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시간, 초단편 소설 쓰기
슥- 슥- 슥- 슥-
이상한 소리에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김민석은 눈을 비볐다.
주변에는 자기 뺨을 때리거나 몸을 꼬집는 사람도 있었다.
꿈은 아니었다. 투명한 가을 하늘에 반투명한 형체가 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커다란 빔프로젝터를 하늘에다 대고 쏘기라도 한 것처럼.
하늘의 거의 절반을 메운 그 형체가 무엇인지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형체가 책상 위에서 펜을 잡고 무언가를 쓰고 있는 남자임을 알아보았다.
어느 세계 명작 소설의 작가 소개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서양인의 얼굴을 한 그 남자는, 종이에 무언가를 쓰다가 읽다가, 또 쓰기를 반복하더니 갑자기 책상을 내리치며 화를 냈다.
"재미없어서 읽을 수가 없네, 클리셰투성이야."
이 말을 끝으로 남자의 형상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김민석은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뒤이어 믿기 힘든 현상이 일어났다.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3D에서 2D로, 얇은 종이로 변하기 시작했다. 종이로 변하는 데서 끝이 아니었다. 손끝 발끝 머리카락끝, 끝에서부터 시작해 완전히 종이가 된 몸은 갑자기 구겨지거나 갈가리 찢어졌다.
"종이에 베이는 것 같아"
김민석의 바로 옆에서 종이가 돼 찢긴 사람이 남긴 마지막 말.
몸이 사정없이 찢길 때마다 구겨지듯 일그러진 표정은 그 고통이 어떤지 상상하게 했다.
거리에는 찢긴 종이들이 흩날렸다.
'종이화'라고 불리게 된 이 기현상은 한 달 넘게 지속됐고, 뉴스에서는 온통 그 이야기였다.
"한 달 만에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종이가 돼서 구겨지고 찢겼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피해가 더 있을지... 참으로 공포스럽고 참혹한 상황인데요. 전문가 모시고 인터뷰 나눠보겠습니다. 장 박사님, 지금 이 사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종이화의 원인은... 저 역시 당최 알 도리가 없지만은... 한 달 전에 사건이 하나 있었지요."
"하늘에 나타난 남자, 남자의 형체 말씀이시지요?"
"예, 그 남자가 했다는 말이 마음에 걸립니다. 또 그 남자가 무언가를 종이에 적고 있는 모습이기도 했고요... 저는 아마도 그 무언가가 소설인 것 같고요..."
"소설이다, 죽지 않으려면 클리셰를 깨야 한다, 세간에 이런 말이 퍼졌더군요."
"예, 사실상 지금 종이화가 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집, 학교, 집, 학교, 혹은 집하고 직장만 오가는, 어떻게 보면 단조로운, 지루한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거든요..."
"재미없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종이가 되는 거다?"
"클리셰라는 것이, 그 정의를 찾아보면, '반복되어 사용돼 진부하거나, 예측 가능한 상황이나 표현, 결말, 캐릭터 같은 것'이 거든요. 한마디로 표현하면 진부한 겁니다. 저도 믿기 힘들지만..."
"어쩌면 우리가 모두, 작가가 쓰는 소설 속에 살고 있고, 우리 삶이, 이야기가 지루하니까 작가가 구겨서 찢어 버린 거다?"
전문가들조차 '어쩌면, 아마도'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지만, 사람들이 종이가 돼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은 막연한 환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인류가 정말 소설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점차 확신이 돼 갔다.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 나간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렇게 믿기 시작했는데,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미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사랑했던 이들은 사람이 아닌 종이 위 글자였다고, 소설 속 아이디어였을 뿐이라고.
인생이 소설일 뿐이라는 생각은 많은 이들에게 어떤 허무함을 불러일으켰다.
김민석의 친구들은 노력해서 살아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취업 준비를 포기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철학과 출신들 다웠다. 심지어 한 친구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간의 삶이 고통이라고 여겼던 이들은 오히려 종이화가 축복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저 종이가 되는 짧은 고통 끝에 아무 의미도 없는 '무'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며 내심 종이화를 기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종이화는 어떤 이들의 삶에는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살아남았음은 곧 신께 선택받은 것이며, 클리셰를 깨는 행위에는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소설에서는 작가가 곧 신이라면서, 작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작가를 신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클리셰를 깨는 것을 제1의 가치로 삼았다.
신을 믿지 않는 이들은 고통을 동력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종이화가 된 사람들이 죽어갈 때 너무 고통스러워 보인다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클리셰를 찾고, 깨는 데 몰두했다.
허무함을 축으로, 고통을 동력으로, 어떤 이들은 불법적인 쾌락을 추구하기도 했다.
"이 세상이 소설이라면 지옥도 없어!"
범죄자들이나 원래 범죄를 저지르고 싶었던 자들은 굉장히 당당해졌다. 마치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기라도 한다는 듯이.
다만,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악인에게 당하고만 살지는 않았다. 미디어에서는 자신에게 가해하는 이에게 거리낌 없는 폭력으로 되갚아주는 사람들이 화제가 됐다.
그중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 소설인데 복수가 어떻게 죄가 됩니까."
클리셰를 깨야 한다는 사람들은 또, 무슨 짓을 해서라도 클리셰를 깨야 한다는 부류와, 선을 넘지 않는 방법을 추구해야 한다는 부류로 크게 나뉘었다. 슬프게도 후자에서 더 많은 종이화가 진행되는 것으로 보였다.
"나, 나는 죄가 없어!"
지하철 안의 김민석은 저 남자는 어떤 부류일까 생각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 남자는 횟집에서 가져온 듯한 날카로운 칼을 휘둘러댔다.
남자가 칼을 휘두르기 전까지 발 디딜 틈 없던 만원 지하철이었지만, 이제 남자가 탄 칸에 남은 사람은 김민석을 포함해 열 명 남짓이었다. 전부 휘둥그레진 눈으로 벽에 바짝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눈물에 종이화가 진행된 얼굴이 젖어 너덜거렸다.
"나, 나는 시키는 대로 하고 있을 뿐이야! 작가가, 작가가... 내가 갑자기 살인이라도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클리셰가 많다고..."
남자는 지하철이 멈추고 들어온 경찰 특공대에 제압돼 플랫폼으로 끌려 나왔다.
한데, 등 뒤로 수갑이 채워지자마자 손목이 찢어지더니, 곧바로 온몸이 구겨져 버렸다.
현장에 남은 건 남자가 입고 있던 옷과 신발, 칼, 그리고 종이조각뿐이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음을 확인한 경찰 중 하나가 김민석에게 질문했다.
"현장에 계셨죠? 저 남성분이 갑자기 칼을 휘둘렀나요?"
경찰이 고갯짓으로 남겨진 옷과 종이를 가리켰다.
플랫폼 의자에 멍하니 앉아 그것들을 바라보던 김민석은 많이 놀라셨느냐는 경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가 놀란 이유는 묻지마 칼부림 때문만이 아니었다.
남자가 완전히 종이가 돼 갈가리 찢기기 직전 김민석은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그건 분명 전에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같았다.
"하... 그래도 주인공이면 착해야지."
중얼거리는 김민석 쪽으로 경찰이 귀를 갖다 댔다.
"네? 뭐라고요?"
경찰은 되물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하고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김민석과 같은 지하철 칸에 있던 이들이었다.
"저도 들었어요. 그 말."
"'그래도 주인공이면 착해야지'라고 했어요. 한숨 쉬면서."
"저만 들은 게 아니네요?"
"저도 들었어요."
대한민국의 지하철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몇 시간 만에 전 세계에 보도됐다. 두 달 전 하늘 출현 사건 이후 처음으로 전해진 작가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야말로 작가의 의도가 명확해졌다고 세상이 떠들썩했다.
작가가 클리셰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명백해졌고, 또 한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범죄율이 극적으로 줄었습니다. 교정직 공무원을 줄이는 법안이 통과될 정도로 급격한 수치 감소입니다."
지하철 테러범이 별 특별할 것 없는 중년 직장인의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내심 자기도 소설의 주인공일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휩싸였다.
"제가 엑스트라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주인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쩌면 작가는 우리 모두를, 한 명 한 명을 주인공으로 하는 옴니버스 소설을 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이 소설이라는 생각은 허무주의를 일으켰지만, 자신이 주인공일 수 있다는, 그 새로운 씨앗은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클리셰를 깨는 삶을 살아서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싶어요."
"지금까지 너무 재미없는 삶을 살아왔어요. 변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고, 용기를 내야 할 것 같아요."
지구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용기가 부족하거나 형편이 어려워 시도하지 못했던 일을 감행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김민석 주변의 어떤 이는 50의 나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자식들에게는 비밀이라고 했다. 할머니와 아마존 밀림 모험을 떠나는 이도 있었다. 모든 생업을 관두고 우주 진출에 도전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어쩌면 이런 좋은 변화들이 신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모습이겠지요."
독특한 방식으로 클리셰를 깨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거리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그 음악을 끄고 다녔다. 자신이 음악을 살해하는 요괴라고 했다.
한 생물학자는 자신이 합성한 생물을 신체 일부에 이식해 공존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닭 대신 독수리를 사냥해 튀겨 먹었다.
자발적으로 누군가의 노예가 되는 이도 있었다.
기억을 지우는 수술을 받았다고 밝힌 사람도 있었는데 사실은 연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공간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고 생각해 서로 집을 바꿔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인생에 적극적인 변화를 꾀하고, 어떤 의미를 만들고자 했다.
어딘가 있을 작가에게, 누군지 모를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나이가 많거나 병이 들어 몸을 움직이기 힘든 사람들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클리셰를 깨려 했다.
한 잉꼬부부는 동반 안락사를 선택했다.
동면 장치에 들어간 사람들도 더러 있었는데, 자신들이 주인공이라면 반드시 미래에 깨어날 것이라고 했다.
클리셰를 깼다고 생각했지만 종이가 된 사람들도 많았다. 범죄 조직에 들어간 경찰, 경찰이 된 범죄자는 모두 종이화 했는데, 혹자는 이들이 잡혀서 감옥에 갔기 때문에 더 이상 클리셰를 깰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어 종이화 했을 거라고 추측했고, 혹자는 그러한 이야기가 숱한 영화나 소설에서 다룬 클리셰라고 지적했다.
무대 위에서 수음을 하던 코미디언이 종이로 변해 자신의 체액에 젖어 찢어지는 일도 있었는데, 혹자는 네덜란드에 이미 그런 쇼가 많고, 심지어 라이브 섹스 쇼가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다고 말했다.
어떤 단체는 두 팀으로 나뉘어서 장기간 의미 없는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 중에 대부분이 종이화 했다.
아무리 참신한 시도이더라도 반복되면 종이화를 일으켰지만, 그 반복의 횟수나 비율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모두가 이 난리 통에 동참한 건 아니었다.
내성적이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결코 주인공일 리 없다고 여겼다. 그간 어떤 콘텐츠에서도 자신과 같은 주인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옴니버스 소설에도 주인공이 있으면 엑스트라도 있는데 모두가 주인공일 수는 없죠."
의도적으로 클리셰를 깨려는 노력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클리셰를 깨려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클리셰를 깨지 않는 것이 곧 클리셰를 깨는 일이라고 했다. 김민석이 아는 한, 이 시도를 한다고 밝힌 다섯 사람까지는 살았으나, 여섯 번째부터는 종이가 됐다.
"작가 맘이지 뭐."
전문가는 김민석을 힐끗 보고 서류를 뒤적였다.
그는 그동안 방안에 틀어박혀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종이화 하지 않았지만, 최근 오른 손발이 점차 종이로 변하기 시작하자 클리셰 전문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물에 젖어 찢어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의 앞에 앉은 전문가가 상담을 받기 위해 늘어선 긴 줄과 시계를 쳐다봤다.
클리셰 깨기가 국가적인 경쟁력이 된 상황에서, 정부는 전문가들을 고용해 전 국민이 주기적으로 상담을 받게 했다.
대통령은 이 정책을 발표하는 대국민 라이브 방송 중 코를 파고 소변을 봤는데, 홍보실에서는 대통령이 종이화하는 안보 위기를 막기 위해 전문가에게 조언받은 대로 행동한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생방송에서 특이한 행동을 했고 덕분에 정책 홍보 효과가 컸다.
"운명을 거슬러야 해요."
전문가가 계속 서류만 들여다보며 말했다. 서류는 김민석의 인생 전체를 나열한 자기소개서였다. 일반적으로 전문가가 인생 전체의 장르와 플롯을 분석해 클리셰를 깨는 방법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상담이 진행됐다.
첫번째 상담 때 김민석은 전문가가 한때 TV에 많이 나왔던 유명한 소설가임을 알아봤다.
클리셰 전문가들은 대부분 작가나 광고 기획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이들이었다.
작가나 기획자 같은 특정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특별히 클리셰를 깨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종이화 하지 않았다. 항간에서는 그들의 일이 그 자체로 클리셰를 깨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물론, 작가가 작가를 편애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곤 했다.
"바로 전에 상담한 분인데, 이 분과 본인 누나를 공유해보세요."
김민석의 귀에 옆 부스 전문가가 하는 말이 들렸다.
김민석이 말했다.
"매주 여자가 있는 모임에 나가는데도 종이화가 멈추지 않아요. 저 이제 어떡하죠?"
김민석이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종이가 된 손가락 첫째 둘째 마디가 팔랑거리며 늘어졌다.
"이런, 한 시가 급하네... 이러다 갑자기 종이 되는 거 알죠? 민석 씨 같은 오타쿠... 아니, 미안해요. 너드, 너드 장르에서는... 평생 솔로로 늙어간다는 클리셰를 깨야 돼.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말했죠?"
"저, 절 만나겠다는 여자가 없는데 어떡해요..."
김민석을 불쌍하게 쳐다보던 전문가는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스마트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눈이 너무 높아서 모태솔로인 여자분이 있는데... 그분도 종이화가 꽤 진행돼서 급하거든요? 바로 만나보시면 되겠네."
전문가는 전화를 끊자마자 약속 장소를 적어줬다.
"지금 기다리고 있다니까 바로 가봐요."
"소, 소개팅을 하라고요?"
"여자하고 대화하는 걸 힘들어 하는 건 알겠는데, 뭐가 됐든 종이가 되는 것보단 낫잖아요? 한 시가 급합니다. 화이팅!"
김민석은 일부러 네 발로 걷다가 세 발로 걸으며 소개팅 자리로 나갔다. 발가락 첫째마디가 종이가 되서라기보다는, 두 발로 걷는 건 클리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페에 들어선 김민석은 소개팅 상대로 아빠가 나왔다며 화를 내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남자에게 손을 밟힐 뻔했다.
카페에는 전문가가 보여준 사진대로 굉장한 미인이 김민석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김민석이 자리에 앉자 자신을 커플 브레이커라고 소개한 남자가 어느새 다가와서 훼방을 놓았다.
"아니 이런 못생기고 뚱뚱한 남자랑 소개팅하다니 제정신이세요?"
남자는 옆에서 그의 단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김민석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여자는 그 커플 브레이커를 다소 과격하게 밀치더니 "고마워요, 사랑해요."라고 말하며 갑작스레 김민석의 얼굴을 잡아 키스했다. 그의 볼에 반쯤 종이인 그녀의 손이 느껴졌다.
첫 만남에 다소 과격한 키스가 이어지고, 꽤 긴 키스 끝에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저... 사실... 그동안 전염병 때문에 남자를 못 만났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종이화가 돼니까... 너무 무서워서..."
"저, 전염병이요? 무슨, 무슨 병이죠?"
"전문가가 말 안 해주던가요? 계속 잘 치료만 받으면 죽지는 않아요. 아... 모르셨어요? 정말 미안해요."
김민석은 앞에 있던 아이스아메리카노로 연신 입을 헹궈내며, 그녀가 확실히 클리셰를 깼다고 생각했다. 종이였던 그녀의 손가락에 살이 차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그가 클리셰를 깰 차례였다.
그가 여자 옆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저랑 결혼합시다."
김민석은 여자가 고백을 받아들일 것을 확신했다. 그녀는 한 마디를 남기고 돌아온 손가락을 보고 기뻐하고 있었다.
"네! 해요, 결혼!"
그 대답을 끝으로 김민석의 손가락에도 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발가락에도 힘이 돌아와, 애쓰지 않아도 두 발로 제대로 설 수 있었다.
"도, 돌아왔다. 돌아왔다! 와하하하"
기분 탓인지, 그는 세상이 밝아 보인다고 느꼈다.
마치 커튼 틈 사이로 태양이 비추는 것처럼, 온 세상의 틈이란 틈에서 전부 빛이 새어 나오는 기분이었다.
비라도 내리려는지, 흐린 하늘에 멀리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도 그랬다.
김민석과 여자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다가 웃다가 하는데, 어라?
그의 앞에서 갑자기 여자의 몸이 세로로 여러 번 잘렸다.
놀라 어쩔줄 몰라 하던 김민석은 자기 몸도 세로로 조각 조각 잘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방에서 공사장에서 들릴 법한 기계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울려왔다.
위이이잉,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하늘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개연성이 하나도 없어서 더는 쓸 수가 없네, 병맛이라서 읽을 수가 없어, 개연성이 하나도 없어..."
작가는 책상 위 원고를 전부 집어 파쇄기에 넣고 갈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