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택식물원에 갔다가 근처 화원에서 두 종류의 으아리 화분을 사서 엄마에게 선물한 적이 있다. 엄마는 봄마다 즐거이 꽃시장 나들이에 나서, 마당에 이런저런 꽃들을 심고 가꾸셨는데, 내가 화분을 사다 드린 것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덧 거의 10년은 흐른 듯한데, 그동안 자주색 클레마티스는 사라지고, 하얀 큰꽃으아리는 건강하게 살아남아 엄마의 화단에서 예쁘게 꽃을 피워내고 있다.
매년 꽃이 피어나면 엄마는 전화로 꽃소식을 전해주셨는데, 당시에는 멀리 살 때라 자주 들르지 못했었다. 그러다 내가 잠깐이라도 들렀다가 화단을 안 보고 지나치기라도 하면, 저렇게 예쁘게 피었는데 꽃도 안 보고 간다고 아쉬워하셨었다. 다른 집 딸들과 달리 무뚝뚝한 편이라서 왔다가 금방 사라지는 딸에게 서운했던가 싶기도 한데, 그것도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 당시에는 생각도 못했었다.
2023년 올해도 다행히 예쁜 꽃을 피워냈다. 동그랗고 하얀 큰꽃으아리 꽃을 보면 환하게 웃는 엄마 얼굴이 떠오른다.
영명 Big-flower clematis, 순우리말 이름인 큰꽃으아리는 다양한 클레마티스 종류 중에서 우리나라 산야에서도 가끔 만날 수 있는 자생종이다.
덩굴식물로 이리저리 휘감고 줄기를 지탱하며 자라는 특성상 잎과 줄기가 서로 복잡하게 엉켜 있지만, 자연 속에서 보기 드물게 화사하고 큰 꽃을 보여준다.
주제로 삼고 싶은 식물을 직접 정원에서 키워가며 관찰하고 그려 나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식물을 키워내는 능력과는 거리가 멀어서 집 안에 몇 개 안 되는 화분도 오래 키우지 못하는 편이다.
작은 허브 화분을 키우는 것도 벌써 몇 번이나 실패한 나로서는, 친정 마당에서 예쁘게 피어난 큰꽃으아리 꽃과 잎, 가지를 잘라와서 스케치하고 기록해 가며 관찰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거야말로 진정 엄마찬스 아닌가?
큰꽃으아리는 단정화서로 꽃대의 끝에 꽃이 하나씩 달려 피어난다.
보송한 솜털을 가진 꽃봉오리가 벌어지며 피어난 꽃은 6~8장의 노랑연둣빛 꽃받침잎과 여러 개의 수술과 암술로 이루어지는데, 꽃잎처럼 보이는 꽃받침잎의 바깥쪽은 솜털이 남아있지만 안쪽 면에는 털이 없다.
적자색을 띤 줄기는 가늘고 길며 솜털이 많고, 마주나는 잎은 3개 또는 5개의 소엽을 가지고 있다.
작업을 위한 자료로 사진을 많이 남겨 두기는 하지만, 거리 차이에 따라 이미지가 평면화되면서 크기의 왜곡이 발생하기 때문에, 꽃의 전체 지름이나, 꽃잎, 수술, 암술의 길이나 폭 등의 세부사항은 관찰 시에 측정하며 기록하여 두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과 같이 흰 꽃의 경우 섬세한 음영과 색 변화를 기록하기엔 사진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서, 8장의 꽃받침잎이 서로 겹쳐지는 모양과 주름의 형태를 관찰하며 연필로 세부적인 스케치를 해 두었고, 덕분에 채색 단계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줄기 끝 하나의 꽃대에 한 개의 꽃이 달리는 구조로, 십자형태로 마주 보는 잎으로 연결되는 줄기의 구조가 독특하다.
곁가지로 새로 나오는 줄기도 잔털이 많고 연결 구조와 색 변화도 도드라져서 굵기와 모양을 꼼꼼히 스케치로 남겨두었다.
3장 또는 5장으로 마주나는 잎은 달걀모양으로 동그랗기도 하고 끝이 뾰족하기도 한데, 기다란 잎자루가 물체를 감아 가면서 덩굴지기 때문에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풀어서 채집하여야 했다. 거치 없이 밋밋하게 굴곡진 잎 모양도 매력 있어서 형태와 잎맥을 자세히 스케치해 두었다.
정사각 형태로 밑그림을 완성하고 채색에 들어가려니 마음이 긴장되고 떨린다.
스케치는 여러 번 지우개로 지우고 수정해 가며 시간을 들여도 언제나 즐거운 과정이지만, 채색은 왠지 시작도 쉽지 않고 실수의 두려움도 더 크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크고 흰 꽃이라 채색이 더욱 조심스러웠다.
채색에 딱히 정해놓은 순서는 없지만 좌측 상단의 먼저 핀 꽃으로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질 때가 가까워지는 이 꽃은 수술과 암술의 모양이 이제 막 피어난 우측의 꽃과 다르다. 꽃잎의 색도 어느덧 생기를 잃어가는 중이다.) 꽃 아래에 잎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외곽의 경계를 명확하게 지어 주고 꽃잎이 과하게 어두워지지 않도록 하단의 잎을 먼저 채색한 뒤 꽃 채색에 들어갔다.
보타니컬아트에서 흰 꽃은 회색으로만 표현되지 않고 파랑, 분홍, 보라, 연두, 노랑 등 다양한 색으로 변주된다.
풍경화에서 흰 구름이 마냥 하얗지 않고 빛에 따라 오렌지, 파랑, 보라, 분홍 등의 다양한 색조로 표현되는 것과 같이, 흰 꽃을 관찰할 때는 그 꽃이 지닌 특유의 흰색을 기본으로 하여, 수술이나 암술이 꽃잎에 반사되어 보이는 미세한 색이나, 하부의 꽃받침이나 꽃대가 얇은 꽃잎에 비쳐 나타나는 색, 잎사귀 그늘의 로우라이트 꽃잎의 색도 잘 관찰해 두고 작가 나름의 눈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큰꽃으아리의 하얀 꽃은 배경이 되는 종이의 흰색을 가장 밝은 부분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만큼, 흰 면을 넓게 남겨가면서 밝은 회색톤으로 스케치하듯 결 모양을 그려주었다.
그리고 크림색에 가까운 노란색과 뒷면의 녹색이 비치는 듯한 연두색을 옅게 겹쳐 올려 가며 하늘하늘하고 얇은 꽃받침잎의 색을 채색해 주었다.
뒷면의 잔털도 빼놓지 않고 꼼꼼히 그려 넣었다.
그림의 중심에는 이제 막 피어난 꽃을 화사하게 넣어 구성하였는데, 암술을 감싼 수술들이 아직 완전히 펼쳐지지 않은 상태로, 색도 노란 크림색에 가깝고 형태도 더욱 다이내믹하다.
수술의 밝은 부분을 남겨가며 꽃받침잎 쪽에서 경계를 잡아 채색하였는데, 한 번에 완성하려 하기보다 전체적으로 대략 형태를 잡고 나서 음영의 정도를 보아 가며 색과 깊이를 추가하였다.
큰꽃으아리는 흰 꽃이라 종이의 흰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면적이 넓기는 하지만, 섬세하고 얇은 꽃잎의 결과 굴곡, 중심의 음영 등 전체적으로 생기 있게 느껴지도록 다양한 색이 사용되었다.
잎은 앞뒤의 겹침에 따라 약간의 두께를 남겨 채색하고 나중에 외곽에 잔털을 추가하여 마무리하였다.
잎의 뒷면은 매력적인 회녹색으로, 굴곡에 따라 밝은 면을 남기고 돌출한 잎맥에 음영을 더하면서 채색한다. 마찬가지로 잎맥과 외곽부에 잔털을 추가하였다.
잎 하나, 꽃 하나 채색해 나가다 보니 어느새 완성이 가까웠다.
전체적으로 보면서 색조와 명암을 추가하고, 특히 흰 꽃의 외곽 부분이 잘 드러나도록 마무리하였다.
언제나 채색을 마무리하고 나면 구도상의 부족한 부분이 그제야 도드라져 보인다.
줄기와 잎자루의 연결구조가 드러나면서, 미리 알았더라면 피했을 구도상의 면 분할이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수정하기엔 이미 늦었다.
우측 하단에 5장으로 마주난 잎 구조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사인도 할 목적으로 비워두었던 공간에 떡하니 X자로 드러난 잎자루가 거슬리기도 하고 뭔가 비어 보이기도 했다.
고민 끝에, 꽃이 지고 난 뒤 가을에 접어들며 성숙한 열매 (엄밀히 말하면 중심부의 씨앗에 긴 깃털을 달아 날려 보낼 준비를 하는 암술들)을 추가하여 그리기로 결정했다.
암술의 끝부분은 구부러진 갈고리모양이 되고 암술대는 황갈색의 깃털을 촘촘히 달고 길어져서, 안쪽의 씨앗이 성숙하면 날려 보낼 준비를 한다.
전체적으로 회오리치는 공 모양이 되는데, 가을에 남아있는 열매만 보아도 으아리 종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공 모양의 가을 열매를 그림에 추가하면서 구성의 재미를 더한 것 같아 나름 만족스럽게 작품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서명을 한다는 것은 한 작품을 끝내는 일종의 마침표와 같이 느껴진다.
마무리 작업이 끝나고 나면, 마음 한구석엔 항상 부족함과 아쉬움이 남지만 스스로 완결을 결정하여야 한다.
끝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으로 나아갈 수 있듯이, 다음 시작이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할 뿐이다.
2020년 코로나가 한창이던 이때를 돌이켜보면, 그나마 작업실에 나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몇 년에 걸쳐 바이러스와 지루한 싸움이 이어질지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이제는 코로나도 어느 정도 잊은 채 매일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당시의 스케치를 뒤적이다 보니, 큰꽃으아리의 다양한 모습들을 작품에서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이 더욱 커졌다. 큰꽃으아리를 다시 한번 그리게 되면 예쁜 모습들을 더 잘 그려 주겠다 다짐해 보는데 과연 언제가 될는지……
2022년 11월부터 국립세종수목원에서 개원 2주년 기념 티켓 디자인 6종 중에 내가 그린 큰꽃으아리 작품 이미지를 적용해 사용하고 있다. 요일별로 다른 디자인으로 방문객들을 만난다고 하는데, 우리 꽃 큰꽃으아리에 더 관심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최지연 作
큰꽃으아리 Big-flower clematis
Clematis patens C.Morren & Decne.
Watercolor on paper
360×360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