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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렘 Dec 31. 2019

이별 전에도

타의에 의한 준비 

이별 전에도 사실 준비를 했다. 

좋은 순간에도 그래서 조금은 슬펐다. 


'창밖으로 손 흔들어주는 아빠의 배웅을 받는 이 순간도 오래 가지 않겠지'

'아빠랑 낚싯대를 같이 던지는 이 순간도 언젠가 그리워지겠지'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된다. 

그냥 좋은 순간은 그대로 좋아하기만 했더라면 좋았을 걸. 

그냥 행복한 시절은 그대로 행복해하기만 했더라면 좋았을 걸. 

이런 식으로. 


아빠를 보러 한 달에 한 번은 고향집에 내려갔다. 

도저히 여력이 안 되서 한 주씩 미뤄지는 때도 간혹 있었지만 

당시 아빠는 동네 사람들과도 자주 왕래하는 편이 아니었고 

친척들도 없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어쩌면 많이 외로웠다.


내가 가지 않으면 끼니도 대충 떼우고 마는 것 같아 

아빠가 보고 싶은 마음 반, 아빠가 애처로운 마음 반으로 

매달 마지막주는 왕복 여덟시간을 도로에서 보냈다. 


짧은 2박 3일 혹은 3박 4일을 아빠와 고향집에서 보내고 나면 

다리도 성치 않아 점점 중심을 잡지 못하는 오토바이를 타고 

나를 꼭 버스정류장 혹은 기차역까지 데려다주었다. 


아빠 방식의 사랑법이었다. 

버스가 떠나기 전까지 내가 어느 자리에 앉았는지도 모르면서 손을 흔들어주고 

기차가 떠나기 전까지 내가 어느 자리에 앉았는지도 모르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 보일 때까지. 

나도 아빠가 안 보일 때까지 그랬다. 


그때부터 아빠가 찾기 쉽게 버스는 꼭 맨 앞자리에 앉았다. 

기차는 꼭 창가 자리 그리고 아빠가 손 흔드는 건널목 그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칸으로 골라 예매했다. 

대개 3호칸이었다. 


내가 아빠 사랑을 잘 받고 있다는 걸 아빠한테 알려주고 싶었다. 

그 사랑이 여전히 나에게 잘 와닿고 있다고 

나도 아빠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는 걸로 말하고 싶었다. 


이렇게 글에서 아빠 타령을 하는 것도 꽤 오랜만이다. 

쓸 때마다 울어서 별로 쓰고 싶지가 않았다. 

기억은 해야겠고 울기는 싫고 해서 그냥 관뒀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안 울고 쓸 수 있겠지 싶어서. 

그런데 또 기억을 더듬어 글로 토해내자니 

어떻게 알고 눈물이 먼저 난다. 


나에게는 아빠가 아직도 애잔한가보다. 

오십줄에 얻은 막내딸을 아빠가 너무 사랑해주었다. 

엄마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지만 

20대 초반에 헤어져 그 사랑이 조금은 덜 슬프게 느껴진다. 

내 기억속의 엄마는 아줌마였는데 

내 기억속의 아빠는 할아버지여서 그랬을까. 


어쨌든 은근히 기대를 해본다. 

이 글들을 쓰고 쓰고 또 쓰다보면 

아빠 이야기를 할 때도 눈물이 덜 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 

엄마 엄마 속으로 불러볼 때도 가슴이 덜 먹먹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기대는 늘 기대만큼 충족되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럴 것 같다. 

밑져야 본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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