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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제이 Nov 01. 2021

하루 한 장, 그림일기 - 종이 위에 남겨진 것들

176일. 모니터 위의 텍스트는 흐른다.

요즘엔 잠들기 전이나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 스마트폰의 메모장을 켭니다.

짧게 기억을 적어둡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타이핑은 흐르는 거구나'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 것. 그리는 것은 조금 다르구나 싶은 생각.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지만 마치 유레카처럼 마음이 외쳤습니다.


생각이 흐릅니다.

타이핑을 하는 것과 종이에 글자를 적는 것

무엇이 다를까요?


타이핑되는 글자들은 흐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이 흐르듯 글자들도 흘러갑니다.


백스페이스는 무심하게 모든 것을 쉽게 지워버립니다.

아마도 타이핑이 되고 있는 글자들은 벌벌 떨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백스페이스가 언제 뒤를 밟아 지워버리고 속수무책으로 무로 돌아갈 것이 자명하니까요.


보통 타이핑된 글을 읽다가 맘에 들지 않은 문장이라던지, 더 괜찮다 여겨지는 문장이 있으면 바로 삭제 후 다시 쓰니까요. 남아있는 건 맨 마지막의 생각일 겁니다.

아마도 그마저도 언제 사라질지 모를 운명에 놓여있습니다. 맘에 들지 않았다면 말이죠.


잉크는 종이에 스며들어 깊은 자국을 남깁니다.

종이에 남겨는 글자와 그림은 흐를 수가 없게 됩니다.

때때로 쫙쫙 그어진 선들 아래 포진할 수는 있겠지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다 보니

흘러간 어떤 노트에는 꽤나 멋진 말들이 적혀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까지 미칩니다.


지나간 스케치북을 봐도 어떤 생각을 하며 그렸을지 모를 꽤나 맘에 드는 것들이 나오곤 하거든요.


이건 아니야 라며 구겨진 종이에도

넘겨버렸을 어느 구석에도 다시 살펴보면 지금은 떠올리지 못할 것들이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는 떠올리지 못할 명문이 어딘가에 숨어있을지도... ㅎㅎ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가지고 다니는 물건 중엔 언제나 무지 노트와 펜이 있었습니다.

그냥 노닥거릴 때도 노트에 무심결에 낙서를 하거나 문구를 적거나 그런 용도였고

직업상 러프 스케치를 할 일이 많아 늘 가지고 다니는 물건 중에 하나였죠.


아이패드를 쓰고부터는 그것이 너무 용이하기에 최근에는 노트를 잘 안 가지고 다닙니다.

아이패드에 스케치를 하고 실제 수작업을 하고 이런 식인데 그러다 보니 아이디어 과정 스케치가 사실 많이 남지 않습니다.

스케치하면서 수정이 용이하니깐 계속 지우고 다시를 반복해서 스케치를 완성을 하니까요.


반대로 수작업을 하다가 때때로 C+Z나 손가락으로 종이를 두 번 따닥하기도 한답니다.

엄청난 무의식의 행동인데 매우 자연스럽다는 것이 함정이죠. 그리고 탄식을 하기도 합니다. 왜 이전 단계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인가라며...ㅎㅎ


뜬금없지만 사람이란 게 얼마나 환경에 쉽게 익숙해지는 동물인가 싶은 것이

저는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읽으며 자란 세대라 예전에는 서류작성 말고 제 생각을 쓰려면 타이핑보다는 종이가 훨씬 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타이핑으로 문장을 만드는 것이 매우 어색했거든요.

읽는 것도 마찬가지로 종이가 훨씬 편하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좀 다릅니다. 종이의 감촉을 느끼면서 읽는 쪽이 더 즐겁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공부도 그러했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지 싶을 정도로 디지털 디바이스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런데 지난밤 잠들기 전에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니 종이에 메모를 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이 너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겁니다.

노트에 남겨져 있는 것들은 생각의 흐름을 흔적으로 남기고 찰나에 만들어진 반짝임이 남겨질 가능성이 높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느 날 차르륵 넘겨보면 꽤나 즐거운 탐험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이 위의 메모도 소중하게 여겨야겠다고 다짐해 보는 밤입니다.

무지 노트 다시 들고 다니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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