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만 있었다면...
4월 14일, 아버지께서 위암 확진을 받은 날 이후로 우리 가족의 달력은 병원 일정표로 바뀌었다. 동네병원에서 신속하게 대학병원 예약을 잡아준 덕에 아버지의 진료는 사흘 뒤로 예정되었다.
십이지장 가까운 부위에 궤양이 동반된 위암이었다. 병기나 전이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빠른 검사와 수술이 필요합니다”
처음 진료를 봤던 교수의 수술 일정은 6월 중순 이후였다. 너무 길었다. 기다릴 수 없었다. 병원은 서둘러 다른 외과 교수로 일정을 변경해 주었다. 그날부터 아버지의 하루는 진료와 검사, 그리고 기다림으로 이어졌다. 거대하고 복잡한 대학병원의 시스템 속으로 천천히, 그러나 피할 수 없이 빨려 들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득함이 밀려들었다.
나의 기억은 문득 1997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결혼하던 해였다. 결혼 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시어머니께서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하시겠다며 올라오셨다. 겨우내 얼었던 땅을 녹이며 봄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몇 달 뒤엔 친정 엄마가 극심한 허리와 다리 통증으로 실려오셨다. 허리 협착증이었다. 봄이 무르익어 철쭉이 만발하던 때였다.
두 분 모두 수술은 어렵지 않다 했지만, 염증이 생기고 재수술이 이어지며 회복은 기약 없이 길어졌다. 기이하게도 두 분은 나란히 같은 층의 병실을 쓰게 되었다. 한쪽엔 시어머니, 다른 한쪽엔 친정엄마. 나는 출퇴근하듯 두 병실 사이를 오갔다. 그런 생활이 그 이듬해 봄까지 이어졌다.
남편은 그 무렵 의대를 막 졸업한 대학병원 인턴이었다. 쪽잠을 자며 일을 하다가 새벽녘에 잠깐 얼굴을 비추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주말이나 휴일은 물론, 병원에서 잠을 자고 출근하던 날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결혼의 시작이 우울할 법도 했다. 하지만 정신없이 꽃이 피고 지던 그 해 봄, 신혼의 단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골에서 올라오신 두 어머니의 고단한 삶이 그저 가엾기만 했다. 죽을병은 아니니 곧 나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충분히 현실이 되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아버지의 진료를 따라 병원을 오가며 그때의 봄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기가 막힌 상황도 지금처럼 막막하진 않았다. 회복을 말할 수 있었던 그때와, 남겨진 시간을 헤아려야 하는 지금. 젊었던 그때와 세월을 고스란히 짊어진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아버지를 잃을까 두려웠다.'
4월 23일, 새벽부터 금식한 채 병원으로 향했다. 아버지댁과 가장 가까이 사는 작은 언니가 동행했다. 혈액과 소변 검사, 폐기능 검사, X선 촬영을 마치고 외과 진료실 앞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여기 앉으세요."
아버지 수술을 맡게 될 새로운 교수는 호탕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활력 있는 의사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적잖이 위로가 됐다. 수술은 다행히 한 달 정도 앞당겨졌고, 달력은 숨 쉴 틈도 없이 아버지의 진료와 검사 스케줄로 가득 찼다.
며칠 뒤인 4월 28일엔 위내시경과 초음파내시경, 심전도 검사, 그리고 심장혈관센터와 신경과 외래까지 이어졌다.
“바쁜 너희들을 이렇게 괴롭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금식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도 힘든 내색 없이 동행한 자식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내보이셨다. 여전히 '다 괜찮다'고 하셨지만, 아버지의 다리는 점점 더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4월 30일, 수술 전 노인 포괄평가가 있었다. 고령에 기저질환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를 종합적으로 진단하여 수술 가능 여부를 판단하는 진료였다.
“식사는 잘하시나요?”
“낙상하신 적은 없으세요?”
“드시는 약을 모두 지참하셨죠?”
"투석하시면서 견딜만하세요?"
끊임없는 질문과 확인을 거치며 '노인' '고령' '투석환자' 같은 단어가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노인이라뇨? 아직 아흔도 안 됐는데?..."
아버지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아흔도 안 되었다며 '노인 환자'라고 부르는 것에 마음 상해하셨다. 그토록 열심히 걷고, 철저히 관리를 해 왔는데 '이건 배신 아닌가!' 하는 섭섭함이 배어 있었다.
휘청이는 다리는 구름 위를 걷듯 조심스러웠고, 금세 허공으로 떨어질 것 처럼 위태로웠다.
5월 2일 오후엔 위와 흉부 CT를 찍었다. 차가운 침대 위에 누운 아버지의 손끝이 조용히 떨리고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아버지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5월 12일엔 내분비내과, 5월 13일엔 다시 외과 외래가 이어졌다.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떨어지는 아버지를 모시고 투석 일정을 피해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자식들에겐 검사 일정표를 확인하고, 금식 시간을 조율하고, 누가 운전하고, 누가 동행할지를 나누는 일이 중요한 일상이 됐다. 큰언니는 투석을 가시는 날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오가며 식사를 책임졌고, 다른 자식들도 각자 요일을 분담해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가거나 부엌에서 엄마를 거들었다.
형제가 많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몸으로 느끼는 하루하루였다.
철쭉이 피는 것도, 장미넝쿨이 담장을 넘는 것도, 아카시아 향기가 불어오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바쁜 나날이었다. 봄은 속절없이 저물고 있었지만, 봄이 떠나는 자리엔 꽃보다 고운 가족의 마음이 아버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5월 8일, 어버이날이 다가왔다. 검사 사이의 짧은 공백, 하루의 숨결 같은 시간이었다. 오빠가 새로 집을 장만해 집들이 겸 온 가족이 모였다. 오빠의 새집을 둘러보며 아버지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공원이 다 내려다 보이는구나. 전망이 참 좋아."
“이렇게 다 모이니, 정말 행복하구나.”
온 가족이 모처럼 둘러앉아 먹고 나누는 시간이었다. 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다는 것을 잠시 잊고, 여느 때 가족모임처럼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를 위해 더 즐거워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께서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를 알게 되었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로 시작되는 익숙한 찬송가였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어떤 집도 천국이 된다는 믿음의 노래, 사랑으로 함께하는 가족의 모습이 정답게 그려진 노래였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니 한 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마지막 절에 들어서자, 우렁차게 노래를 부르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나도 목이 메어 끝까지 부르는 것이 힘들었다.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운 찬송가였다.
온 식구가 한상에 둘러서 먹고 마시는 이곳, 지금 이 순간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낙원이었다. 평생 꿈꿔온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 인생의 봄날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아버지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우리 집안에는 우환이 잇따랐다. 증조모이신 아버지의 할머니께서 신병을 앓다가 돌아가셨고,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안 되어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께선 이유를 알 수 없는 배앓이를 하시다가 병원에도 못 가보고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겨우 스물일곱, 만삭의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아들을 남겨두신 채였다.
할아버지 상여가 나가던 날, 꽃상여 앞에서 춤을 추며 놀았다는 어린 아버지의 슬픈 이야기는 늘 나를 울렸다.
그 아이는 누구보다 빨리 철이 들었다. 열일곱이 되던 해에는 유일한 버팀목이던 증조부마저 돌아가시며 홀로 문상객을 맞는 상주가 되었다.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책임져야 했기에 상처가 나도, 배가 고파도, 눈물이 나도 참아야 했다.
그럼에도 늘 긍정적이고 유쾌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 슬픈 과거는 믿기지 않을 만큼 멀게 느껴졌다. 그런 아버지가 자주 신기했고, 존경스러웠다.
언젠가, 우리 자식들을 앞에 앉혀놓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는... 어렸을 적, 아버지만 있었으면, 아버지만 있었으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만 있었으면.."
술을 몇 잔 드시고는 '아버지만 있었으면'을 반복하시던 그 목소리가 찬송가 노랫말에 겹쳐 들려왔다.
그 고단한 세월을 잘 견디고 이제 백발이 성성해진 아버지의 젖은 목소리에 눈물이 고였다.
이젠 우리 차례인 것이다. 아버지가 가지지 못했던 든든한 아버지를 가진 우리, 그렇게 행복했던 우리가 아버지를 감싸고 엄마를 안아줄 순간인 것이다. 아버지께서 늘 그러셨던 것처럼.
가족모임이 있던 그날, 5월 6일은 어버이날을 앞두고 초여름의 기운이 스며드는 날이었다. 하늘은 투명했고 바람은 따뜻했다. 찬송가를 다 부르고, 손주들의 노래자랑이 몇 곡 더 이어진 후, 아버지께서 천천히 말씀하셨다.
"이렇게 가족들에게 염려를 끼쳐 미안하다. 그리고 모두 고맙구나. 아버지도 힘을 내서 치료 열심히 받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 아직 괜찮다"
힘차게 우리를 격려하며 웃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씩씩했고, 용기가 넘쳤으며, 멋졌다.
이번이 아버지와 함께하는 마지막 어버이날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저 멀리 눈 녹듯 사라졌다.
봄은 아직,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