꽃이 피고 시일이 지날수록 색이 옅어지며 향도 점차 사라져 간다.


히아신스와 함께 한 동안 코끝을 간질이는 그 진한 향기에도 반했지만 꽃을 피워내기 시작한 일주일 동안 이루어낸 역동적 변화가 내 마음에 크게 다가와 그 과정을 작품에 담아보기로 하였다.

주제가 되는 식물을 이렇게 눈앞에 두고 매일매일 관찰해 가며 작품에 담기는 쉽지 않다. 물론 내가 식물을 가꾸고 키워내는데 재주가 없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주제식물은 외부의 자연 속에서 발견하고 찾게 되는 경우가 많고, 아무래도 매일매일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관찰하기에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작업실 책상 위의 히아신스는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눈앞에서 관찰해 가며 기록하고 스케치해 두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었다.

사진기록만 해도 나중에 세어보니 400여 장이 되어 깜짝 놀랐지만 꽃이 모두 사라진 뒤에 밑그림과 채색과정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만큼 중간중간 스케치를 하며 치수를 재고 구조와 비율을 확인해 두었다.


육질인 히아신스 꽃의 아래쪽은 통으로 이어져있고 꽃잎은 위에서 6갈래로 갈라지는데 바깥쪽의 3개는 안쪽의 3개에 비해 더 넓다.


향기로운 꽃은 스펀지같이 부드럽고 폭신하여 수분을 잃으면 금방 쪼그라들어 버리는데 마른 후에도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

꽃이 피어나는 여러 단계의 스케치 덕분에 보다 수월하게 어떤 모습을 작품에 담을지 결정할 수 있었다.


의도하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꽤나 정성 들여 해 두었던 스케치가 결과적으로 작품 구성의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매일매일 성장하는 꽃봉오리가 신기하기도 하고 한 송이씩 꽃망울을 터뜨릴 때마다 눈에 담고 손으로 스케치해 가며 그 형태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손에 익혀갔던 듯하다.

백합과의 구근식물인 히아신스는 흔히 수경재배를 하여 키우기도 하는데, 나는 꽃이 다 지고 난 뒤 뿌리 관찰을 위하여 물병에 담가 두었다.


좁은 화분 안에서 억지로 구부러져 있던 뿌리가 드디어 자유로워졌다.


이번에 히아신스 구근 화분을 여러 개 구입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알뿌리 덩어리의 껍질 색을 보면 어느 정도 꽃의 색을 추측할 수 있다.


블루스타는 꽃의 색이 짙은 만큼 비늘줄기의 껍질이 매력적인 갈색과 자주색에 가까운 점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꽃이 피어나는 7일 동안의 변화과정과 구근식물의 특징인 뿌리를 추가하여 구도를 결정하고 밑그림을 완성하였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 쉬운 구도의 선택이었던 듯 아쉬움도 남지만 이번 작품의 주제는 7일 동안 관찰한 히아신스 꽃의 불꽃같은 성장기록이라고 나름 생각하기로 했다.

히아신스 블루스타의 꽃은 처음엔 짙은 파란색이었다가 꽃이 피면서 점점 자주 빛을 띠고 색이 밝아진다. 따라서 울트라마린 계열의 블루와 퍼플을 조합하여 짙고 푸른 꽃의 기본색으로 사용하였다.

색을 올리는 과정은 단순하지만 전체적인 형태와 음영을 항상 유념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균형이 무너지거나 너무 과해지는 경우가 생긴다.


오히려 덜 되고 부족한 경우는 손을 더 대어 색과 대비를 강화할 수 있지만, 과한 경우엔 물로 지우고 수정하더라도 처음과 같은 섬세한 느낌을 살리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럽게 천천히 채색하는 것이 좋다.

여러 송이가 겹쳐져 덩어리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꽃대를 중심으로 달려있는 하나하나의 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스케치 단계에서부터 꽃의 구조를 반영하여 밑그림을 완성하였지만, 채색 단계에 다시 한번 하나하나 분리해 가며 진행하기란 쉽지 않은 과정이다.

색은 보통 여러 색을 겹쳐 올리는 방식으로 채색하는데, 히아신스의 잎은 밝은 올리브그린을 기본색으로 샙그린을 겹쳐 올려 형태와 깊이를 강화해 가며 채색하였다..

잎의 바깥쪽은 불룩한 굴곡을 가지며 미세하게 돌출된 잎맥과 같은 결을 가지고 있어 빛과 음영을 살려가며 색의 깊이를 추가하였다.

잎의 결 방향대로 여러 겹으로 물감을 겹쳐 올리며 색을 강화하고, 바깥쪽으로 둥그렇게 돌출된 잎의 면이 시각적으로도 돌출되어 보일 수 있도록 가로 방향의 선을 써서 음영을 한층 강화하였다.


자주색으로 물든 잎의 하단부에 마젠타와 붉은 톤의 선과 점을 추가하여 자연스러운 무늬를 만들어주었다.

불룩한 잎의 바깥 면과 달리 안쪽 면은 오목하면서도 살짝 주름진 듯 울퉁불퉁하게 파여 있는데 두꺼운 육질의 잎 내부에 물을 가지고 있는 잎맥구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안쪽 면이지만 표면이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만큼 세밀한 음영으로 질감과 빛을 표현하려 하였다.

양파껍질같이 얇은 겹으로 싸인 비늘줄기는 둥근 구형으로 기본 음영을 잡고 마젠타와 붉은 갈색계열의 점을 찍어 가볍고 얇으면서도 부서질 것 같은 마른 질감을 나타내려 하였다.


굵고 길게 뻗어 서로 얽혀있는 히아신스의 수염뿌리는 굵기도 통통하고 색도 깨끗하고 예뻐서 채색 과정이 즐거웠다.


과정은 단순하다. 앞에 보이는 뿌리와 뒤로 지나가는 뿌리가 겹쳐진 부분의 앞뒤 순서를 잘 정리해 주기만 하면 된다.

꽃이 피기 전의 봉오리는 밀도 높은 색을 가지고 있어 모노톤으로 결정하고 형태와 명암만을 고려하여 채색을 진행하였다.


옆의 활짝 피어 만개한 꽃을 더욱 부각하고 주목받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모노톤으로 채색하고 나니 한 공간에서 서로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서, 피어난 몇 송이만 색을 옅게 추가하여 작품을 마무리하였다.


이번 히아신스 작품은 왠지 모르게 그림과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기억이다.


확신 없이 시작한 그림에 속도는 더할 수 없이 더디어졌고 모노톤의 덩어리가 예상치 못한 무게감으로 전체 그림을 누르는 것만 같아 손은 그리고 있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은 진행이었다.


사는 것이 그러하듯 그림도 중간에 포기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분명한 문제의 원인을 찾았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그림이지만, 근거나 원인을 모른 채 그냥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다시 시작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나의 경우는 꾸준히 조금씩 계획했던 대로 그려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림은 완성이 되어있을 것이고, 결과가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먼 여정에 그려진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 편하게 작품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늘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은 스스로를 다독여가며 그림을 시작한 지 어느새 10년이 흘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지금의 나도 나이 80이 되어 돌이켜보면 멋모르는 애송이 시절로 기억할 날이 오겠지 생각하며 이 글을 마무리 짓는다.

최지연 作

히아신스

Hyacinth 'Blue Star'

Hyacinthus orientalis 'Blue Star'

Watercolor

297×420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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