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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관한 書

by inome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믿음이 절실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하루를 살아내야 했고, 내일을 예측할 방법이 없었다. 병은 이름도 없이 퍼졌고, 싸움은 이유 없이 터졌으며, 굶주림은 말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하늘은 그 어떤 징조도 남기지 않았다. 밤이 되면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었다. 세상의 이치와 변화의 원리, 사건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신뢰 없이는 삶을 지탱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 질서를 찾아 나섰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이지 않더라도 길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 의지는 불확실성을 잠시 감싸 안아주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신의 뜻을 해석하며 점성술과 점복에 의존했고, 인간은 그 예측이 맞는지 틀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일 강이 범람할 때 이집트인들은 기쁨과 두려움 사이에서 천문을 기록했다. 신의 분노를 달래야 한다는 믿음과, 실질적인 계산 사이의 경계는 흐릿했다. 인간의 이해는 언제나 신념과 관념을 따라 움직였다. 그 믿음이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잔혹했다.

중세 유럽에서 믿음은 교회의 권위를 지키는 도구가 되었다. 교회는 마녀와 악마에 대한 공포를 교리와 결합했고, 사람들은 기근과 질병, 자연재해 앞에서 불행의 원인을 마녀와 악마의 탓으로 돌렸다. 의심받은 사람들, 대부분 사회적 약자, 특히 여성들이 대상이었다. 그들은 쉽게 고문을 다했고 허위 자백으로 처형당했다. 믿음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집어삼켰다. 사람들은 그것이 정의라고, 그것이 질서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리고 언젠가 신앙만으로는 세상을 읽을 수 없고, 관념만으로는 삶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삶은 계속되었고, 믿음은 그때마다 달라졌다. 상황이나 조건이 아니라, 변치 않는 최소한의 신뢰. 그제야 숫자가 비로소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아름답지 않았던 언어. 하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손에 잡히는 실체였다. 기록되고, 계산될 수 있는 것. 전염병의 경로, 곡물 가격, 사망자 수 같은 것들. 숫자는 추상적인 관념이나 신념이 아니라, 세계의 움직임을 읽고 예측할 수 있는 도구였다. 느리지만, 확실했다.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려는 가장 조용하고도 치열한 노력의 상징으로 적합했다.

관념과 추상의 시대는 이제 실증과 경험의 시대로 넘어갔다. 종교와 철학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숫자와 과학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물론 사람들은 여전히 믿음을 필요로 하고, 여전히 해석을 갈망한다. 하지만 숫자는 최소한,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을 제시했다. 세계를 흔드는 불확실성 속에서 인간이 찾아낸, 가장 투명한 지표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숫자로 세상을 읽어내는 시대가 오자, 사람들은 안도했다. 오래전부터 감각적으로만 느껴왔던 혼란과 불확실함을 이제는 도표와 수치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너무 어두워 손댈 수 없던 영역들까지 조금씩 윤곽을 드러냈고,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오류인지 구분하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숫자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반복해 기록할 수 있으며, 서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정돈된 목록과 표, 도시의 사망자 수, 전염 경로, 곡물의 가격 같은 자료들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실체로 여겨졌다.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최소한의 질서와 안전을 제공한 것이다. 말보다 느리지만 더 정확한 방식으로 세계의 흐름을 읽으려는 인간의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었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통제할 수 없는 삶을 해석하고 방향을 정할 작은 단서를 얻었다.

이 과정에서 감정에 의존하는 일은 줄었고, 근거 없는 추측이나 과장된 예감은 설 자리를 잃었다. 대신 통계의 분포와 평균이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논리는 강력했고, 확신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확신이 지나치게 강조될 때,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지, 세상을 어떤 의미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같은 질문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신뢰하는 태도 속에서 내면과 도덕, 삶의 신비로움은 점차 희미해졌다.

때로는 감정의 역할이 축소되었고, 논쟁은 줄었으며, 도덕이나 신념의 자리는 공허한 수사로 치부되기도 했다. 삶의 이유조차 숫자로 환원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숫자는 더 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어떤 이들에게는 새로운 신앙처럼 기능하기 시작했다. 불확실성을 견디는 인간적인 힘은 약화되었고, 수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지표는 존재의 다양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삶을 서열화하고, 옳고 그름을 하나의 기준으로 가르려는 방향으로 쓰였다. 심지어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문제에도 통계적 기준이 적용되면서, 복잡한 내면과 감정이 지나치게 단순화되는 경우가 생겼다. 정신적 고통마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으로 측정 가능하다고 여겨진 것이다. 하지만 때론 평균은 분포를 설명하지 못한다.

같은 숫자라도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 얼마든지 개인, 소규모 집단, 혹은 국가 단위에서조차 숫자를 달리 읽을 수 있었다. 해석의 방향은 종종 힘을 가진 자에게 유리하게 기울었고, “대체로 그렇다”는 말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그렇게 숫자는 새로운 믿음의 체계로 자리 잡아갔다.

실제로 숫자와 통계는 자주 한계와 오류를 드러냈다. 1970년대의 오일 쇼크, 2008년의 금융 위기,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모두 인류의 삶을 극적으로 뒤흔들었지만, 그 어떤 지표도 이 사건들을 사전에 정확히 예측하거나 결과를 완벽히 설명하지 못했다. 정치적 불안정, 인간의 비윤리적 행동, 자연재해, 대규모 전염병 같은 요인들이 서로 얽히며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패턴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반복되었지만, 근본적으로 변화의 방향을 미리 알아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때로는 작은 파동이 예기치 못한 거대한 격변을 불러왔다. 흔히 말하는 ‘나비 효과’처럼, 한 번의 사소한 사건이 돌이킬 수 없는 연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오늘날 국민소득, 주택보급률, 결혼 평균 연령, 평균수명, 저축률, 해외여행 횟수, 신입사원 평균임금 같은 수치들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와 개인의 삶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지표이지만, 언제부턴가 그것들은 사회적 위계와 계급을 나타내는 기호가 되었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으로 사용되곤 한다. 데이터가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인다 해도, 그 해석은 누군가의 판단이다. 오래전에 읽은 책, 무의식 속에서 쌓인 확신, 불가피하게 설정한 전제들—이런 것들이 숫자의 의미를 결정한다. 데이터는 숫자이지만, 결론은 사람이 내린다.

통계는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사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이 단순한 사실 조차도 잊어버린 것 같다. 더 많은 데이터를 모아 더 정교한 모델을 세우면, 모든 오류를 견딜 수 있으리라는 새로운 믿음의 세계를 열고야 만다. 정치 지도자들도, 마케팅 전문가들도, 저마다 자기 손에 쥔 숫자를 증거처럼 흔든다. 무엇을 해야 하고 포기해야 할지 정하는 유일한 언어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숫자라는 믿음은 더욱 단단해지고, 그것이 거짓일 리 없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설명하려 노력할수록 통계는 그저 인간 사회의 표면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수치로는 결코 드러낼 수 없는 감정과 문화적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과적 연결고리들 사이에는 수많은 빈틈이 있고, 그 틈새는 상상력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미래에 일어나는 일들은 과거의 미세한 원인들, 이를테면 누군가의 사소한 거짓말이나 무심코 내린 선택, 혹은 탐욕에서 비롯된 결정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작은 요인들은 처음엔 별것 아닌 듯 보여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잠재력을 품고 있다. 하지만 통계는 이러한 세밀하고 복합적인 원인들을 완벽히 포착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의 삶 전체를 통계로 담아낼 수 없다.

특정 시점이나 범위에서의 흐름과 연결 구조를 완전히 반영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강조된 일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맹신함으로써 놓치게 되는 더 중요한 맥락과 의미다. 통계에만 사로잡히면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려져,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워질 위험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후회한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그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처음부터 과거와 현재를 이어붙이며, 그 틈새를 들여다보는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실수는 사라지지 않고, 후회는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다가 어느 날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 길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단순히 장면을 다시 보는 일이 아니라, 흩어진 자신을 주워 모아 다시 짜 맞추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일이다. 그러나 오래도록 붙잡아온 믿음을 고친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그것은 논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감정과 기억, 그리고 굳어진 습관이 얽혀 있어 때로는 어떤 이치도 뚫지 못할 만큼 단단하다.

종교든 과학이든 관념이든 숫자든, 그것이 믿음으로 굳어지는 순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왜 사람은 믿음에 매몰되고 마는 걸까. 믿음을 바꾼다는 것은 곧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과정은 아프고, 견디기 힘들 만큼 혼란스럽다. 자신을 지탱해온 믿음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순간, 그 위에 쌓아올린 자아와 정체성까지 흔들린다. 그럼에도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언젠가 깨닫게 된다. 그 혼란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리에 도달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사람은 그렇게 과거를 인정하고, 서툴게나마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법을 배워간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아마도 그 질문은 무엇이 옳은가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가깝다. 믿음은 한 번의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늘 조금씩 모양을 바꾸며 흘러간다. 믿음은 새로운 변화나 세상에선 언제나 흔들리는 법이다. 그래서 새로운 믿음을 찾는 노력은 진리에 다가가려는 용기이자, 유연함인지도 모른다.

유연함은 아주 작은 틈에서 자란다. 바람이 스쳐가는 소리, 누군가의 말끝에 머뭇거리는 침묵 같은 것들. 그래서 태도가 중요하다. 무엇을 믿는가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믿는가. 의심을 품되, 그 의심이 다정할 수 있다면 더 좋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더 잘 이해하려는 의심. 우리가 던지는 모든 질문은 결국 더 오래 바라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수치로 요약된 세상은 분명 어떤 사실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숫자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예측이 빗나간 자리에서 인간은 다시 길을 만들었다. 숫자가 닿지 못한 곳에서 새로운 선택이 태어났고, 그 틈이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

세상은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은 다른 사건과 연결되고, 그 연결은 다시 다른 결과를 낳는다. 연쇄는 단선적이지 않고, 시작점조차 분명하지 않다. 시간과 공간뿐 아니라, 사건의 얽힘과 그 주변의 맥락까지 고려해야 겨우 어렴풋한 ‘이해’에 닿는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앎조차 유효기간을 가진다. 오늘의 확신은 내일의 오해가 될 수 있다. 알았다고 믿는 순간, 모르는 것들은 그늘로 밀려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확신 대신 의심을, 판단 대신 여백을 선택해야 한다. 안다는 말은 닫힌 문일 때가 많지만, 모른다는 고백은 문을 여는 힘이 된다. 변화는 그 열린 틈에서 시작된다.

완벽한 사실에 도달하는 길은 없다. 다만 그 사실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너무 세게 쥐지 않는 것.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스스로를 느슨하게 열어두는 것이다. 믿음은 돌처럼 단단한 것이라기보다 낙엽처럼 흔들리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비어 있는 여백은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두어야 아름다워지는 공간이다. 그것이 믿음을 시작하는 가장 조용한 출발점이다. 세계는 숫자가 가리키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그만큼 더 생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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