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층에는 이웃이 산다
엘리베이터가 18층에 서 있을 때
우리 아파트동은 지하 1층 주차장부터 18층까지 있다. 우리 집은 4층에 있어 그리 높지 않아 혼자일 때는 계단으로 오르내리려고 하나 아이랑 함께일 때는 무조건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후두염으로 고생하다 (아이도 엄마인 나도) 다시 어린이집을 오전만 보내기 시작했다. 집에 오는 그 짧은 시간 차 안에서 아이는 잠이 들어버렸다. 보조 가방을 메고 주섬주섬 물건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잠든 아이를 안아 들었다. 지하 1층 주차장으로 연결된 문을 통해 들어오니 엘리베이터는 18층에 멈춰있었다.
"어? 호랑이네가 들어왔나?"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나온 말.
18층에는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 산다. 모든 게 다르지만 아이의 성별과 나이가 같아 친해진 이웃이다. 시절인연이라 짧게 만나고 헤어진다 해도 당연하다 생각할 만큼 공통점이 없기도 하다. 그래도 18층에는 내가 아는 이웃이 산다.
만약 이 아파트 동 안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특히 18층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18층에 멈춘 엘리베이터를 보며
'아, 왜 이렇게 높이 올라가 있어, 힘들어.'라고 투덜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정말 피곤하다, 그만큼 챙겨야 할 것도 많고 그 사람의 걱정을 듣게 되고 고민을 듣게 된다. 행복한 것만 듣고 살기에도 짧은 세상인데 말이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넓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18층에 사는 사람을 알게 되면 18층에서 바라본 풍경을 알 수 있게 되고 우리 집과는 다른 습도에 놀라게 된다.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을 알게 되면 강아지를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게 되고, 유기견에 대한 생각도 조금 깊어진다.
장애아동을 키우는 사람을 알게 되면 알게 모르게 내 안에 있던 편견을 스스로 깨우치고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온다.
몇 개월 전에 읽었던 책 [아무튼 비건]에서 아주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다.
"무서운 타자화"편에서 나와 남, 우리를 가르는 타자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동일시하고 공감하는 우리와 내가 멀리하는 남을 구분한 후, 우리라는 울차리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라고 설명을 하였는데 글을 읽는 순간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었다. 환경뿐만이 아니하 사회에 만연한 문제에도 딱 들어맞는 설명 같아서.
[우리]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혹은 동물을 비롯한 자연생태계에게 [우리]라는 말은 얼마나 위험한 말인가.
[우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
[우리] 안에 모든 걸 다 넣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많은 카테고리를 포함할 수는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많은 [우리]를 갖게 된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요즘이다.
안다, 모든 걸 다 넣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많은 걸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 넣을 수는 있다. 의식적으로 찾아보자, 지금보다 더 많은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내가 의도하지 않은 잔인함이 다른 [우리]들을 아프게 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