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재미의 발견' 출간 전 연재. '프롤로그'부터 읽으면 더 좋습니다.
“어? 그런데 콘텐츠에서 ‘불 쇼’는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듯합니다”라고 질문할지 모르겠습니다. “불 쇼는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맞는 말이면서도 틀린 말입니다. 콘텐츠 속에서 ‘불’은 요리대가 이연복이 춘장을 볶지 않는 이상 자연 상태의 불 그 자체로 등장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물론, 두고두고 회자되는 가수 비욘세의 2013년 슈퍼볼 무대는 말 그대로 큰불이 등장하는 불구경이었습니다. 매년 한강 변에서 개최되는 불꽃축제도 자연 상태의 ‘불’ 구경입니다. 불은 등장하기만 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매혹합니다. 한강 변에 발 디딜 틈 없이 모여드는 인파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콘텐츠에서 불은 자연 상태 그대로 나오기보다는 대개 조금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제가 이번 장에서 예시로 들 불구경은 영화 <곡성>과 <사바하>, 그리고 무당의 굿판에 있습니다.
<곡성>하고 <사바하>에 불이 나왔다고? 영화를 봤다면 좀 갸우뚱할 겁니다. 두 영화에서 자연 상태의 불은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장에서 말하려는 불은 은유적 표현입니다. 두 영화는 굿이라는 ‘불’을 사용함으로써 영화를 불구경과 다름없게 만들었습니다. 갑자기 웬 굿인가 하겠지만, 굿은 그 자체로 불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칼을 휘두르며 맨발로 작두를 타는 무당. 빙의가 돼서 닭의 목을 주저 없이 베어버리고, 돼지 사체에 칼을 꽂는 그 모습에 관객은 경악합니다. 무당의 굿판은 평범한 사람이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으며, 보는 이에게 경외감(공경하면서 두려워하는 감정)을 일으키는 광경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또 경외감이 드는 건,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이 화려하게 타는 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볼 수 있듯 실제로 최초의 인류는 오랫동안 불을 경외하며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왔습니다. 굿과 불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곡성>과 <사바하>의 굿판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진짜 무당을 만나봅시다. 무당들이 굿판에서 이해할 수 없는 행색으로 경외감을 일으키는 말과 행동을 하는 이유는 불구경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불처럼 타오르는 특이점을 통해 관객의 ‘현재의식을 멀리 걷어내는’ 최면을 걸고 있는 셈이지요. 그들의 일반적이지 않은 말과 행동, 그들이 조성하는 ‘저세상’ 분위기에 관객은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현재의식이 마비되고, 무당은 이때를 공략합니다.
“내 몸속에 조상신이 들어왔다!”
그리고 현재의식이 마비된 관객은 무당의 말을 비판 없이, 그저 입을 헤~ 벌리고 수용하게 됩니다. 방어막처럼 쳐져 있던 현재의식이 걷히고, 잠재의식만이 남은 상태에서 관객은 무당이 접신했다는 말을 호들갑을 떨며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일부 가수들의 무대 역시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가수 비욘세의 2013년 슈퍼볼 무대를 못 보셨다면 반드시 유튜브에서 한 번 보길 권합니다. 싸움구경과 더불어 가장 원초적인 특이점인 불구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무대입니다. 이 무대에는 실제로 엄청난 자연 상태의 불이 등장할 뿐 아니라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조명, 춤, 의상 등 불 역할을 하는 특이점이 쉴 새 없이 펼쳐지며 관객의 혼을 쏙 빼놓습니다. 비욘세는 이 무대에서 마치 여신이라도 되는 듯 경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가수 지드래곤과 그룹 방탄소년단의 무대 역시 자연 상태의 불이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비욘세의 무대를 볼 때와 다르지 않은 감흥을 일으킵니다. 공교롭게도 지드래곤은 ‘불붙여 봐라’, 방탄소년단은 ‘불타오르네’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외에 다른 아이돌들도 그 ‘아이돌’이라는 이름처럼 무대 위에서 뜨겁게 타오르며 숭배해야 할 대상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불과 같은 특이점들을 더 많이 만들어낼수록 관객의 현재의식은 더 멀리 날아갑니다. 이때 “내가 제일 잘 나가”라는 식의 가사라도 들리면 관객은 말 그대로 그 가수가 제일 잘나간다고 믿어버리게 되지요.
잡설이 길었지만 요는, 크리에이터 역시 불구경을 만들어낸다면 무당의 굿판과 같은 당혹감과 집중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해할 수 없으며 경외감이 드는 특이점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말입니다.
한편, 다시 우리의 무당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점집에 들어가 본 분이라면 알 겁니다. 점집의 분위기는 정말 이 세상 분위기가 아닙니다. 기괴한 그림들, 무서운 인형들, 뭐라고 적혀있는지 모르는 붉은 글자들, 이상야릇한 냄새 등은 총체적인 특이점으로 작용해 관객의 현재의식을 벗겨내기 시작합니다. “곧 죽을 놈이 왜 왔어?”라고 쏘아붙이는 무당의 말은 그 당혹과 집중에 화룡점정을 찍습니다. 점집을 찾아온 사람의 현재의식은 저 멀리 뒤편으로 사라집니다. 그래서 점집에 가면 무당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게 되는 거죠.
이런 식의 마인드 컨트롤은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인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표적으로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이 살던 시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단군왕검의 ‘단군’에 무당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주장합니다. 단군왕검이 고조선의 왕이자 제사장이었다는 설이 유력하지요. 실제로 ‘단군’과 발음이 비슷한 단어 ‘당골’이 과거 전라도 지방에서는 무당을 의미했습니다.
이 시기 무당(제사장)들이 사용한 청동거울과 청동검 등 청동기는 대중에게 불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즉, 이해할 수 없는 경외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청동기는 만들기도 어렵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석기보다 그 쓰임새가 떨어지지만, 신비한 푸른빛을 뿜어냅니다. 특히 당시에는 청동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물건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목에 건 청동거울로 태양 빛을 반사하며 푸른빛을 뿜는 칼을 휘두르는 무당. 그것은 분명 전에 없던 특이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현재의식을 마비시킨 상태에서 무당은 “나는 하늘에서 왔다”는 말을 내뱉습니다. 이 말에 사람들은 잠시 무당을 ‘하늘과 지상을 빛으로 이어주는 존재’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