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유배생활 in Michigan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보통에 비해 오랫동안 외할머니와 보고 지냈으니 아직 살아계셨더랬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다만, 오랜 시간 함께 지내온 만큼 먹먹함 또한 크게 밀려온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다. 올해 계단에서 넘어지셔 머리와 다리를 다치시고는 가파른 계단 있는 집을 혼자 계실 수가 없어 요양병원에 가시게 되었다. 아흔이 넘으시도록 자식들이 모두 가까운 곳에서 할머니를 보살폈고 우리는 특히 친정 엄마와 가까이 살았기에 손주로서 더 자주 뵈었다. 그래도 핀잔을 주시고 불만이 많으셨던 할머니께 엄마와 이모들은 "엄마는 우리가 이렇게 가까이 있고 자주 보는 게 복인 줄 알아!"하고 되려 핀잔을 주셨는데 그걸 차마 못 느끼시는 듯한 할머니께 마지막 자식을 소중함을 느껴보라는 듯, 할머니께는 가혹한 벌을 내리셨다.
요양병원 몇년씩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뭐.. 했지만 인간의 행복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 아니던가. 자식들의 보살핌 속에 관심받고 사시던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가시고는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셨다. 안 그래도 병원도 답답한데 코로나 때문에 면회도 자유롭지 못하니 자식들이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던 할머니는 반년이 채 되지 않아 돌아가시고 말았다.
우리 외할머니는 매년 어린이날이면 손주들을 모두 불러 피자를 사주시고 어린이 회관에 데리고 가셨다. 모든 사촌들은 대구에, 나는 구미에 살 때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대구로 이사오고는 중학생이지만 피자모임에 합류했다. 너무 좋았다. 피자를 먹는 행복보다 외할머니 주최 어린이날 행사에 함께 할 수 있음이 더 행복했다. 외할머니는 깨이신 분이셨다. 가끔은 이모나 엄마보다 기억력이 더 좋아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2006년 월드컵때는 같이 티비를 보다가 할머니의 분석력에 놀란 적도 있다. 우리를 위해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셨다. 요양병원에 가시기 전까지 모든 자식 손주 이름을 다 기도목록에 넣으셨다.
미국에 와서 사는 것은 다 똑같다라고 느꼈었다. 나는 밥을 하고 집안일을 하고 일하러 직장에 가고 애들을 살폈다. 떠나보낸 사람에겐 자리가 클지라도 나는 바빠 그리움도, 적응이라는 단어도 잘 생각이 안 났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한국과 너무 큰 거리감이 느껴졌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 기쁠 때 슬플 때 보고싶을때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이 이런 느낌이었구나. 먹먹함이 밀려온다.
이 여정이 길어질 지라도 부모님께서 건강하실 때 꼭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이 먹어지었다.
할머니 그 동안 고생하셨어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시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