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재미를 만드는 첫 번째 원리인 '특이'를 다뤘다면, 이제부터 올릴 글들에서는 두 번째 원리인 '전의'를 설명하겠습니다. 아재개그와 힙합 펀치라인뿐만 아니라 시(詩)에도 전의의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곧 출간되는 책 '재미의 발견'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누구나 시(詩)가 무엇인지는 압니다. 근데 진짜 시를 알고 있나요?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부터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제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제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이상의 시 「오감도」까지.
우린 학교에서 시에 대해 배웠지만, 시가 명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시란 도대체 뭘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시는 전의(轉意 생각이 바뀜, 의미가 바뀜)를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습니다.
교과서의 정의들을 보면 보통 이런 식으로 돼 있습니다. “시란 자기 생각과 감정을 운율을 빌려 함축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 그리고 부차적인 설명이 많지요. 예를 들어 “운율에는 내재율과 외형률이 있는데, 글을 읽을 때 마치 노래하듯 읽히면 운율이다.” “함축적인 언어에는 비유와 상징 등이 있다. 심상은 어떤 대상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느낌이다.”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과서의 이러한 정의는 몇몇 시들의 몇 가지 특징을 나열한 것일 뿐입니다. 어떤 시는 이러한 정의에 부합하는 반면 어떤 시는 일부만 부합할 수도, 이상의 시처럼 어느 하나에도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됐던 연작시 「오감도」 중 네 번째 시 「오감도 제4호」는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 “진단”, “이상 책임의사 이상”이라는 글을 제외하고 전부 숫자로만 돼 있습니다.
시가 이렇게 모호하니, 급기야 어느 시인은 “시는 모든 것이자 모든 것이 아니다”라는 정의를 내리기에 이릅니다. 모든 것이자 모든 것이 아니라니…. 조금 무책임한 정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이 정의가 꽤 마음에 듭니다. 바로 ‘시 = 전의’라는 사실을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모든 것인 동시에 모든 것이 아니게’ 하려면 그 어떤 것의 의미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예컨대 지금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물 중 하나를 집어 들어 봅시다. 예를 들어 책이라면, 책이 책이면서 동시에 더 이상 책이 아니게 된다고 생각해 봅시다. 일반적인 것이 더 이상 일반적이지 않은 의미로 다가온다면 사람은 당황하고 집중하게 됩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중략)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정지용 「유리창」
이 시는 ‘세상을 떠난 이가 보고 싶어 슬퍼요’라는 의미이지만, 시에 쓰인 단어들과 문장들은 그 의미와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차고 슬픈 것’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시인의 아들입니다. 새까만 밤과 물먹은 별은 단어 그대로 밤이나 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관련 없는 단어가 상징, 비유, 심상, 공감각 등을 통해 뜻밖의 의미를 갖고, 그 전의로 인해 독자는 당혹하고 집중하며, 비로소 시인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시를 정의합니다. “시는 전의”입니다. 혹은 “의미 변화를 만들겠다는 선언”입니다. 어쩌고저쩌고하는 다양한 정의들은 시를 더욱 난해하게 만들 뿐입니다. 전의를 만들기에 독자는 시에 당혹하고 집중합니다. 그리고 독자가 시에 당혹하고 집중함에 따라 시인의 진의(眞意)는 더욱 인상 깊게 전달됩니다.
볼 것이 단어와 문장밖에 없던 시절, 시인은 인기 크리에이터였습니다. 과거에는 모두가 시인의 펜을 주목했습니다. 김수영 같은 참여시인의 시는 정치인의 연설보다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독자는 시가 담고 있는 슬픔이나 외로움에, 또는 무거운 정치적 주장에 당황하고 집중했습니다. 시가 곧 당혹과 집중을 일으키는 ‘전의’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날 시는 영상과 융합해 격차 큰 전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드라마 <도깨비>에 등장한 김인욱 시인의 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계집애가/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순간, 나는/뉴턴의 사과처럼/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떨어졌다//첫사랑이었다.” (김인욱 「사랑의 물리학」)
주인공 공유가 이 시를 읊으며 사랑하는 김고은을 바라보자 시가 만드는 전의(의미 변화)가 영상화됐습니다. 문자를 넘어 시각화된 시의 전의는 시청자에게 더욱 큰 당혹감과 집중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읊는 장면은 공유가 첫사랑에 빠지는, 즉 주인공에게 격변이 일어나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이 장면이 <도깨비>의 수많은 장면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장면이 된 이유입니다. 영상의 시대에 걸맞은 시의 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