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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일 Aug 07. 2020

우리는 얼마나 멀어졌을까?

외할아버지께서 세우신 첫 번째 교회는 시골에 있다.

내가 어릴 때 100명 정도 됐던 이 교회의 교인들을 생각하면 하나같이 머리가 희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교회를 찾는 교인들은 대부분 직접 키운 농산물로 밥을 지어 먹는 이들이었다. 몸이 편찮으신 분들도 많았다. 눈이 안 보이시는 분, 다리를 저는 분, 허리가 굽은 분, 귀가 잘 안 들리시는 분…. 그분들은 각자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조금 과한 화장을 하고 교회를 찾았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찬양했다. 예배시간에 그들은 왠지 가벼워 보였다. 행복해 보였다. 도시에 사는 노인보다도 세 배는 행복해 보였다.


그 교회에 갈 때마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100명쯤 생긴 기분이었다.

“아 OOO 손자!”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으시고 또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내 손을 꽉 잡는다.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리거나 쓰다듬고는 엄마의 안부를 묻는다.

모두가 내 엄마와 할아버지를 알았다.

예배가 끝나고 교회식당에서는 모두가 바닥에 둘러앉았다. 집에서 가져왔다는 반찬들이 상에 놓였다. 가방에서는 상추와 고추가 나왔다.


교회는 한쪽에는 관리를 자주 하지는 않지만 왠지 모르게 정갈한 정원이 있었고, 세월을 따라 녹슨 종탑이 서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언젠가 줄을 잡아당겨 본 적이 있지만 그 소리가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 교회는 오늘도 그렇게 오래된 나무처럼 교인과 함께 늙어가고 있을 것이다.      


내가 할아버지가 세우신 교회를 떠올린 이유는 한 기사(한국일보, “극우 전광훈보다 엘리트 성전에 갇힌 대형교회가 더 문제”)를 봤기 때문이다.     


“강남의 대형교회 대학부는 일요일마다 ‘헌신노동’이란 걸 해요. 3주간의 단기 해외 선교도 있지요. 학비나 용돈 벌기 위해 시간이 자유롭지 않은 청년들은 구조적으로 배제되는 거죠. 신앙생활의 진입장벽을 높여서 자연스레 ‘필터링’ 되도록 하는 겁니다.” 기사에는 한 대형교회 대학부는 이른바 ‘스카이’라 불리는 명문대에 다녀야 하고, 부모의 스펙과 경제적인 여유까지 따라줘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대형교회가 소위 ‘인맥 공장’이 되고 있으며, 요즘에는 어느 교회를 다니는지에 따라 ‘진짜 상류층’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목사는 부유한 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부유한 자는 교회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더 공고히 한다고 했다. 그러한 사이 대형교회에서 가난과 고통은 타자화된다고 했다.      


내가 서울에서 살게 되면서 교회를 잘 나가지 않은 이유는 분명 귀찮음 때문이 컸지만

오랜 시간 다녔던 할아버지의 교회와 비교해 너무나 큰 이질감이 들었던 이유도 있었다.

서울의 거대한 교회들은 주름살 하나 없었다. 눈이 안 보이시는 분도 다리를 저는 분도 허리가 굽은 분도 귀가 잘 안 들리시는 분도 없었다. 서울에는 그런 분들이 없는가 하면, 그런 사람들은 전부 교회 밖에 숨어있었다. 곰팡이 핀 외로운 단칸방에서 쓸쓸하게 숨어있었다. 교회는 풀을 먹여 빳빳하게 핀 옷이었는데 왠지 입고 싶지는 않은 옷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보았던 가벼움과 따듯한 웃음들, 따듯한 손길이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모두의 손자가 아니었고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초대교회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소외된 자와 약한 자의 교회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얼마나 멀어졌을까. 우리는 그곳에서 얼마나 멀어졌을까. 나는 오늘도 할아버지의 교회를 상상하고 그곳으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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