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생일, 그리고 봄의 약속
1. 봄비 속의 기억
부슬비가 봄을 적시던 날이었다. 전날 엄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떠올리며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했다.
"내일 바쁘냐?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좀 다녀왔으면 좋겠는데..."
전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건강에 심상찮은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아침 회의를 서둘러 마치고, 밀린 업무 몇 가지를 정리한 뒤 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회사에서 차로 5분, 걸어서 30분 남짓한 거리였다.
부모님은 코로나 사태 직전인 2019년 초, 고향인 충남 부여를 떠나 이곳으로 오셨다. 육 남매가 모두 서울 근교에 자리를 잡은 뒤, 고향집엔 부모님 두 분만 남았다. 평생 몸 담은 교회도 있었고, 피붙이 못지않은 친구들도 많으셨다. 왕성한 사회활동을 해 오신 아버지 주변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팔순에 가까워지며, 그 모든 관계들로는 채워지지 않는 삶의 구멍들이 생겨났다. 아버지의 당뇨가 심해질 때, 엄마의 허리는 더 굽어졌고, 병원에 동행할 자식 하나 없다는 서운함에 엄마의 감정은 자주 북받쳤다. 깜빡이는 전구, 물이 새는 수도꼭지, 시큰한 발목..., 세끼 밥처럼 반복되는 단순하고도 지리한 일들에 바로 달려갈 수 없는 우리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이젠 자식들 곁으로 이사 오시라 권했지만, 번번이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두 분께는 낯익은 읍내와 정든 이웃들이 곧 세상의 중심이었다.
고향을 떠날 수 없다는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렸다. 설득이란 표현보다는 어쩔 수 없이 끌려오셨다고 하는 것이 더 맞겠다. 아버지께서 저혈당 쇼크로 두 번이나 119에 실려 가신 뒤, 성급한 딸들은 허락도 없이 덜컥 아파트를 계약했다. 잔금을 치러야 하는 날이 다가오자, 부모님은 체념한 듯 살던 집을 서둘러 내놓으셨다.
엄마가 그 집에 가진 애정을 잘 알기에, 막상 집을 팔고 나니 그곳에 남겨진 오래된 사연들이 애달프게 흐느꼈다.
원래 우리가 자란 고향집은 군청 뒤쪽의 작은 단독주택이었다. 부여 출신 신동엽 시인의 생가와 맞닿은 조용한 골목 안쪽에 있었다. 초록색 대문을 열면, 석류나무와 라일락, 장미 몇 그루가 자라는 작은 마당이 나왔다. 마당에서 좁은 철계단을 올라가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옥상도 있었다.
회색 시멘트 옥상엔 가로질러 길게 걸린 빨랫줄 아래,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모여 장독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옆집과 뒷집은 물론, 나지막한 구릉 너머 읍내의 건물들도 희미하게 보였다. 별빛과 달빛, 사람 사는 불빛이 뒤섞인 그곳에서 도시에 대한 꿈을 꾸고, 첫사랑에 두근댔으며, 별빛이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철없는 소원을 빌었다.
마당 귀퉁이에는 아버지가 여름마다 등목을 하시던 재래식 작두펌프도 하나 있었다. 나중에는 수도꼭지가 달려 물이 콸콸 나오게 되었지만, 사라져 버린 펌프질의 짜릿한 재미가 아쉽기만 했다. 그 편리함은 어린 내겐 오히려 심심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한여름, 외출했다 돌아오신 아버지는 땀에 젖은 셔츠를 벗고 등목을 하셨다. 팔을 길게 뻗어 엎드린 채, 등에 시원한 물이 쏟아지길 기다리셨다. 물을 끼얹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었다. 붉은 고무통에 물을 받아 손잡이가 달린 파란 바가지로 끼얹으면, 아버지는 경쾌하게 몸을 떨었다.
"어구, 시원하다! 한 바가지 더 뿌려라. 허허허"
아버지의 만족스런 웃음은 훈장처럼 나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아버지 등을 타고 튀어 퍼지는 물방울에, 나의 더위도 함께 날아가는 것 같았다.
낮은 담장 밑에는 채송화와 봉선화 사이로 부추나 대파 같은 채소들이 자랐다. 밥을 짓던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면, 냉큼 달려가서 그 싱싱한 것들을 한 움큼씩 뽑아오곤 했다.
오래된 시골집이 대개 그렇듯, 우리 집도 매우 춥고 또 더웠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던 겨울밤엔 솜이불을 둘둘 말아도 손끝이 시렸고, 여름밤엔 옥상의 열기로 숨이 턱턱 막혀 잠을 설쳤다. 두세 명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방 세 개가 전부였던 좁은 집은, 매일매일 복닥이는 전장 같았다.
여섯 자식의 키가 자랄수록, '집을 넓히고 싶은' 엄마의 열망도 함께 자라났다. 소박했던 엄마의 꿈은 식구들이 모두 둘러앉을 수 있는 크기의 넓은 거실을 갖는 것이었다. 벽 한쪽엔 소파를 놓고, 그 위엔 그럴듯한 가족사진을 큼지막하게 걸어보는 꿈, 온 가족이 둘러앉아 넉넉하게 한상에서 먹고 마시는 꿈.
그 조촐한 꿈을 이루는 데는 무려 40년이나 걸렸다. 자식들이 모두 집을 떠난 뒤였다.
부모님의 젊음과 우리의 어린 꿈들이 여전히 숨 쉬고 있던 낡은 단독주택을 팔고, 부여 읍내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 골골이 주름진 엄마 얼굴에는 눈물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일렁였다.
이삿날에도 오늘처럼 봄비가 내렸다. 비는 대체로 그날의 감정을 닮는다. 젖은 마당을 바라보던 엄마의 쓸쓸한 눈빛과 짐을 실어 나르는 트럭 소리가 스산하게 마음을 적셨다.
38평, 아들 딸과 사위, 며느리, 열셋이나 되는 손주들을 모두 앉혀도 부족하지 않은 거실을 갖고 있었다. 인테리어가 뭔지도 잘 모르던 엄마는 대전에서부터 사람을 불러와 손을 봤다. 우리도 미처 몰랐던 엄마의 취향을 담기 위해서였다. 엄마 말대로 '대궐 같은 안방'에는 돌침대를 들이고, 오래된 장롱 대신 붙박이장을 달았다. 엄마의 키에 맞춰 싱크대를 낮추고 양문 냉장고도 새로 장만했다. 어린 손주들을 위해서 제일 작은 방엔 알록달록 귀엽고 화사한 노란 벽지를 발랐다. 벽지 위에 그려진 풍선을 타고, 엄마 마음도 둥둥 떠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식들은 저마다 필요한 것들을 사 드리거나 형편껏 용돈을 보탰다. 나 또한 보조의자까지 딸린 커다란 검은색 가죽 소파를 선물했다. 그 소파에 양반다리로 앉아 계신 엄마는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님께서 그 집에서 남은 삶을 여유 있게 보내시리라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두 분은 명절이나 어버이날, 혹은 생일날이 되면 거실을 가득 채울 자식들의 웅성거림을 기대하고 계셨을 것이다.
하지만 40년이 걸렸던 넓은 거실의 꿈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데는, 3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딸들이 허락도 없이 계약한 도시의 새집으로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식들이 자꾸만 오라고 해서... 이젠 애들 옆으로 가려고 해"
"애들이 아파트까지 장만해 놓고 오라는데 어쩌겠어. 이 집보다 널찍하고 더 좋아"
"정리되면 초대할게. 다들 꼭 놀러 와."
에둘러 자랑처럼 늘어놓으셨지만, 자식 옆으로 옮겨간다는 명분에는 인생의 무상함과 노년의 쓸쓸함이 짙게 드리웠다. 삶의 주도권을 모두 내려놓고 떠나오는 엄마 손을 잡으며, 나도 이젠 돌아갈 고향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새로 장만한 집은 나의 집과 가까웠고, 작은언니가 사는 아파트와 이웃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도 지척이라 무슨 일이 생겨도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성격 좋은 아버지께선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셨다. 교회와 노인정에서 친구도 여럿 사귀셨다. 점잖고 유머가 넘치며 배려심 많은 아버지는 어딜 가나 인기가 넘쳤다. 몇 달 만에 아파트 노인회 부회장까지 맡게 되셨다. 이내 고향에서처럼 이런저런 사람들과 어우러진 분주한 삶을 되찾으셨다. 나는 가끔 저런 아버지를 닮지 않은 내 소심함을, 애써 엄마 탓으로 돌리곤 했다.
아버지의 적응력 못지않은 엄마의 변화도 놀라웠다. 도시 생활이 처음인 엄마를 위해 딸들이 생각해 낸 것은 문해학교였다. 학교에 다녀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엄마에겐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책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나서는 엄마의 지팡이엔 어린아이의 설렘이 또각거렸다.
받아 올림이 있는 두 자릿수의 덧셈이나 1차 방정식을 푸느라 진땀을 빼는 팔순의 어린이를 지켜보는 것은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학교에서 만난 같은 연배의 할머니들과 '야, 너, 친구야'를 부르는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여러 자식들과 소소한 만남도 잦아지며, 외롭게 남겨졌던 부여에서의 몇 해는 아주 먼 옛이야기처럼 멀어졌다.
더군다나, 그 해 말 들이닥친 코로나 여파는 부모님의 만족도를 몇 곱절로 올려주었다. '자식들 옆으로 이사를 안 했으면 어떻게 견뎠을지 아찔하다'는 것이 엄마의 단골멘트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빠른 적응과는 별개로 세월의 흔적은 비켜갈 수 없었다. 두 분 건강에는 여러 번 빨간불이 들어왔다. 이사 후 일 년쯤 지나 아버지는 신장투석을 시작하셨고, 엄마는 불편한 다리에 숨까지 가빠져 점점 더 걷기 어려워졌다. '정말로 이사를 안 하셨더라면 어쩔 뻔했느냐'고 자식들이 먼저 안도의 숨을 내시곤 했다.
도시의 봄비는 고향의 봄비와 다르게 내렸다. 부드럽지만, 왠지 더 차갑고 무심했다. 그날의 비도 그랬다.
회색 하늘 아래, 사람들은 제 갈 길을 재촉했고, 나는 묘하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회사로 향했다. 출근길에 스치는 빗소리 속엔 알 수 없는 예감이 숨어 있었다.
회사에서 아버지 댁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 10분 남짓, 여러 상상이 스쳐갔다. 전화기 너머로 건너오던 엄마의 불안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며, 정말 무슨 큰일이 생긴 듯한 불길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버지께선 몇 달째 소화 불량으로 고생을 하고 계셨다. 약을 드시며 좋아지고 있다는 말을 믿고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일주일에 세 번씩 혈액투석을 하시면서도 매일 만보 이상 걷는 아버지셨다. 저염, 저인, 저칼륨에 수분까지 제한하는 식이요법도 워낙 빈틈이 없으셨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자식들의 믿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매사에 '웬만하면 괜찮다'고 하시는 아버지의 긍정은 자식들에겐 늘 위로이자 감사였다. 그런데 어제서야 아버지께서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뭔가 미심쩍었던지 조직검사까지 했다는 것이다.
토요일 오전, 결과를 들으러 가기로 한 날이 닷새나 남았는데 병원에서 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월요일 일찍 보호자와 함께 오라는 통보였다. 전화를 받으신 아버지께선 엄마에게도 아무 말씀 안 하시고 하루를 보내셨다. 저녁에서야 오빠를 불러 조용히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리고 그 소식은 놀란 엄마를 통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오빠보다는 가까이 사는 내가 병원에 함께 가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셨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예감이 어둠처럼 내려앉았다.
아버지께서 검사를 받은 병원은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아파트 건너편 상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차가 어려워 걸어가기로 했다. 걸음이 불편한 엄마를 만류했지만, 부득불 따라나서는 고집을 말릴 수 없었다. 엄마의 특별한 자가용인 '세발자전거'를 타고 가시겠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세발자전거는 어린 아기들이 타는 것과 크기만 다를 뿐 모양은 똑같다. 페달을 구를 힘만 있다면 누구든지,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 엄마가 그 세발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것은 부여에 살 때다. 숨이 차고 발목이 시큰거려 걷기 불편해질 무렵, 우연히 자전거포에서 그 신기한 물건을 보게 되었다. 유난히 튼튼한 다리를 물려주신 외할머니 덕택에, 그 자전거는 곧바로 엄마의 분신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 재미난 자전거를 쌩쌩 달려 마트에도 가고, 미장원에도 가셨다. 아픈 발목과 상관없이 자전거를 움직일 수 있는 엄마의 튼튼한 다리가 신통했다. 부여에서도, 이사 온 새 동네에서도 엄마는 '자전거 할머니'로 유명했다. 지금 엄마가 타고 나서는 것이 그 세발자전거다.
머리를 적시는 잔비를 맞으며 페달을 구르는 엄마가 왜 그리 처량했는지 나는 그만 울화가 치밀었다.
'집에 그냥 계시면 좀 좋아! 엄마는 왜 꼭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지...'
그것은 분명 곧 다가올지 모르는 불길한 결과와 그 앞에 서게 될 엄마에 대한 염려였다. 내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터져 나오는 무력감이었다. 하지만 부르르 올라오는 화는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병원은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로 붐볐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검진을 받기 위해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그 틈에서 더러 아는 얼굴도 보였다. 모른척하고 싶어 마스크를 코까지 올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내 옆에 앉은 부모님의 얼굴엔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전광판의 숫자는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30여 분쯤 지났을까, 아버지의 이름이 진료실 1번 아래에 푸른색으로 떴다.
의사는 아버지를 알아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짧게 인사했다. 자주 이용하는 동네 병원답게 웬만한 사정은 설명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잠시 모니터를 바라보던 의사는 A4용지를 우리 쪽으로 밀었다. 결과지 상단에 밑줄을 긋더니, 화면을 가리켰다.
"위암이에요"
의사는 예후가 좋지 않은 세포 유형이라고 했다. 진행이 빠른 위암이라 최대한 빨리 수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전이 가능성도 높고, 항암도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엔 냉정함마저 느껴졌다.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설명이었다.
결과지 상단의 'emergency'라는 글자가 가슴에 박혔다. 인근 대학병원에 직접 진료 스케줄을 잡아주겠다는 친절도, 그 어떤 희망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몇 마디가 더 오갔지만 진료는 아주 신속하게 마무리됐다. 말없이 앉아 있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섰다.
그새 비는 그쳤지만, 도로가에 세워뒀던 엄마의 자전거 안장은 물기가 축축했다. 덜덜 떨고 있는 엄마의 거뭇한 손도 비인지 눈물인지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엄마 손을 감싸 쥐었다. 차갑고 축축한 손등아래 긴장과 충격으로 달아오른 손바닥의 미열이 느껴졌다. 타고 왔던 자전거를 힘없이 끌며 따라오는 엄마의 모습은 안쓰러움을 넘어 참담했다. 우스꽝스러운 세발자전거와 위태롭게 후들거리는 엄마의 무릎 사이에서 나는 그만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아버지께선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담담히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괜찮다. 정말이야. 이만큼 살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걱정 마라."
귓가를 스치고 떨어지는 그 젖은 목소리가 멀고, 아득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버지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엄마는 본인 키만 한 자전거에 기대어 절뚝이며 걸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해 멍하게 뒤따르던 나의 가슴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슬픈 바람이 불었다.
마침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해마다 어김없이 10만 원을 통장에 보내며 축하 전화를 주시던 아버지는, 처음으로 그것을 잊으셨다.
음력 3월 17일생인 나는 두 살 터울인 오빠와 생일이 같다. 삼대독자인 오빠가 태어난 건 엄마가 내리 딸 셋을 낳고 난 뒤였다. 집안에서 오빠가 갖고 있는 상징성과 우월적 지위에 대해 설명이 필요 없는 이유다. 그런 귀한 아들 생일떡을 찌다가 진통이 시작됐고, 내가 세상에 나왔다. 은근히도 아니고 대놓고 '아들 하나 더'를 바라던 할머니를 실망시킨 '또 딸'이었다.
그 시절엔 많은 집에서 아이 하나, 둘쯤 잃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우리 집도 맏언니가 돌도 지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순서로는 다섯째, 딸로는 넷째였던 나는 그런 탓에 할머니의 실망과는 상관없이,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이 되었다. 내가 태어난 뒤에도 '아들이 하나는 더 있어야 한다'는 할머니의 열망은 꺾이지 않았다. 엄마는 내 밑으로 동생 둘을 더 낳으셨지만 '또 딸, 또 딸', 우리 집은 가운데 귀한 아들을 두고 위아래를 딸이 포위한 1남 5녀, 딸부잣집이 됐다.
나는 자라는 동안 내내 '오빠 생일떡 하다가 태어난 아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생일을 맞았다. 덕분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생일떡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엄마는 해마다 내가 세상에 나오려고 발버둥치던 그날처럼, 쌀을 불리고 방아를 찧어 시루에 떡을 앉혔다. 그리고 소고기가 들어간 미역국을 끓여 소박하고도 거한 생일상을 차렸다.
그런데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내가 그 미역국을 싫어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한, 미역의 미끈한 느낌이 싫다며 입에도 대지 않았다. 엄마는 그런 나를 위해 따로 소고기무국을 끓여주셨다. 그렇게 해서 소고기무국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생일 음식이 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엄마의 관심을 받고 싶었던 일종의 투쟁이거나 심술이었던 것 같다. 결혼 후 첫 아이를 낳고, 병원에서 미역국을 한 사발 들이킨 뒤에야, 왜 그토록 맛있는 것을 거부했는지 후회했다.
엄마는 매년 같은 말을 하셨다.
“생일에는 꼭 미역국을 먹어야지. 그것도 두루 나눠 먹어야 한단다. 그래야 인덕이 좋아져. 한 숟갈만 떠 봐라.”
생일날엔 미역국을 먹어야 인덕이 생기고, 삶이 순탄하다는 엄마의 믿음은 신앙과도 같았다. 그 말을 수십 번 들으며 나이를 먹은 후, 나도 이젠 엄마처럼 아이들 생일에 미역국을 끓인다. 아이들뿐 아니라 나와 남편 생일에도 마찬가지다. 엄마에게 국 하나를 더 끓이게 했던 내 까다로움은 잊은 채, 식구들에게 무슨 말을 하려 하면 눈치 빠른 딸아이가 냉큼 끼어든다.
"생일에는 미역국을 꼭 먹어야 한다고? 그것도 꼭 함께 먹어야 인덕이 많아진다고? 하하하. 엄마의 그 말, 귀에 딱지 앉겠어"
한 번도 거르지 않던 그 미역국을, 그날은 끓이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과 함께 밀려온 두려움은 나의 인덕을 챙길만한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께 저녁 식구들과의 외식이면 충분했다. 미역보다 더 검은 그림자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와 오빠의 생일상에 미끄러지듯 밀려와 덮였다. 미역국과 인덕을 논할 처지가 아니었다.
자식들이 집을 떠나고 각자의 삶을 살게 된 후, 아버지는 자식들 생일이면 용돈을 보내시기 시작했다. 그 금액은 늘 변함없이 10만 원이었다. 결혼 후에는 사위 생일도 꼭 챙기셨다. 용돈과 함께 자상한 축하 전화도 잊지 않으셨다.
"출근하니? 오늘 생일이라 아버지가 밥값 조금 보냈다. 맛있는 거 사 먹어라. 그리고 좋은 하루 보내거라"
아이를 셋이나 낳아 키우고 흰머리가 듬성듬성해진 이 나이에도, 아버지께 축하 전화와 용돈을 받는 재미는 솔솔했다.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이 그렇게 든든하고 고마울 수 없었다.
올해 처음, 아버지는 그 10만 원을 보내오지 않으셨다. 내 손을 잡고 병원을 다녀오시면서도 아들과 딸의 생일이란 것을 까맣게 잊고 계셨다. 끓이지 못한 엄마의 미역국보다 그 일이 더 가슴을 저몄다. 앞으로 다가올 투병의 기록에 눈물과 아픔만 남으면 어쩌나 두려웠다.
잔잔히 내린 비로 나뭇잎엔 연초록의 봄이 번지고 있었다. 맺힌 물방울이 흔들리며, 꽃의 기운이 불어왔다. 그 길을 따라 걷는 우리의 걸음은 무거웠다. 밀려오는 봄의 문턱을 빠져나온 아버지의 계절은, 매서운 겨울을 향하고 있었다.
'그 계절이 다시 봄으로 필 수 있으려나?'
눈물이 떨어졌다.
그때였다. 구름 사이로 연푸른 하늘이 열리며 빛이 쏟아졌다. 눈물을 주워 담아 애써 숨기는 나를 향해 부드럽게 속삭였다.
"울지 마, 울지 마, 봄은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아"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삶을 받아들이실 것이다. 누구보다 씩씩하고 용감하게, 당신의 자리를 지켜내실 것이다. 그렇게 봄은 계속될 것이다. 아버지를 향한 나의 믿음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