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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Sep 04. 2023

하고 싶은 거 다 해

갖고 싶은 걸 당장 사면, 불행하지는 않을 거 같아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새삼 '나'를 알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닮고 싶지 않은 '아빠의 일부분'을 내가 똑 닮아 있다는 걸 깨닫기도 한다.

아빠는 짧은 인생이니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바로 하 편이다. 참거나, 기다리는 등의 단어와는 거리가 먼 인생이겠다.


그걸 내가 닮았다. 난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했다.

아무리 집안 형편이 어려웠어도, 당장 그럴 능력이 안 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그렇다고 빚을 내서 여행을 가거나 공부를 한 건 아니었다. 내가 번 돈을 써서 술을 마시러 다녔고, 여행을 다녔다.

배우고 싶었던 영어도 돈 주고 학원에서 배웠다.

해보고 싶은 운동이 있으면 다 해봤다. 서핑도 해보고 요가도 배워보고, 춤도 배웠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되었다. 싶은 게 있어도 먼저 참고 생각해 보는 엄마와 동생이.

누가 옳다 그르다를 떠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거다. 그렇게 참고 기다리다 보니 습관이 되어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기를 어려워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한다는 건, 결국 나의 상황에서는 주변에 베풀 여유가 없어진다는 거였다.

나는 가진 것이 없는, 자산이라 부를 수 없는 말 그대로의 빚(아빠로부터 온)이 있는 소시민이니까.

그러한 나의 행동이 동생이나 엄마에게 미안하다 느끼는 건 아니나, 아빠를 반면교사 삼아 가끔 나를 되돌아보며 반성을 한다. 베풀지 못하고 나만 생각해 온 삶에.


물욕이 있는 편 아니라 물건 잘 사지 않는 편이다. 옷도 있는 거 입고, 화장품도 꼭 필요한 로션이나 클렌징 외에는 잘 사지 않는다.

간혹 선물로 들어온 립스틱, 썬쿠션 등은 기분전환 삼아 잘 사용다.

미용실도 네일숍도 잘 가지 않는다. 일 년에 한두 번 커트를 하러 미용실을 가고 네일숍은 안 간지 십 년이 넘었다.

그런데 가끔 이상하게 꽂히는 무언가가 있다.

이번에 꽂힌 '물건'은 이북리더기다.


아무런 정보 없이 상상만 했을 때 내가 느낀 가격은 약 십만 원 선이었다. 막상 알아본 이북리더기는 무려 두 배를 넘어섰다. 약 이십만 원.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아왔으나, 그래서 결국 행복한가?라고 물었을 때 자신 있게 yes를 외치지 못할 거 같기에 점차 기다리고 참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적어도 둘 다 해보면 무엇이 더 나은 삶을 향해 가는 길인지 알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이십만 원이 넘는 이북리더기를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는 감당은 할 수 있으나, 다가올 추석과 남편의 생일 등을 고려했을 때 좀 더 고민해 보자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나니 무언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있으면 기나긴 출퇴근 길 동반자가 되어줄 수 있고, 여행 갈 때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 같고 (여행 갈 때 책 두 권씩 챙겨가는 사람, 나야 나!) 가방에서 탁, 꺼낼 때 뭔가 멋있을 거 같고...(?)

허전한 마음을 오랜만에 미용실에서 채우기로 했다. 올해 한 번도 안 간 미용실이니... 가을맞이 염색을 해주면 기분이 괜찮아질 거 같았다.

염색하러 온 미용실에서 이왕 온 거 새롭고 예쁜 걸로 할까 싶어 나에게는 '브리지 염색'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하이라이트 염색'을 하며 짧게 컷을 치기로 했다.

뭔가 들뜬 기분으로 염색을 하는 중 슬쩍 내밀어진 계산서를 봤다.

282,000원. 

오, 탈색 값과 염색 값이 따로 들어가고 디자인 염색이라 추가 금액이 더 붙었구먼.

오,

오.....


아니, 이 가격이면 이북리더기를 사고 폼나는 관련 액세서리까지 살 수 있는 가격인데...?

이게 무슨 일이람.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으나 의연한 표정으로 결제를 마쳤다.

한 달여를 고민하고 참고 기다린 끝에 얻은 결과가 이거라 하면 참 멍청하기가 짝이 없는 결과이지만, 어쨌든 색다른 시도로 기분전환이라는 목적은 거두었다.

결국 난 지금 이 순간에도 나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있는 셈이 되겠다.


가까운 시일 내에 난 이북리더기를 살 것이다.

결국 내가 갖고 싶은 건 손에 넣어야 하기에.

그래도 좀 더 나은 삶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아빠와 다르게 살고 싶은 나는 사기 전까지 고민할 거다.

이걸 사기 전에 엄마와 밥 한 번이라도 더 먹었는지,

주변에 베풀어야 할 곳이 있는지,

우리 가족에게 사주고 싶은 건 없는지.

그렇게 한참을 둘러보다 이북리더기를 샀을 때, 좀 더 만족스러울 거 같다.


... 물론 그 안에 이번 미용실과 같은 일은 한 번 더 일어나선 안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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