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봄을 기다리며

마지막 이야기 : 무찌개와 갈비찜

by 초록바나나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냄새가 있다. 이맘때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집안 가득 퍼지던, 얼큰하고 달큰한 무찌개 냄새다.


겨울철 아버지가 가장 즐기시던 단골 메뉴는 투박하게 썰어 넣은 무와 멸치 몇 마리, 그리고 고춧가루를 팍팍 풀어 끓여낸 무찌개였다. 특별한 고기 한 점 들어가지 않아도, 겨울바람 맞으며 달큰해진 가을무는 아버지에게 그 어떤 성찬보다 귀한 대접이었다.


아버지는 뜨거운 국물을 한 술 크게 뜨시고는 "허어, 시원하다!" 하며 감탄을 뱉으셨다.


어린 마음엔 그 맵고 뜨거운 국물이 왜 시원하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채 식사를 마친 아버지의 얼굴엔 늘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만족감이 감돌았다.


그 무찌개는 가난한 가장의 고단한 하루를 버티게 해 준 위로이자 활력이었고,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를 잠시 잊게 해주는 쉼표 같았다.


이 특별한 음식과 아버지에 얽힌 나만의 이야기가 있다. 엄마도 언니도, 어쩌면 아버지도 모르는 비밀 같은 기억이다.




1. 아버지의 무찌개


열한 살 때였다. 공무원이던 아버지께서 면사무소에서 군청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언니들과 오빠는 아버지를 따라 읍내로 떠나고, 시골 고향집에는 엄마와 나, 그리고 어린 두 동생만 남았다. 우리가 시골에 남게 된 것은 순전히 농사를 포기할 수 없다는 엄마의 고집 때문이었다. 온 힘을 다 해 농사를 짓고, 그 수확물을 팔아 돈을 벌면 가축을 사들이는 것이 엄마의 최대 재테크였다. 그렇게 번 돈은 언젠가 자식들을 위해 쓰일 터였다.


언니 오빠가 모두 떠난 뒤, 엄마를 돕고 동생들을 챙기는 일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다. 나는 열 살 무렵부터 밥도 하고 빨래도 할 줄 아는 제법 철든 아이였다. 한여름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질 때면 후다닥 뛰어나가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를 거두어들이거나, 밭일하는 엄마의 잘잘한 심부름은 학교 숙제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어쩌다 제사나 아버지 생신 같은 집안일이 생기면 엄마는 읍내 아버지 집에 가서 하룻밤 주무시고 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여덟 살, 일곱 살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가슴을 콩닥거리며 집을 지켰다. 고작 열 살 남짓한 아이였을 뿐인데, 그땐 왜 그리 다 큰 언니처럼 굴었는지 모르겠다.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을 하는 엄마는 자주 아팠다. 그런데 끙끙 앓느라 잠을 설치고 나서도 어김없이 다음날이면 벌떡 일어나 밭으로 나가셨다. 그런 엄마가 늘 가엽고 안쓰러워, 불평이나 투정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날도 밤새 앓던 엄마는 아침 일찍 동네 사람들과 인근 장터로 감을 팔러 가셨다. 열 접이나 되는 많은 양이었다. 다행히 이웃집 아저씨의 경운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우리 집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심어주신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맛있기로 소문난 그 나무는 해마다 가을이면 주황빛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아 우리 가족의 살림에 보탬이 되어 주곤 했다.


기운이 없어 봉지에 담아주는 일조차 버거웠지만, 엄마는 돈을 아끼려 점심까지 굶으며 감을 팔았다. 준비해 간 감을 모두 팔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경운기에서 사고가 났다.


마침 울퉁불퉁하던 시골길에 처음으로 도로포장이 깔리던 때였다. 경운기는 말끔해진 새 도로를 덜덜거리며 빠르게 달렸다. 그런데, 기운이 빠진 엄마가 난간을 잡았던 손을 놓치는 바람에 달리던 경운기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정신을 잃은 엄마를 동네 사람들이 간신히 집까지 데려왔다.


"엄마다!"


어둑해진 저녁, 반가운 마음에 뛰어 나갔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실려 오는 엄마를 보고, 나는 그만 동생들 손을 잡은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경운기에서 떨어지며 머리를 세게 부딪힌 엄마는 한동안 어지러워 일어나지 못하셨다.


"내가 죽었으면 어쩔 뻔했니..."


엄마는 어린 우리들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나는 얼른 엄마 밥을 해 드려야겠고 생각했다. 퍼뜩 떠오른 건 칼칼하고 뜨끈한 무찌개였다. 부엌을 부산하게 헤매다 무를 도마에 올려놓고 자르려던 순간, 구세주처럼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식을 듣고 읍내에서 달려오신 것이었다.


아버지는 엄마를 살핀 후 부엌으로 오시더니, 내 손에 들려 있던 칼을 받아 무를 자르기 시작하셨다. 나는 목이 메어 말 한마디 못한 채 칼을 넘겨 드리고 부엌 귀퉁이에 쪼그려 앉았다.

"툭툭, 톡톡"

도마 위에 올려진 무가 아버지의 손 아래에서 나박하게 잘려 쌓여갔다. 도마 소리가 부엌을 채울 때마다 나는 숨을 삼켰다. 아버지의 등 뒤로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잘린 무 조각들이 한쪽으로 밀려날수록 겁에 질려 두근대던 어린 가슴에 안도감이 들어찼다.


방금 전까지 목을 조이던 불안이, 무 조각처럼 조금씩 잘려 나가는 것만 같았다. 칼이 오르내리는 리듬에 맞춰 내 심장도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


나는 여전히 쪼그린 채였지만, 더는 움츠러들지 않고 아버지의 등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묵묵한 뒷모습이, 그날의 부엌을 오래도록 지탱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오셨으니 다 되었다"

"이젠 괜찮아"


그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움찔하며 도마질을 멈추셨다. 서두르다 칼 끝에 손가락을 베신 것이다.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달려가, 얼른 옆에 있던 행주를 건넸다. 하얀 행주에 붉은 피가 물감처럼 번졌지만, 아버지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멋쩍게 웃으셨다. 나도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 상처쯤은 끄떡없는 아버지가 곁에 계시니, 정말로 두려울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남은 무를 마저 썰어 커다란 냄비에 소복하게 담았다. 거기에 멸치 한 움큼과 고춧가루를 서너 숟가락 넣고 곤로 심지에 불을 붙였다. 큼직하게 썰어 넣은 무가 투명하게 익어가며 내뿜던 달큰하고도 칼칼한 공기는 두툼한 외투처럼 우리를 감쌌다. 그때 아버지가 끓여내던 무찌개 속에는 끼니를 넘어선 가장의 고단한 하루와 가족을 향한 책임감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차린 것이라고는 아버지가 거칠게 끓인 무찌개가 전부였지만, 그날의 맛은 평생 아버지의 얼굴과 함께 나를 따라다녔다. 어린 딸의 불안을 도마 소리와 무찌개 한 냄비로 잠재워 주던 아버지의 등은, 지금까지도 나의 안전을 지켜주는 묵직한 뒷모습으로 남아 있다.


겨울철만 되면 나는 그날을 떠올리며 부엌으로 간다. 토실한 무를 도마에 올리고, 아버지를 생각하며 무찌개를 끓인다.


2. 나의 갈비찜


하지만 세월과 함께 찾아온 병마는 아버지에게서 그 소박한 '맛의 즐거움'을 가장 먼저 앗아갔다. 신장투석으로 수분 섭취가 제한되며 국물 요리를 마음껏 드시지 못하게 됐고, 이어진 위암 치료로 매운 음식마저 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항암 치료와 투병 생활이 길어지면서 아버지는 입맛을 잃어가셨다.


어렸을 적, 우리들이 밥투정을 할 때면 아버지는 늘 장난스럽게 말씀하셨다.

"입맛이 없으면 밥맛으로 먹어야지"


늘 식성 좋고, 무던하시던 아버지께서 "무얼 먹어도 모래알을 씹는 것 같다"고 하시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얼마전, 아버지의 입맛을 조금이라도 되살려 드리려고 냉장고를 뒤지다가, 한쪽에 넣어 두었던 갈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게 좋겠다!"

아버지께서 한 입이라도 제대로 드셔 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갈비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찬물에 담가 핏물을 빼고, 여러 번 물을 갈아주며 정성을 들였다. 끓는 물에 부르르 데쳐 표면의 불순물을 걷어내고, 다시 찬물에 헹군 뒤, 하나하나 기름기를 제거했다. 아버지가 씹기 편하시도록 뼈와 살 사이에 조심스레 칼집을 넣었다.


싱크대 아래 깊숙이 넣어 두었던 착즙기를 꺼내 배와 양파, 무 한토막을 넣었다. 찜갈비는 양념 건더기 없이 맑은 즙을 사용해야 깔끔한 맛이 난다. 설탕 대신 배와 양파를 넉넉히 써, 달큰한 육즙이 배어 나오도록 했다.


배와 양파에서 나온 맑은 즙에 간장과 다진 파, 마늘을 넣어 양념을 완성하고, 갈비 위에 고루 부어두었다. 양념이 갈비 사이사이로 스며들자, 고기는 금세 짙은 색을 띠었다. 물을 조금 더하고 불을 올리니, 냄비 속에서는 잔잔한 끓는 소리가 났다.


시간이 흐르며 국물은 점점 걸쭉해졌고, 고기는 뼈가 저절로 빠질 만큼 부드럽게 익어 갔다. 마지막으로 먹기 좋게 다듬은 무와 당근, 표고버섯을 넣어 숨을 죽이듯 함께 익혔다. 무는 국물을 머금어 투명해졌고, 갈비에는 윤기가 돌았다.


불을 끄고 뚜껑을 열자,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부엌 밖까지 펴져 나갔다. 갈비찜은 그렇게, 시간을 들여 천천히 완성되었다.

'한 입이라도 제대로 드셔주시면 좋으련만' 하는 간절한 기도가 그릇마다 가득 담겼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그날, 갈비찜을 아주 맛있게 드셔 주셨다.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여러 번 나누어 드셨다는 엄마의 후기를 들으며, 나는 다시 그 옛날 아버지가 끓여 주셨던 무찌개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전해 주셨던 그 묵직한 위로의 맛에 이 갈비찜이 보답이 되었을까'

뭉클한 무언가가 겨울바람을 타고 마음속으로 날아들었다.


3. 아버지의 봄을 기다리며


작은 병실 한 칸,

조그만 침대 두 개,

벽면에 걸린 엄마의 그림 몇 점,

상두대 위의 수저 한 벌...


두 분에게 남은 조촐한 살림살이를 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눈물이 난다. 그렇게라도 함께, 더 오래 아버지가 곁에 계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하루하루 절실한 욕심이 되어 간다.


어린 딸의 불안을 도마 소리로 잠재워주던 아버지의 든든한 등은 이제 야위어 병상에 기대어 있다. 하지만, 그분이 가르쳐준 '사랑의 맛'은 흔들림 없이 나를 붙든다.


엄마가 병실 벽에 피워낸 그림 꽃과 내가 지어 올린 따뜻한 갈비찜 한 그릇이 어우러져, 삭막한 병원 공기에 사랑을 더한다.


비록 예전처럼 얼큰한 무찌개를 함께 나누지는 못해도, 아버지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온기를 여전히 간직하고 계신다. 40여 년 전 그날처럼, 아버지는 지금도 우리 가족의 부엌을, 그리고 삶을 묵묵히 지탱해 주신다.


올겨울, 아버지가 머무는 그 작은 병실 창가에 가족들이 전해 주는 사랑의 빛이 포근히 머물기를 소망한다. 그 빛이 우리 아버지의 겨울을, 그리고 엄마의 헌신을 온토록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돌아보니, 아버지의 시간은 절망 속에 멈춘 것이 아니라, 생명의 숨을 품고 봄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대지 아래서도 이름 모를 풀꽃들이 소리 없이 싹을 틔울 준비를 하듯, 아버지의 야윈 육신 안에서도 다시 일어서려는 생의 의지가 조용히 맥동하고 있음을 본다. 엄마가 병실 벽에 붙여둔 꽃그림들은 결코 시들지 않는 희망을 노래하고, 내가 정성껏 고아낸 갈비찜은 아버지의 몸속에 따스한 봄기운을 불어넣는다.


그 생명의 온기를 길어 올려, 마음속으로 아버지께 속삭인다.


"그러니 아버지, 오늘도 우리 곁에 그 봄을 놓아주세요.


거창한 기적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일 아침 창가에 머물 햇살 한 줌을 반기시고, 우리가 건네는 따뜻한 밥 한 술에 미소 지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버지가 묵묵히 견뎌내고 계신 이 겨울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서로를 더 깊이 사랑하며 단단해지는 계절임을 믿습니다."


곧 차가운 바람이 잦아들고 아파트 베란다에 엄마의 꽃들이 기지개를 켤 것이다. 그때, 아버지의 발걸음에도 봄꽃 같은 생기가 돋아나기를 소망한다. 고단한 삶의 고비마다 무찌개 한 그릇으로 가족을 지켜주셨던 당신의 그 강인한 등이, 이제는 우리의 사랑을 받으며 평온한 봄의 언덕에 머물기를 기도한다. 아버지의 투병은 끝이 아니라, 가장 눈부신 순간을 맞이하기 위한 숭고한 기다림이다.


병마와 싸우는 이 긴 겨울의 끝에서, 우리는 알게 되리라.

아버지의 봄은 사랑이 머무는 모든 순간마다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연재를 마치며]

다시,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나니, 산책길에 마주쳤던 눈부신 가을 햇살이 떠오릅니다. 푸른 호수 위에서 잘게 부서지며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던 그 빛 말입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투병을 통해 제게 커다란 인생의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삶은 끝까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내어주고 순응하는 과정이라는 것을요. 휠체어에서 일어나 흔들리는 걸음으로 팔각정을 도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은, 세상 그 어떤 위인의 걸음보다 당당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나의 엄마, 해춘(海春) 씨.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시작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다 같은 깊음으로 아버지를 품고, 병실 한 칸에 기어이 봄꽃을 피워낸 당신의 살림이 곧 저의 문장이 되었습니다. 60년 세월을 변함없이 지켜온 그 숭고한 모성이, 언제나 우리 가족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이야기를 통해, 사랑으로 흘린 '눈물'이 어떻게 꽃이 되는지, 그리고 그 꽃을 피워내기 위해 평범한 '음식'이 어떻게 따뜻한 흙과 같은 사랑이 되어주는지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중환자실의 긴 밤을 지나, 아버지가 제가 만든 갈비찜을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그 작은 안도감. 그 찰나의 순간만으로도 충분히 선물이 되는 나날이었습니다.


다행히 아버지는 이제 휠체어 없이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하셨고, 암으로 인한 통증도 아직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평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으나, 아버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온기를 나누는 이 시간들이 제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선물입니다.


글을 쓰는 내내 참 많이 울었고, 또 참 많이 웃었습니다. 슬픔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기쁨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맛이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끓여주시던 무찌개처럼 칼칼하면서도 달큰한, 인생의 진짜 맛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산산조각 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서진 자리마다 사랑이 깃들 것이며, 조각난 날들 사이로 더 밝은 빛이 스며들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록 육신은 야위어가도 아버지의 영혼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봄을 꿈꾸고 계십니다.


이 기록이 세상 끝날까지 '엄마'이고 싶어 하는 모든 해춘 씨들에게, 그리고 아버지의 뒷모습을 닮아가려 애쓰는 모든 자식들에게 작은 위로의 꽃씨가 되길 바랍니다.


긴 겨울의 한복판에서도 기어이 봄을 길어 올리는 모든 가족의 동행을 응원하며,

따뜻한 무찌개 한 그릇의 온기를 담아 글을 마칩니다.


덕분에, 제게도 참 좋은 한 해였습니다.


-2025년 12월 30일, 겨울 창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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