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실 앞에서
5월 25일, 드디어 수술 전날이었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아버지께서 무사히 수술대에 오를 수 있게 된 사실만으로도 가족들은 안도하고 감격했다. CT상으로는 종양이 커서 대장 일부까지 절제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잘 될 것'이라는 불안한 희망을 품고 긴 밤을 맞았다. 오후 늦게 입원실로 향하는 아버지를 배웅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여러 번의 금식과 진료, 각종 검사를 견디는 동안 아버지의 기력은 눈에 띄게 쇠해져 있었다. 특히 투석을 하신 날엔 혼자서는 걷기 어려울 만큼 비틀거리셨다. 누워 계시는 시간이 길어졌고, 식사량도 현저히 줄었다. 손발의 감각마저 둔해져, 허리띠 버클이나 단추를 풀지 못해 난처해하시기도 했다.
하루는 진료 중 화장실에 가셨다가 허리띠를 풀지 못해 실수를 하셨다. 그날 밤, 엄마는 근처 상가를 뒤져 간신히 고무줄 바지 두 벌을 사 오셨다. 바짓단을 줄이던 엄마 얼굴엔 눈물 대신 비장한 슬픔이 어렸다. 그것은 반드시 아버지를 지켜내고 말겠다는 굳건한 다짐 같아 보였다.
평생 가족의 삶을 꿰매온 엄마의 뭉툭한 손이, 떨리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
엄마는 원래 손재주가 많은 분이셨다. 요리, 뜨개질, 농사일, 뭐든 손으로 하는 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엄마가 키운 배추는 유독 탐스럽게 여물었고, 엄마가 만든 떡은 동네에서 맛있기로 소문이 났다. 그런 엄마가 바느질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내가 대학에 다닐 때였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동아리 수련회를 다녀오던 길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좁은 거실을 희고 누런 삼베와 인견이 덮고 있었다. 그 거실 한가운데서 엄마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재단을 하고 계셨다. 인사도 할 겨를 없이 나를 부르시더니 긴 천 저쪽을 잡으라고 하셨다.
"아이고, 잘 왔다. 이것 좀 잡아봐라. 때맞춰 잘 왔구나"
그것이 수의라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을 때는 이미 늦었다. 엄마의 주문에 맞춰 천을 잡아주는 동안, 등골이 오싹해질 겨를도 없이 수의와 친해졌다.
"왜 하필 수의람. 한복도 있고, 양장도 있고... 이불도 있잖아"
"그런 고급 기술을 배우기는 엄마가 너무 늙었어. 이번이 아주 좋은 기회야"
처음엔 적은 품값을 받고 재단만 해서 넘기는 일로 시작했다. 재단이 익숙해지자 완성품을 만들어 포목점에 납품하게 되었고, 몇 해 지나지 않아 동대문 원단 도매상과 직접 거래를 트며 독립하셨다. 손재주뿐만 아니라 눈썰미도 좋은 엄마는 질 좋은 삼베에 최고급 인견을 입혀 신선 옷자락 같은 수의를 만드셨다.
수의는 요와 이불,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 두건과 버선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가짓수가 십여 개에 이르렀다. 그것을 하나하나 본을 뜨고 재단한 후, 재봉틀로 박았다. 만든 것을 종류별로 꼼꼼하게 점검을 한 후 반듯하게 다림질까지 해야 완성이 되었다. 만들어진 수의는 오래 보관이 가능하도록 옷 사이마다 신문지를 끼운 채 상자에 담겼다. 그리고는 정갈한 보자기에 묶여 주인을 기다렸다.
엄마의 수의가 인기가 많았던 것은 좋은 원단을 아끼지 않고 넉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늘 말했다.
"작으면 입기 어렵단다. 마지막 옷은 편안해야지"
마지막으로 입고 떠나는 옷은 살아온 세월만큼 품이 너그러워야 한다는 것이 엄마의 원칙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비법이었지만, 완성된 수의를 가지러 온 손님들은 옷을 펼쳐보며 자르르 윤이 흐르는 인견에 한 번, 넉넉한 크기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가지고 돌아갔다. 그리고 고맙게도 친척이나 지인을 소개했다.
엄마의 재단대 위에는 언제나 누런 삼베와 인견 자락이 흩어져 있었다. 매캐한 먼지 냄새와 가위질 소리, 드르륵거리던 미싱 위에 다리미의 따뜻한 김이 내려앉으면 밤이 되었다. 엄마는 바느질을 하며 자주 흥얼거리곤 했다. 바늘 끝에 매달린 실이 천 위로 오르내릴 때마다, 그 손끝에서는 누군가의 마지막 길을 위한 기도가 함께 꿰매지고 있었다.
읍내 포목점의 허드렛일을 도와주다가 시작한 수의 바느질은 그렇게 20년 넘게 엄마의 알뜰한 수입원이 되었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주문을 맞추느라, 작은방을 차지한 공업용 미싱은 먼지를 풀풀 날리며 쉬지 않고 돌았다. 그 미싱을 더는 못 쓰게 되었을 때, 엄마의 허리도, 발목도, 손목도 삐걱대며 고장이 나 있었다. 엄마가 그렇게 번 돈은 우리의 학비가 되고 시집, 장가 보내는 밑천이 되었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박봉에 어마어마한 힘이 되셨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바느질을 업으로 산 시간 때문인지, 엄마는 좀처럼 옷수선을 남에게 맡기지 않으신다.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비교적 간단한 바짓단부터 소매 길이나 허리품 정도는 손바느질로도 거뜬히 해 내신다. 손주들 한복은 물론 아버지나 엄마옷도 여러 벌 직접 만드셨다.
나중에는 퀼트 가방을 만들기도 하셨는데,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든 가방을 주변에 선물하는 것을 큰 낙으로 삼으셨다. 그 가방들 중 으뜸이 아버지께 선물한 서류 가방이었다. 갈색 천을 꼼꼼히 누비고 손잡이를 단 네모난 가방은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것이었다.
그전까지 아버지는 영화 007의 제임스 본드가 들 법한 딱딱한 직사각형 모양의 가방을 들고 다니셨다. 검은색에 잠금장치까지 달려있는 것이었다. 퀼트가방을 선물 받으신 후로 그 007 가방은 오래된 서류뭉치들과 함께 어두운 장롱 속에 잠들었다.
유난히 아버지의 소지품을 잘 챙기는 엄마에겐 그 갈색 퀼트 가방만큼 뿌듯한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 가방을 교회에도, 중요한 모임에도 들고 가셨다. 조금 코믹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하셨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 아버지에게는 사랑받는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당당함과 자신감이 넘쳤다.
늦은 일요일 오후, 그 멋진 가방 대신 엄마가 줄여준 고무줄 바지를 입고 병원으로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애처로웠다. 엄마는 배웅을 하고 들어와서 끝내 울음을 터뜨리셨다.
"엄마가,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 아버지에게."
"너희 아버지, 가여워서 어쩌니..."
5월 26일 월요일, 아버지는 오전 일찍 혈액투석을 하고 12시 30분경 수술실로 들어가실 예정이었다. 힘든 하루가 될 터였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그런데, 아버지께서 투석실로 들어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간병을 하던 큰언니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다. 지난주에 했던 심장 초음파 결과가 나빠 '수술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 상태로 수술하시면 '못 깨어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얘들아, 별일 없으면 오늘 11시 반까지 1동 3층 인공신장 센터로 오렴. 아버지 건강하신 모습 한 번이라도 더 뵙게... 좀 전에 수술하실 교수님 면담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안 좋으시대..."
"엄마한테는 말씀드리지 말고.."
그 많은 검사를 견디며 기다려 온 시간들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소식이었다. 여러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대로 수술도 못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검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끝났는데, 이런 중대한 결정을 수술 당일에야 통보한 병원이 원망스러웠다.
자식들은 물론 시간이 되는 손주들까지 투석실 앞에 모였다. 눈물과 한숨이 오갔다. 별말씀 안 드렸는데도 엄마는 이미 모든 걸 눈치채셨다. 암 진단을 받던 날보다도 더 암담한 순간이었다. 그 숨죽이는 절망을 뚫고 투석실에서 아버지가 나오셨다. 이런저런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아버지께 사정을 말씀드렸다. 수술실로 갈 줄 알았던 아버지의 실망은 우리들의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당황한 듯, 화가 난 듯, 두려운 듯, 여러 감정이 섞여 아무 말씀 못 하셨다.
수술이 미뤄진 채, 이틀이 지났다. 그새 여러 차례 주치의 면담이 있었고, 순환기내과, 마취과, 외과의 협의가 이어졌다. 심장조영검사 결과 왼쪽 혈관 중 큰 혈관 하나가 좁아져 있었다.
"고령에 투석까지 하고 계시니.... "
몰랐던 사실도 아닌데 다시 한번 아버지의 약점을 언급하는 의사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들렸다.
혈관 확장시술도, 암 수술도 급했다. 혈관 확장시술을 하면 항응고제를 써야 하고, 그러면 암 수술 때 지혈이 어려워 위험했다. 그렇다고 암 수술을 미룰 수도 없었다. 결과지 상단에 선명하게 쓰여 있던 'emergency'라는 굵은 글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 이틀... 평온하게 수술을 기다리며 의지를 보이던 아버지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좀처럼 여유를 잃지 않으시던 분이 기운을 차리지 못하시더니, 급기야 들어 눕고 말았다. 말수가 줄고 식사를 거의 못하셨다. 아버지는 깊이 절망하고 계셨다.
그 사이, 병간호는 작은언니를 거쳐 오빠로 바뀌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림뿐이었다. 온 가족이 숨죽여 기도했다. 수술이 가능해지길, 단 한 번의 기회라도 주어지길.
정말 우리의 간절함이 통한 것이었을까? 기적처럼, 수술이 허락되었다. 여러 차례의 협의 끝에 심장은 약물로 관리하고, 우선 위를 막고 있는 종양을 해결하기로 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식사도 하실 수 없게 될 상황이었다.
"당뇨 합병증으로 모든 장기의 혈관이 망가졌어요. 암을 제거하고 완치되기는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래도 식사는 하셔야 하니 종양제거가 어렵더라도 우회술 정도는 최대한 해 볼 예정입니다."
"이럴 경우 일반적으로 6개월 정도 남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의사가 말하는 우회술은 암 제거와는 다른 수술이었다. 암은 그대로 둔 채, 소화가 가능하도록 위에서 장으로 다른 길을 내어주는 것이었다. 일종의 보조 장치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수술을 시도하고 아버지의 고통을 줄일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수술은 예정되었던 날에서 사흘이 지난 5월 29일로 잡혔다. 수술실이 비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다행히 낮 12시경에 연락이 왔다. 작은언니와 막냇동생과 함께 수술실로 향했다. 아버지는 담담하셨다. 못할 수도 있던 수술을 받게 된 것이 오히려 위안이 된 듯했다.
나는 잠깐 수술실 앞에서 멈칫했다. 문이 열리기 전에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버지라면, 이런 순간 내 손을 잡고 기도를 하셨을 것이 분명했다. 먼 길을 떠날 때, 입학시험을 볼 때, 아플 때, 기쁠 때, 그것이 언제라도 아버지는 늘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해 주시곤 했다.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미숙한 신자이지만, 이 순간을 외면할 순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손을 잡고 큰 소리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수술을 잘 받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힘든 수술이지만 잘 견딜 수 있도록 아버지께 힘을 주세요. 수술하는 의사 선생님의 손길도, 아버지의 약한 심장도, 모두 주님께 맡깁니다. 우리 아버지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세요"
사실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간절함이 너무 커서 말이 되기도 전에 하늘에 올려지길 빌었을 뿐이다. 기도 중간중간, 평소처럼 크고 단단한 목소리로 "아멘"을 외치시던 아버지 목소리만 둥글게 메아리쳤다. 이 빈약한 딸의 기도가 수술실 앞에서 아버지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주기를 온 마음으로 빌었다.
"어렵겠지만... 암을 제거하는 시도를 해볼 거예요, 우회로를 만드는 수술도 할 예정입니다."
집도의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술실 전광판에 아버지 이름이 떴다.
수술실 앞 대기실은 병원 내에서 가장 긴 침묵이 흐르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싸늘한 플라스틱 의자에 나란히 앉아 전광판을 응시했다. 우리의 시선은 아버지의 이름을 쫓아다녔다. 순간순간 바뀌는 사람들의 이름 옆에는 '수술 중', 혹은 '회복 중'이라는 진행 상황이 번쩍이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간혹 보호자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짐짓 놀라기도 했다.
아버지의 경우, 수술이 빨리 끝나면 안 된다고 했다. 그것은 암을 제거하지 못하고 우회술만 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어렵겠지만 암 덩어리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 보겠다던 집도의의 말을 믿고 싶었다. 모두가 수술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던 그 시간에, 우리는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수술이 이어지길 바라며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언니, 아버지 이름 옆에 '회복 중'이라고 뜬 것 같아"
막냇동생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수술실로 들어가신 지 1시간 3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수술은 너무 빨리 끝났다.
잠시 후 집도의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와 우리를 찾았다. 결과는 염려하던 대로였다.
"제거해 보려고 시도했지만, 췌장 쪽에 너무 꽉 붙어있어서 떨어지지 않았어요. 최선을 다 했지만 전부 제거는 못했어요. 다행히 우회로를 만들었으니 드시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회복하시는 것 보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흩어져버린 나의 기도는 힘을 잃었고,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고무줄 바짓단을 줄이던 엄마의 슬픈 손이 다가왔다. '아버지만 있었으면'을 되뇌던 젖은 목소리도 들려왔다. 수술실 전광판에 매달려있던 아버지의 시간이 사라지고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나서 회복실에서 나온 아버지를 맞았다. 진실을 차마 말씀드릴 수는 없었다.
"아버지, 고생하셨어요. 수술은 잘 끝났어요. 이젠 아무 걱정 마세요"
"아버지는 괜찮다, 고맙다"
아직 의식을 온전히 찾지 못한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그 말을 반복하셨다.
아버지는 정말 괜찮으신 걸까, 괜찮으실까.
애써 믿고 싶은 그 말이 가슴을 찔렀다.
아버지의 봄은 어디로 불고 있었던 걸까.
창밖은 이미 여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