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작가 Aug 12. 2018

'철학하기'가 필요한 시대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인공지능 시대에 '철학하기'


요즘 여기저기서 인문학이 강조되고 있어. 나도 책을 읽는 직업이다 보니 종종 보면, 인문학의 탈을 쓴 자기계발서들도 많더라고. 가짜가 진짜인척 하는 책들이야. 읽으면 그럴싸하지만 실질적인 현실에서 도움이 되지 않거나, 쉽게 읽히지만 알맹이는 없는 책들이야. 사람들이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지금이 바로 어디론가 '돌파해야 할' 시기, 초월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야. 분기점, 변곡점인 거지. 예술가, 철학자, 과학자, 경영자들은 시대의 징후를 예민하게 파악하는 능력이 있거든. 왜냐하면 이들은 세상에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문학적, 철학적 성찰을 통해 ‘시대의 방향’을 보고 싶은 거야. 


그래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삶에 대한 관심이고, 시대의 방향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 나타나는 거야. 우리는 관심이 있다면 모든 문제를 돌파할 수 있단다. 시기의 문제이지 불가능의 문제가 아니야. 그 시기까지 버티는 힘, 인내력, 성실성 그리고 낙천적인 마음이 모든 것을 돌파할 수 있도록 만들어.


과거에는 살아남기 위해서 세상에 대한 지식을 축적해야 했어. 어떻게 해야, 벼농사를 지을 수 있으며, 어디에 사냥감이 나타나며, 불은 어떻게 피우는지 알아야만 살아갈 수 있었거든. 지역마다 문화마다 그 방식은 달랐지만 세계에 대한 지식은 내 삶의 전제 조건이 된 거야. 그러니 지식인이 존중받았던 거야. 사람들은 사회의 부속품이 되어 내 신분과 역할에 맞는 일을 제대로 하면 되었던 거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잘하면 사회가 잘 작동되었던 거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아는 것, 그리고 잘하는 것이 과거 시대, 인간의 길’이었거든.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착실히 하면 존중받는 인간이 되는 거야.


하지만 산업혁명 시기에 오면 내가 해야 할 일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거든.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의 일, 노동을 통해서 인정받았잖아. 그런데 그 일을 거대한 기계가 하는 거야. 기계가 인간의 육체노동을 대신하니 19세기 초반 러다이트(기계파괴)운동 같은 것이 일어나는 거야. 노동하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존중받지 못할 때, 자신의 노동이 기계와 경쟁하게 될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계를 파괴할 수밖에 없는 거야. 이러한 운동으로 인간의 노동이 조금이라도 존중받게 되는 환경이 만들어지게 되는 거야.


오늘날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간의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정신노동을 기계가 대신하는 것을 알리는 거야. 지배하는 사람도, 지배받는 사람도 이제 모니터만 쳐다보는 시대가 된 거야. 인터넷은 거대한 인공신경망이고, 인간은 그 하위에서 수족과 같이 부려지는 시대가 된 것이지! 컴퓨터 모니터가 시키는 것을 수동적으로 따라 하는 인간, 인간을 이성적 존재, 사유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동물과 다른 인간의 유일성을 찾던 인간이, 그 자리를 인공지능, AI에게 내어주게 된 거야.  





인간의 승리이면서 패배인 경기!


사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겼을 때, 난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단다. 바둑은 그래도 20~30년은 더 걸릴 것으로 생각했거든. 바둑은 19X19=361개의 유한한 점이지만 그 안에 둘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우주에 있는 원자의 수보다 많거든. 그렇게 잘났다고 떠들어 댔던 인간, 인간만이 유일하게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인간이 AI에 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양가적 감정을 느끼는 거야. 인간의 위대함과 동시에 느끼는 패배감! 그러니 과거의 인간과 지금의 인간은 다른 거야. 육체노동을 통해서 인정받던 시대가 지났고, 정신노동을 통해서 인정받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거든. 이제 우리는 무엇으로 인간임을 인정받아야 하는 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 등장하는 거야.




다시 한번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할 시기가 온 거야.





나는 마흔이 넘은 아재란다. 40이 넘은 아저씨, 아줌마,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모두 아이들에게 사과해야 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하지 못했거든.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거야. 전후세대는 부동산을 통해 자기 성취를 이루었고, 60~80년대 생들은 IT를 통해서 자기 성취를 이뤘단 말이야. 어쨌든 90~2000년대생들은 무엇을 통해 자기실현을 이룰지 안 보이는 거야. 그저 어려서부터 공부해! 학원가! 말고 어떤 이야기를 들었니? 우리의 교육시스템이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했니?


그러니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무조건 사과해야 해! 과거에는 ‘공부해라, 기술을 배워라’라고 했지만 지금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해줄 말이 없는 거야. 그러니 아이도 부모도 선생도 모두 안정적인 직업만 찾는 거지. 공무원, 교사, 대기업직원, 의사, 변호사가 되라고 하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진짜 안정적이냐는 거야. AI시대가 도래하면 공무원, 교사, 대기업직원, 의사, 변호사는 안정적일까?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미래가 안보이니 이유를 모르는 두려움이 있는 거야. 불안이 있는 거지. 그 불안이 인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튀어나오는 거야. 


인공지능이 일상에 보급되는 분기점을 대략 2020으로 보는 것 같아. 이 쯤되면 인공지능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 프로그래밍을 하는 시기가 될 거야. 누구나 쉽게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래밍을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손쉽게 만들지 몰라! 누구나 쉽게 프로그래밍을 할 시기가 올 거야. 그러니 인공지능 시대는 기술보다는 아이디어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될 거야. 지금도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에는 인공지능이 있단다. 과거에 이베이나 알리바바에서 고객이 물건 구매 후 함께 구매할 수 있는 추천 제품을 처음에는 사람을 고용해서 했지만, 지금은 모두 인공지능으로 대체되었다고 해. 인공지능의 추천상품에 대한 구매율이 더 높았거든. 역설적으로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할수록 육체노동의 중요도가 올라갈 거야. 장인 수준의 정교한 기술을 가진 사람, 사람들의 미적 취향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예술가, 엔터테인먼트, 농업, 서비스 산업 등이 부각될지도 몰라!


AI는 이카루스의 날개야, 우리 인류는 이카루스처럼 또 한 번의 초월, 도약을 시도하는 중이야. 다시 한번 땅과 하늘 사이에서 적당한 위치를 찾아야 해! 사람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길'이 보이면 뚜벅뚜벅 그 '길'을 가거든.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그 '길'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 거야. '길'이 명확히 보이지 않으면 아무리 풍족해도 힘들거든. 무엇을 해도 즐겁지가 않아. 그래서 '철학하기'는 길 없는 곳에서 길 찾기야. 그것은 내 '길'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길'이기도 한 거야. 그 길은 과거처럼 몇 명의 지도자가 만드는 길이 아니고, 각자가 만들어야 하는 우리의 '길'이야.



그래서 '철학하기'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되는 거야.






생각한다는 것은 주체적인 것!


'철학하기'는 철저히 내가 하는 주체적인 행동이야.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것. 이것은 누군가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거든. 

 

계몽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미성년 상태는 그 원인이 지성의 결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결여에 있다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용기 있게 알려고 하라(Sapere aude)!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려는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표어이다.

-임마뉴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1784년


계몽은 영어로 하면 Enlightenment야. 우리말로 표현하면 계몽보다는 ‘깨달음’에 가까워. 뭔가 꽉 막히고,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는 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어느 순간, 아!! 이거야!! 하면서 고민했던 문제, 얽히고설킨 문제가 풀리는 경우가 있잖아. 머릿속이 밝아지는 듯한 느낌, 그것이 계몽이야. 계몽(깨달음)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이야. 설령 다른 사람이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도움이지, 깨달음 자체는 전적으로 '내 것'이거든.  


칸트는 200년도 전에 전문가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스스로 알려고 하는 것이 '계몽의 길', '깨달음의 길'이라고 말해! 그것이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거야. 사람들은 과거보다 세상이 진보되었다고 하잖아.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도 과거보다는 진보했을 거야. 하지만 여전히 원시공동체를 유지하는 곳도 있고, 강력한 신분제적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곳도 있잖아. 여전히 아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중고등학생이지만 성인에 준하는 사고를 하는 학생도 있을 거야. 동일한 시대를 살아도 생각의 진화 정도는 사람마다, 문화마다 모두 다르거든.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은 1687년에 발표했지만 지금도 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잖아. 그러니 내가 현대, 도시에 살고 있다고 해서 내 삶이 진보적이 되는 것은 아니야.


요즘 대2병이라고 있어. 학생들이 자신을 탐구하지도 않고, 세상을 탐구하지도 않은 체 대학에 진학하고 그렇게 미친 듯이 공부해서 막상 대학교를 가보았더니,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거야. 대학교 1년은 친구들과 즐겁게 놀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이제 무엇을 하지?'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시기가 대학교 2학년이야.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대학교 2학년 때, 다시 탐구하는 거야. 이들이 다시 수능 공부를 하거나, 남자아이들은 군대를 가거나 하거든.


그러니 오로지 나만의 길을 자유롭게 찾으려고 노력해야 돼! '세상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요?'라고 질문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비슷한 길을 가더라도, 누구나 고유한 자기만의 길이 있는 거야. 그 길에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자기 만의 풍경이 있거든. 똑같은 학교생활을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주체적인 선택으로 자신의 길을 가지만, 어떤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목줄에 묶여 있거든.  


생각도 마찬가지야. 생각도 온전히 자기 것이 되어야 해! 다른 사람의 생각일지라도 ''가 곰곰이 생각해서 옳다고 판단했다면, 그 생각은 자신의 것이 되는 거야. 그래서 자신의 생각은 자기가 책임져야 해! 다른 사람의 생각이 옳다고 느껴진다면 그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 책임은 순전히 내가 쥐는 거야. 그래서 생각한다는 것은 주체적인 것이야!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어려워. 다른 사람이 시키는 데로, 누군가가 하라는 데로 하는 것이 편하거든.


하지만 내 생각은 절대 남이 해줄 수 없는 거야. 내 생각의 주인은 나거든. 항상 내 생각의 주인은 나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되새김질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힘 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의 말을 수동적으로 따라가게 될 거야. 때로는 나를 위해주는 사람의 말을 쫓다가 어느 순간 되돌아보면, 내가 원하는 길과 다른 방향인 경우도 있고, 막혀 있거나 절벽인 경우도 있어.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나를 위하고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심지어 부모님의 이야기라도 최종적인 결정, 판단의 주체는 내가 되어야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더라도 그 결정은 온전히 내 것이고, 그에 대한 책임도 나에게 있어. 이것은 나이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야. 내 삶을 그 어떤 누구도, 나 대신 살 수 없는 거야. 그러니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일단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 보고 나서 바로 후회하는 것이 나아!


그래서 생각에도 용기가 필요한 거야! 용기는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내가 그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고 책임지는 것을 의미해! 그래서 매 순간 우리의 선택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거야. 그리고 선택을 하고 나면 잘되던 잘못되던 끝까지 해보는 것이 좋아. 그러면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것을 느끼게 된단다. 만약 우리가 용기 있는 선택을 하는 습관이 들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 시키는 데로 따라 하게 될 거야. 앞에서 본 당나귀를 잃은 아버지와 아들처럼 말이야.





생각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


다행히 우리나라는 생각과 선택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야.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단다. 생각의 자유는 바로 표현의 자유야!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가 바로 표현의 자유야! 조심해야 할 것은 이것은 혐오의 자유, 비난의 자유가 아니야! 혐오와 비난은 부정, 금지로 표현되지만, 표현의 자유는 긍정으로 표현되거든. 표현의 자유는 양심에 따라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 또한 세계에 대한 나의 이해를 자기 나름의 논리로 구축할 수 있는 사상의 자유를 의미해!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자유롭게 상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는 거야.


헌법 21조
 
①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②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③ 통신·방송의 시설기준과 신문의 기능을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④ 언론·출판은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언론·출판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한 때에는 피해자는 이에 대한 피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통해서 내 생각이 정당한지 아닌지. 틀린 지 맞는지 확인할 수 있단다. 자유롭게 인터넷에서 내 생각을 검증해볼 수 있는 거야. 더 나아가서 표현의 자유는 새로운 언어를 통해서 이전에 없었던 생각을 가능하도록 도와줘.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듯이, 생각 또한 나와 다른 사람들이 아주 많거든. 우리나라는 그러한 다양한 생각을 모두 모두 존중해주는 민주주의 사회야!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로!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내 마음속의 경찰서를 없애자!
보도 블록을 들추어라! 해변이 나타날 것이다.
나를 해방시키지마라,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프랑스 68혁명의 구호


프랑스 68혁명의 사진들   1. 현실주의자가 되자! 불가능을 요구하자!      2. 들뢰즈, 사르트르, 푸코      3. 사르트르, 푸코(마이크)  



생각을 막으면 어떻게 될까? 내가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볼게! 이건 진짜 진짜 극단적인 예이니까! 예로 이해해줘! 내가 만약 북한의 김정은을 정말 정말 사랑한다고 가정하자! 누군가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잖아. 그러니 어떤 사람은 김정은을 정말 미친 듯이 사랑할 수도 있거든. 사람의 취향은 다양하니까 말이야. 툭 튀어나온 볼록한 배! 클래식한 옷맵시! 스포티한 헤어스타일! 누군가의 가슴을 콩닥콩닥 뛰게 할 수도 있잖아!! 그런데 만약 내가 김정은에 대한 사랑과 찬양을 인터넷 상에 올린다면 어떻게 될까? 바로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갈 거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면 될수록 생각의 자유도 억압된다는 거야. 그러니 표현의 자유는 가능하면 최선을 다해 지켜주는 것이 좋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처벌하는 것이 정당하니? 생각만으로는 현실의 구체적인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야.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생각으로' 총을 쏴서 죽이고 욕을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거잖아. 실천에 옮기는 것은 문제가 되지만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야. 어떤 사람은 자유주의 사회를 이상 사회라고 생각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를 이상 사회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야. 생각 만으로는 깃털도 움직이게 하지 못하거든! 


이제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할게! 그런데 우리들은 왜 이렇게 자유롭게 생각하지 못할까? 4차 산업시대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하잖아.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자유로운 생각을 하지 못할까? 그만큼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야.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현실적 공간이 없어. 자유로운 생각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아. 수업시간에 질문 많이 하면 진도 나가야 한다고 하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엉뚱한 것만 물어보니!'라고 답해! 현실에서 자유롭게 소통할 물리적 공간이 없으니 인터넷에 온갖 말들을 배설하는 거야. 나와 세상에 대한 궁금함을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고, 대답해주는 사람도 없거든.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줄 사람도 없고, 지적 호기심을 일깨워 줄 사람도 없거든.


 그러니 몇 번의 시도와 실패 끝에, 질문하기를 포기하는 거야!


그럼에도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권리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단다. 그러니 어떤 생각이라도 너무 두려워하지 마! 내 생각이 올바른데 다른 친구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이 두려워 생각을 바꾸거나,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끝까지 따지고 들어서 답지가 틀린 건지, 아니면 내가 틀린 것인지 따져봐! 무엇인지 이해 안 되는 것이 있을 때는, 내가 정말 몰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설명이 이상해서 그런 건지 끝까지 질문해봐!


결국 우리가 주체적으로 생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것은 딱 하나야. 용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 이해되지 않을 때 질문할 용기! 내가 옳다고 느낀다면 끝까지 내가 올바르다는 것을 입증하면 되는 거야! 만약 내가 틀렸다면 순순히 인정하면 되잖아, 인정하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야. 내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깨닫는 용기 있는 행동인 거라고! 모르는 것은 절대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 모르는 데 가만히 앉아서 아는 척하는 것이 부끄러운 거야. 질문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거야.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질문하면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주거든. 이런 사회를 만든 어른들이 100%로 잘못한 거야. 모르는 건 우리 학생들의 책임이 아니야. 그러니 부끄러워할 필요도, 소심해질 필요도 없는 거야.



그러니 '철학하기'는 꿋꿋이 버티면서 용기 있게 질문하는 거야!






이전 03화 용기,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