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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함께, 기꺼이 행복하기로 선택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함박꽃처럼... 평강을 주시리라.

by 초록바나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치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기를 원하노라"



1. 암과의 동행

아버지의 생신은 음력 7월 3일로, 언제나 여름 한가운데에 걸려있었다. 그래서 그 즈음이면 생신을 핑계 삼아 여름휴가를 겸해 가족들이 모이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6월에 윤달이 끼면서 생신이 8월 끝자락으로 밀려났다.

그 일이 오히려 다행이란 마음이 들었다. 중환자실에서의 사투 이후 아버지가 회복할 시간을 더 벌 수 있었고, 숨 막히는 무더위를 조금이나마 비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더는 옛 추억 같은 ‘온전한 여름휴가’를 누리기 어려워진 지금, 그저 소박한 만남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감사함이 마음 깊이 자리 잡았다.


중환자실에서 요양병원으로 급히 전원한 후에도 아버지의 섬망은 여러 날 수그러들지 않았다.

현실과 환영 사이를 헤매시던 아버지는 특히 중환자실에서 겪었던 끔찍한 환각에 사로잡혀 계셨다.


" 영선이와 영규가 왔다 갔어. 내가 이렇게 묶여서 풀어달라고 그토록 사정을 했는데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고 야멸차게 그냥 갔지 뭐냐?"


아버지는 실제로 오지도 않았던 손주들(영선, 영규)이 자신을 외면했다고 굳게 믿으며 노여워하셨다. 손발이 결박당했던 고통스러운 기억은 환각과 뒤섞여 현실이 되었다. 아버지는 괘씸하다며 그 아이들은 이제 손주로 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가족들이 아무리 설명하고 달래도 믿지 않으셨고, 잠시 수긍하다가 금세 잊고 다시 격분하셨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벌컥벌컥 화를 내셨다. 입원했던 병원 원장에게 당장 따지러 가겠다고 고집하실 때면, 옆에 계시던 엄마는 속수무책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천정에 둥둥 아버지 이름이 떠다닌다"며 괴로워하시기도 했다. 아무래도 치매가 시작된 것 같다며 엄마는 절망하셨다. 육체적 고통에 더해 정신적 혼란까지 겪는 아버지를 지켜보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힘을 잃어 휘청거리는 아버지의 다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꼿꼿하시던 모습이 선명했기에, 자식인 우리조차 이 급격한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혼자 화장실에 가시겠다며 우기시다 여러 번 넘어지기도 하셨다. 다행히 낙상으로 인한 뇌출혈이 점차 진정되고 있다는 소식은 작은 안도감을 주었다.


그사이 3차 항암 예약일이 다가왔다. 중환자실 입원과 섬망을 겪은 뒤라, 자녀들은 항암 치료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던 아버지는 항암 예약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계셨다. 쉽게 포기하지 못하시는 모습이 마치 항암을 생명의 동아줄처럼 붙들고 계신 듯했다. 한편으로는 판단력이 흐려지고, 우려하던 인지기능 저하가 시작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밀려왔다. 그만큼 아버지의 불안한 모습은 평소와 크게 달라 보였다.


가족들은 깊은 상의 끝에 항암 치료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중환자실 입원으로 이미 급격히 소진된 체력에 독한 항암제를 더하는 것은 무리였다.


"더는 욕심내지 말고 그만합시다. 알 수 없는 인생, 하나님께 맡깁시다" 엄마의 간곡한 설득과, "지금 컨디션으로는 무리"라는 주치의 선생님의 객관적인 의견을 들으신 후에야 아버지는 힘겹게 마음을 접으셨다.


우리는 이제 암을 억지로 제거하려 들기보다, 아버지의 남은 시간을 지키며 암과 진정한 동행을 하기로 했다. 모든 것을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께 맡기기로 한 것이다.


2. 축하와 축복의 날

8월 끝자락으로 밀려난 아버지의 생신이 다가왔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생신이었다. 아버지의 소중한 시간을 생각하며 이 날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병원에 외출 허락을 받고 가족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기로 했다.


자식들의 부축을 받고 어렵게 도착한 곳은 아버지가 평소 자주 다니시던 단골 오리백숙집이었다.

큼직한 뚝배기 속 오리백숙은 푹 고아져 맑고 뽀얀 국물을 뿜어냈다. 그 위엔 싱싱한 초록 부추가 듬뿍 얹어져 있었다. 녹두가 진하게 풀어져 걸쭉한 국물은 고소한 약재 향과 함께 지친 몸을 먼저 위로했다. 젓가락만 대도 부드럽게 찢어지는 살과, 속이 편안해지는 뭉근한 녹두 죽을 함께 나누며, 아버지의 기력 회복을 간절히 기원했다.


식사 후, 아버지 댁에 모두 모여 가족 예배를 드렸다. 이번에도 스무 명이 훌쩍 넘는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두 모였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거실 바닥과 소파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모습은 따뜻하고 든든한 울타리 같았다.


예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고 잔잔한 감동이 흘렀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합창으로 울려 퍼진 찬송가는 어느 성가대의 찬양에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만큼 우렁찼고, 은혜로 충만했다.


오빠는 "히스기야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히스기야는 매우 훌륭한 왕이었다. "그의 전후 여러 유다 왕 중에 그와 같은 자가 없었다'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도 질병과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렸다는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벽을 향해 통곡하며 기도했다.
"여호와여, 내가 주 앞에서 성실히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눈물과 기도를 들으시고 생명을 십오 년 연장해 주는 기적을 베푸셨다.


죽을병에 걸렸다가 간절한 기도로 생명을 연장받은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는 투병 중인 아버지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오빠는 이 말씀을 통해 아버지의 삶도, 지금 이 순간의 간절함도,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과 위로를 전했다.




아버지의 인생이 신앙과 함께 한 여정이었음을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섯살, 어린 나이에 땅의 아버지를 잃고, 하늘 아버지에게 기대 살아온 상흔이 삶 곳곳에 배어있다. 암 진단 후 잦아진 병원진료를 동행하며 감사했던 한 가지는 그 삶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을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병원 가는 길에 아버지께 여쭈었다.

"어떻게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되셨어요? 어려서부터 다니신 거예요?"

오랜 세월을 함께했지만, 자식인 내가 이제야 이런 질문을 한다는 사실이 더 신기했다.


"어, 그게 말이다. 어려서는 아니고 한 스무 살 됐을 즈음이야. 들판에서 벼를 베던 가을 무렵이었어. 동네 친구 두어 명과 일을 하다가 옆동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는 전단지를 보게 됐단다."


아버지는 그 전단지를 보고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고 하셨다. 동네 친구들을 설득해 가보기로 했고, 그렇게 내디딘 걸음이 시작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이 스토리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쩌면 아버지를 선택한 하나님이 아니었을까?

까마득한 옛날,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예정된 그분의 계획이었음에 틀림없어.

우연히 발견됐던 부흥회 전단지는 하나님이 날려 보낸 초대장이었을지도 몰라'


아버지는 교회에 나간 지 1년 만에 청년회 회장이 되실 정도로 열심이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의 반려자인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엄마는 교회가 있던 큰 동네 출신에, 제법 넉넉한 집안의 막내딸이었다.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 형편과는 많은 차이가 났다. 외할아버지께선 식음을 전폐하고 반대하셨다. 결국 딸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허락은 하셨지만, 결혼식엔 참석을 안 하셨다고 한다. 결혼식을 앞두고 큰외삼촌께서 혼수로 장만한 장롱을 지게에 지고 아버지 집으로 가셨다. 그런데 작은 오두막집 문에 장롱이 들어가지 않자, 홧김에 마당에 던져 부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웃픈 이야기는 어린 내게도 외할아버지의 심정을 절절히 이해하게 만들었다.


1964년 5월 15일, 극심한 반대를 딛고 두 분은 마침내 부부가 되었다. 소담한 함박꽃이 담장을 덮고, 찔레꽃 향기가 그윽하게 퍼지던 화창한 봄날이었다.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 뒤, 두 분은 아버지가 살던 오두막에서 신혼을 맞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를 드렸다.

"작은 움막이지만, 이곳이 복된 곳이 되게 해 주세요. 열심히 살도록 도와주세요"

엄마가 드렸다는 그 짧은 기도는 생각할수록 애틋하고 뭉클하다.


스물두 살,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했던 동갑내기 부부의 새 출발은 가난했다. 그러나 초라하지는 않았다. 두 분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순수한 믿음과 사랑이 삶의 기둥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파도 속에서 더러 멈춤과 시작이 반복되기도 했지만, 두 분에게 신앙은 언제나 그 모든 것을 앞서는 삶의 가치였다.

자식들 곁으로 이사하기를 주저하셨던 이유 역시 너무나 분명했다. 평생을 봉사와 헌신으로 섬겨 온 교회를 떠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고 자란 우리에겐, 아버지의 인생이 히스기야 왕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오빠의 말씀 후에 막내동생의 기도가 이어졌다. 동생은 눈물 대신 담담한 목소리로 준비해 온 기도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 기도문 속에는 암과 힘겹게 동행하기로 결단한 가족의 마음과, 아버지의 평안을 바라는 간절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기를 원하노라"
말씀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동생은, 어느 해보다 무더운 여름을 보냈음에도 온 가족을 지켜주셔서, 아버지의 여든세 번째 생신에 모두 모일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지금 함께 얼굴을 대하고, 음식을 나누며 웃는 이 시간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해 주심에 감사했다.


동생은 간절히 빌었다.

앞으로 다가올 많은 날들도 아버지를 지금까지 지켜주신 것처럼 보호하시고, 건강을 더욱 회복시키시며 마음에 평안을 주옵소서.

아버지의 삶이 머무는 자리마다 복이 넘치고, 만나는 이들이 아버지를 통해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시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 주신 아버지를 주신 것 또한 감사드리며, 저희의 삶도 아버지를 닮아가게 하옵소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든 가족에게 주님의 사랑을 부어주시고, 어떤 순간에도 감사와 찬양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평생을 지탱시켰던 신앙, 그 믿음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신비와 보이지 않는 소망이 여전히 아버지와 가족들을 이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3. 여전히 빛나는 순간들

예배가 모두 끝나고 신나는 생신 파티가 시작되었다. 화려한 케이크에 촛불이 켜지고 축하 노래가 시작되었다.

"생신 축하합니다. 생신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 생신 축하합니다"

손주들의 노래에 맞춰 경쾌하게 손뼉을 마주쳤다. 큰손녀인 조카의 네 살, 두 살 아기들이 뒤뚱뒤뚱 엉덩이 춤을 추는 바람에 분위기는 한층 달아올랐다.


드디어 촛불을 꺼야 하는 순간, 왕할아버지의 생일 케이크 촛불을 어린 아기들이 앞다투어 얼른 끄는 바람에 모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한 웃음소리에 눈물도, 아픔도, 시름도 멀리멀리 날아갔다.


부축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는 몸이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손주들에게 용돈을 나눠주셨다. 다리는 휘청거렸지만 손에 들려진 봉투 속에는 빼앗기지 않는 기쁨과 넉넉함이 흘러넘쳤다.


용돈을 나눠주고 힘겹게 소파로 돌아와 앉으신 아버지께서 말씀을 이어가기 시작하셨다.


"예기치 않게 병을 얻어 식구들에게 미안하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너희들 보니 기운이 나는구나. 얼른 힘 얻어서 앞으로도 생일, 몇 번은 더 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걱정들 말아라"


아버지의 음성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여기저기서 아버지를 연호하는 함성과 함께 힘찬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 아버지, 살아보니... 예수님 잘 믿는 것 외로는 보람된 일이 없더구나. 너희들도 예수님 잘 믿으며 열심히 살아가길 아버지가 늘 기도한단다."


"나도 힘을 내서 열심히, 즐겁게 살아보련다... 다들 너무 고맙다"


삶을 내려놓는 대신, 신앙을 붙잡고 끝까지 한 걸음을 더 나아가겠다는 아버지의 다짐, 그 말속에는 무너지지 않는 생의 의지와 가족을 향한 사랑이 들어있었다.


자식들도 아버지와 어머니께 축하 용돈과 선물을 정성껏 준비했다. 아버지는 막내가 사 온 분홍빛 셔츠를 특히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입어 보시고는 화사하게 웃으셨다.


"어떠냐? 좋지? 병원에 갈 때 이 옷 입고 가야겠다. 허허허”


함께 웃는 가족들 사이로 삶의 애환은 잠시 길을 잃었다.

그해 5월, 교회 앞마당에 다정히 손을 잡고 선 젊은 부부를 축하하던 찔레꽃 향기처럼, 담장을 덮었던 함박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웃음을 타고 소망이 꽃피고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기꺼이 행복하기로 선택했다.

오래전 하나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해 첫걸음을 내디뎠던 아버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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