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망, 그 혼란의 밤에 찾아온 잊혀진 '첫 출근'
우연히 찾아왔던 봄의 기적은 길지 않았다. 혹독한 여름의 폭풍이 예상치 못한 경로로 우리를 덮쳤다.
7월 새벽, 거실에 쓰러진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실려 가셨고, 섬망 속에서 1968년 스물여섯 청년 면서기의 '첫 출근' 환각을 보고 계셨다.
삶의 고통 속에서 아버지가 붙잡으려 했던 가장 빛나던 순간은 무엇이었을까.
우연히 찾아온 봄의 선물, 그 기쁨은 길지 않았다. 희망과 소망의 경계에서 겨우 걸음을 떼려던 찰나, 투병의 현실은 예상보다 훨씬 혹독했다. 한 여름의 폭풍처럼 예상치 못한 경로로 우리를 거세게 덮쳐왔다.
6월 24일, 아버지와 함께 종양내과 진료를 위해 병원을 찾았다. 큰 통증이나 불편감 없이 아버지의 컨디션은 좋은 편이었다. 아버지께선 수술이 잘된 줄로만 아시고, 조심스러웠지만 항암에 대한 기대를 내보이셨다. 진료실에 들어서기 전까지 긴장감 속에서도 잔잔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담당 의사는 오랫동안 아버지 차트를 들여다보았다. 그 짧지 않은 침묵은 무겁고 불편했다.
"투석을 하시네요... 하루에 만 보 이상 걸으신다니 대단하십니다. "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던 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런데..., 수술하실 때 암을 제대로 제거를 못하셨군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아버지께서는 흠칫 놀라셨지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사실, 이런 경우엔 항암을 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환자분 연세와 당뇨, 신장 투석을 고려하면 항암을 권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심장 혈관도 안 좋으시구요."
"체력이나 컨디션은 생각보다 좋으신데... 환자분은 어떻게 하시고 싶으세요?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많이 힘드실 거예요."
의사는 아버지를 향해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수술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 말씀 안 하시던 아버지께서 입을 여셨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항암을 안 하면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아버지께서 대답 대신 몇 가지 질문을 하셨지만, 의사로서도 답을 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암세포가 어느 방향으로 자랄지, 얼마나 빨리 커질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다만 아버지의 공허한 질문 속에서 살고 싶은 간절함을 느낄 뿐이었다.
선뜻 권하지 못하던 의사는 고심 끝에 용량을 줄여 항암 치료를 시도해 보자는 의견을 냈다. 아버지의 체력이 예상보다 좋고, 종양의 상태 역시 항암을 잘 견디면 예후가 나쁘지 않을 거라는 이유였다.
부작용이 두렵긴 했지만, 한 번 부딪혀 보자고 나도 거들었다. 항암의 과정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늘 괜찮다고 하시는 아버지의 긍정을 그 순간만은 더욱 처절하게 의지하고 싶었다.
'우리 아버지가 이대로 무너질 리 없어. 아버지는 분명 이겨내실 거야' 그렇게 믿고 싶었다.
진료실을 나와 담당 간호사에게 이후 일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그녀는 괜찮으시겠냐고 여러 번 되물으며 근심 어린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말리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께서 천천히 말씀을 꺼내셨다.
"수술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더구나... 항암을 하기로 한 것이 잘 한 결정인지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편히 지내다 가면 되는데, 괜히 한다고 했나 싶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단어들을 조합하다가 그만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났다. 최선을 다 했으며, 아예 제거를 못한 건 아니라고 옹색하게 둘러댔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말을 다 믿지는 않으시는 듯했다.
"아버지는 다 괜찮은데, 혹시라도 나중에 너희들에게 이런 나쁜 병이 옮아갈까 걱정이다."
더 살고 싶은 간절함 속에서도 자식들을 향한 무한 책임감을 놓지 않는 아버지의 흔들리는 목소리가 마음을 두드렸다.
'가여운 우리 아버지, 고마운 우리 아버지. 괜찮다고 하시지만 실은 괜찮지 않은 우리 아버지.'
7월에 들어서며 항암 치료를 위한 준비도 함께 시작되었다. CT 촬영을 시작으로, 각종 검사 및 진료가 이어졌다.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늘 예상보다 길고 복잡했다. 아버지는 자주 휘청거리며 식은땀을 흘리셨다. 이런 저혈당 증상에 대비해 사탕이나 두유 같은 간식거리가 항상 필요했다.
가장 고비는 8일에 진행된 케모포트 시술이었다. 케모포트는 항암제를 넣기 위해 몸속에 마련한 작은 통로다. 팔의 가느다란 혈관은 반복되는 항암제 주입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보다 굵고 안전한 중심정맥으로 바로 연결되는 길을 피부 아래에 만들어 두는 것이다. 매번 혈관을 찾지 않아도 되고, 아프고 지친 몸을 조금이라도 덜 괴롭히기 위한 장치다. 혈관투석으로 이미 팔의 혈관이 많이 상한 아버지에게, 케모포트는 선택이 아니라 필요였고 생존이었다.
시술 부위는 며칠 동안 욱신거렸고, 심한 몸살을 앓듯 열이 오르내렸다. 그 와중에도 투석을 멈출 수 없었기에 아버지의 일상은 병원과 함께였다.
7월 11일인 그 주 금요일, 드디어 1차 항암이 시작되었다.
인근 병원에서 오전 7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 혈액 투석을 하고, 오후 1시 30분까지 항암 병동에 도착해야 했다. 6시까지 항암 주사를 맞다가 일부 주사제를 몸에 단채 요양병원으로 이동하는 강행군이었다.
투석 동행과 대학 병원 이동은 작은언니와 막내동생이, 항암 병동에서 아버지를 돌보는 일은 큰언니가 하기로 했다. 나는 항암이 모두 끝나면 요양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일을 맡았다. 그럼 오빠가 기다렸다가 입원 수속을 하기로 했다. 하루 전체가 마치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 같았다.
몹시 긴장을 한 탓인지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 잘 견뎌주실지.... ' 수술 대기실 앞에 앉아있던 순간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아버지는 계획했던 일정을 잘 소화하셨고, 1차 항암을 무사히 견뎌냈다. 생각보다 괜찮다고 스스로도 안도하셨다. 요양병원에서 나머지 항암제를 마저 투여하고 며칠 관찰한 후 퇴원하셨다. 약간 어지러움은 느끼셨지만 구토나 식욕저하 없이 일상을 잘 유지하셨다. 자식들의 만류로 교회를 한 주 쉰 정도가 전부였다.
그 와중에 가장 지친 사람은 엄마였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빡빡한 진료 일정과 복잡한 식이요법을 챙기느라 엄마의 피로도는 한없이 높아지고 있었다. 딸들이 그런 엄마를 챙기며 아버지의 식사를 돕고 있었지만, 모든 걸 대신할 순 없었다.
2주 뒤인 7월 25일 2차 항암이 곧바로 이어졌다. 1차 항암 후 자신감을 얻은 아버지의 투지는 대단했다. 이번에는 요양병원 대신 집으로 바로 돌아가 항암을 마무리했다. 가족 모두 아버지가 잘 견디고 계시다는 사실만으로 큰 위안을 얻었고, 감사했다.
그때까지는 미처 몰랐다. 아버지의 몸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우연히 찾아왔던 봄의 선물 대신, 한여름의 거센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 쿵!!!"
7월 30일 수요일 새벽 2시 40분, 안방에서 주무시던 엄마는 "쿵" 소리에 놀라 깼다. 옆에서 주무셔야 할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다급하게 거실로 뛰어가신 엄마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화장실에 가시려다 머리를 벽에 세게 부딪히며 쓰러지고 말았다.
119를 타고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신 아버지는 곧바로 중환자실로 들어가셨다.
검사 결과는 처참했다. 낙상으로 인한 경막하출혈이 발생했고, 혈당과 혈압, 요산수치가 모두 위험 수치로 치솟아 있었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몸의 모든 기능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불안정했다. 의료진이 숫자 하나하나를 붙잡으려 분투하는 동안 모니터는 쉼 없이 번쩍이며 경고음을 냈다.
'죽음이 목전에 왔음을 느끼며 얼마나 무서웠을까.'
가족은 들어갈 수 없는 그 삭막한 공간에서 아버지가 홀로 느꼈을 공포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피가 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모니터가 울릴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두려움. 근육을 움츠러들게 하는 온몸의 통증들. '집에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애달픔.
흰 가운을 입은 낯선 이들 틈에서 외롭게 버티던 아버지의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그 고통의 새벽과 함께 아버지에게 정신적인 혼란이 찾아왔다. 섬망 증세가 급격히 나타나며 현실과 환각을 오가기 시작하셨다.
하루에 한 번 허락된 중환자실 면회 시간, 아버지의 얼굴은 사납게 부어있었다. 가장 먼저 들어간 엄마를 보자 버럭 화를 내셨다.
"왜 이제 와! 밤새 불렀잖아"
아버지는 지금 첫 출근을 준비하는 새내기 면서기로 돌아가 계셨다. 잔뜩 긴장한 채, 가지고 갈 가방을 찾고 계셨다.
아버지께선 1968년, 26세의 젊은 나이에 고향 동네의 이장이 되었다. 성실하고 똑똑했던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청년 이장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크고 작은 민원을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해결사이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갓 태어난 아기의 출생신고나 혼인신고, 사망신고를 비롯해 전토 매매 같은 크고 작은 거래에서도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했다.
동네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미하엘 엔데의 『모모』 를 떠올리게 했다. 문제가 생기면 “모모에게 가봐”라고 말하듯, 우리 동네에서는 자연스레 “청년 이장에게 물어봐”라는 인사가 오갔다. 아버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막혔던 일들이 신기하게도 술술 풀렸다..
세월이 좀 흘러 읍내로 이사한 뒤에도, 시골 동네 이웃들은 어려운 일을 만나면 거리낌 없이 아버지를 찾아오곤 했다. 중학교 졸업이 전부였고 면서기에 불과했지만, 아버지는 고향 마을이 낳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둔 운 좋은 아이들로 통했다. 아버지께선 그렇게 마을의 이장을 시작으로 면서기를 거쳐 군청에서 퇴임할 때까지 30여 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셨다.
혼란의 밤은 길었다.
"당신은 뭐 하고 있었어. 지금 출근해야 하는데... 얼른 가방 챙겨줘야지"
"어딜 가려고 그러는데요?"
"어디긴 어디야. 양화 면사무소지. 첫 출근에 늦으면 어떻게 되겠어. 다들 기다리고 있는 거 안 보여?"
아버지의 애타는 부르짖음과 거센 몸부림은 대단했다. 결국 그 분노는 병원 직원들에게 향했고, 손발을 묶는 신체 제제로 이어졌다. 발버둥 친 손목과 발목 주변에는 붉은 상처와 푸른 멍이 보였다.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가족들의 얼굴엔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다음날, 섬망과는 별도로 의료진의 경고가 이어졌다. 뇌출혈로 발생한 혈전의 위치가 뇌정맥 바로 옆이라 언제 위험한 상황이 닥칠지 모른다고 했다.
뇌 상부에는 뇌수종까지 발견되었다. 투석 환자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으로, 인지기능 저하 등이 따라올 수 있다는 설명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장 기능도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부동자세가 어려워 심장 CT 촬영이 불가했고, 그 정도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연하기능 저하로 입으로 음식을 삼킬 수도 없었다. 의식은 돌아왔으나 일반 병실로 이동할 수 없다는 결론을 들으며 가족들의 안타까움은 절망으로 변해갔다. 의사는 앞으로 3~4주가 고비라는 비관적인 말도 전했다.
아버지의 섬망 증세는 점점 심해져 중환자실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뇌출혈 상태가 안정되지 않아 병원 측의 동의를 얻기 어려웠지만, 가족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에 계셨던 요양병원으로 전원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에게 어떤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서 빨리 가족들이 보살필 수 있는 곳으로 모시고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앰뷸런스를 타고 중환자실을 나서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다.
곳곳에 상처가 난 아버지의 손은 종이처럼 연약해 보였다. 몸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떠났던 환각의 세계도 결국은 가장의 책임과 의무, 그리고 가족을 위해 살아온 시간 속이었다.
가장의 무게를 희망으로 바꾸던 그 해, 아버지 인생의 가장 찬란한 봄날은 어쩌면 그때였는지도 모른다. 삶의 무게를 가늠하기 어려웠던 그 시간이 가장 빛나던 기쁨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꽃이 피고 새가 울었을 것이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눈부셨을 것이다.
젊은 아내의 배웅은 가슴 설렜고, 어린 딸의 미소는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홀어머니께 효도해야지."
"여동생 시집도 보내야지."
"아내에게 반지도 하나 사 줘야지."
"자식들 공부도 잘 시켜야지"
첫출근을 준비하던 아버지의 가방 안엔 모락모락 새로운 꿈들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찬란했던 아버지의 봄날이 손을 흔들며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