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기는 용기가 실현되는 방향 찾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좋은 의심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현실을 벗어 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단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것을 열심히 하지 않아. 그리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지! 왜냐하면 용기가 없기 때문에야. 생각하고 실천하기도 전에 '나는 안될 거야'라고 포기 해버 리거든! 그래서 생각을 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어. 바로 ‘용기’야. 왜냐하면 용기가 없다면 두려움에 빠져서,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볼게, 아기가 네발로 기어 다니다가 두발로 처음 걸을 때, 넘어질 것이 두려워서 걷는 것을 머뭇거린다면 평생 기어 다녀야 할 거야. 모두들 처음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을 거야.
처음으로 집 밖을 혼자 나갈 때,
처음으로 먼 학교를 혼자 걸어갈 때,
수영을 하기 위해 깊은 물에 들어갈 때,
이해되지 않는 두꺼운 책을 읽어야 할 때,
무엇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수학 문제를 만날 때.
이 모든 순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야. 심지어 처음 보는 낯선 음식을 먹기 위해서라도 용기가 필요하단다.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가 아니라, 용기라고 생각해! 용기가 있는 친구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나갈 힘이 있어. 그러나 용기가 없는 친구들은 엄마, 아빠, 선생님, 친구 뒤로 숨어버리지! 그래서 우리들은 용기 있는 태도, 경험, 체험을 느껴보는 것이 중요해. 그런데 이런 용기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나 태도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야. 의심하고 생각하는 데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단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의심하려면 우리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거든.
“그래, 그렇다면 난 지옥으로 갈 테다” 그리고는 편지를 북북 찢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끔찍스러운 생각이었고 무서운 말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쓸어 담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었지요. 그리고는 이제 두 번 다시는 마음 고쳐먹는 일에 대해서 신경 끄기로 했습니다. 그 모든 생각을 머리에서 말끔히 씻어버렸지요. 다시 나쁜 짓을 하기로 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나란 놈은 자라나기를 그런 식으로 자라났으니 나쁜 짓은 내 천성에 맞고, 착한 일은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맨 첫 번째 일로 나는 노예 상태의 짐을 다시 한번 빼내자,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일이라도 생각해 낼 수 있다면 그것마저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나쁜 짓을 하기로 한 이상, 더구나 끝까지 하기로 한 이상, 철저하게 해내는 것이 좋을 테니까요.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핀의 모험>
당시 미국은 노예를 재산이라고 여겼어. 아주 비싼 재산이야. 그런데 헉은 짐을 풀어주고 노예를 해방시키려는 일을 계속하려고 다짐하거든. 오늘날로 치면 값비싼 물건, 예를 들면 비싼 자동차를 훔치는 것과 비슷한 행동인 거야. 당시 교회에 가면 목사들이 흑인은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는 설교를 했거든. 즉, 헉의 행동은 당시 사회에서 용납되는 행동이 아닌 거야. 그래서 헉처럼 '노예를 해방시키자!'는 생각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야. 바로, 용기 있는 사람만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단다.
마찬가지로 생각에도 용기가 필요해. 행동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각을 할 때도 용기가 필요하거든.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다른 친구들과 내 답이 다른 것 같은데 내가 이야기해도 될까?’ ‘선생님의 설명이 이상한데 내가 손을 들어 물어보면 안 될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면 이상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생각하는 것도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생각하려고 하잖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남과 다른 생각'이 있다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것을 억누른단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틀린 생각이 아니야. 그건 그저 다른 생각일 뿐이야. 그런데 주변 사람과 다른 생각을 하면 왠지 내가 틀린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그래서 확실하지 않아도, 뭔가 이상해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게 마련이란다. 특히 전문가의 이야기, 유명한 사람의 이야기, 공부 잘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무작정 따라 하는 경우가 많아.
옛날 옛날에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팔러 장에 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고삐를 붙잡고, 아들은 그 뒤를 졸졸 따라갔지요.
두 사람이 어느 주막 앞을 지날 때였습니다. 주막에 모여 있던 장사꾼들이 두 사람을 보고 하하하 웃었습니다.
“여보게, 저기 저 어리석은 사람 좀 보게. 당나귀를 타지 않고 힘들게 끌고 가고 있잖은가?”
“정말 어리석은 사람일세 그려. 아마 저 사람은 당나귀를 상전처럼 떠받드는 모양이야.”
“저렇게 어리석은 주인을 만나면 당나귀 팔자도 참 편할 거야. 우리 집 당나귀는 날마다 산더미 같은 짐을 싣고 다니는데 말이야.”
아버지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창피해졌습니다.
‘정말 장사꾼들 얘기가 맞아. 당나귀는 원래 짐을 싣거나 사람을 태우는 동물인데....’
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하고 당나귀 등에 아들을 태웠습니다.
이렇게 얼마쯤 가다 보니 마을 정자가 나왔습니다. 정자에는 노인들이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노인들은 당나귀 위에 앉아 있는 아들을 보고 혀를 끌끌 찼습니다.
“저, 저런 고얀 녀석이 있나. 아버지는 힘들게 당나귀를 끌고 있는데, 아들이란 놈은 편안하게 당나귀를 타고 가다니!”
“요즘 젊은 애들은 버릇이 없어서 큰일이야. 통 어른 공경할 줄 모른다고.”
“아비란 사람도 그렇지. 자식을 저따위로 가르쳐서야, 원.”
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가 아들놈 버릇을 망치고 있군. 어르신들 말씀이 옳아.’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더러 내리라 하고, 자기가 당나귀 등에 올라탔습니다.
이렇게 얼마쯤 가다 보니 빨래터에 다다랐습니다. 빨래터에는 아기를 업은 아낙네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아유, 가엾기도 해라. 저 조그만 아이가 이 뙤약볕을 맞으며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네.”
“정말 못된 아버지야. 아들은 다리가 아프든 말든, 자기만 편하면 그만인 줄 아나 봐!”
“아들을 저렇게 부려먹고, 나중에 늙으며 아비랍시고 대접이나 받으려 들겠지? 흥!”
아버지는 얼굴이 새빨개졌습니다.
‘아낙네들 말이 옳아. 저 조그만 녀석이 얼마나 다리가 아프겠어.’
아버지는 아들도 당나귀에 태웠습니다.
이렇게 얼마쯤 가다가 우물가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우물가에는 동네 아가씨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
“어머머! 얘들아, 저것 좀 봐. 저렇게 조그만 당나귀에 두 사람이나 타고 있어.”
“아이, 가엾어라. 당나귀가 힘이 들어 헉헉거리잖아? 인정머리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들인가 봐.”
“아마 당나귀 팔러 장에 가는 모양인데, 저러다간 장에 가기도 전에 죽어 버리겠어.”
아버지는 또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아가씨들 말이 옳아. 당나귀가 장에 닿기도 전에 힘에 부쳐 죽어 버리면 큰일이야.’
하지만 이제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냥 끌고 가도 안되고, 아들만 태워 가도 안되고, 아버지만 타고 가도 안 되고, 둘이 함께 타고 가도 안 되니 말입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아버지의 고민을 듣고 껄껄 웃으며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그러지 말고 아예 둘이서 당나귀를 짊어지고 가면 될 게 아니오? 정말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다 고민을 하고 있구먼.”
아버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래, 그것 참 좋은 방법이다. 얘야,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 우리 아예 당나귀를 짊어지고 가자.”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끙차끙차 당나귀를 짊어지고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다리를 건널 때였습니다. 당나귀가 갑자기 푸드득 하고 버둥거렸습니다. 그 바람에 당나귀가 떨어져 다리 밑으로 풍덩 빠져 버렸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자기 생각이 없어. 스스로 생각할 용기가 없는 거야.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들지 않거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 데로 무조건 따르잖아. 그 결과 어떻게 되었니? 당나귀를 잃어버리고 말잖아. 잃어버린 당나귀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까? 결국 아버지와 아들이 져야 하잖아. 주변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말을 하건 자신의 생각은 다른 어느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없어!
위의 아버지와 아들은 스스로 문제를 풀어갈 용기가 없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거야. 하지만 사실 이것은 크게 문제가 안될 수도 있어. 왜냐하면 적어도 손해는 자기만 보거든. 당나귀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일 뿐이잖아. 그러나 큰문제는 이러한 용기 없는 행동이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주거든.
밀그램은 권위에 대한 복종을 연구하던 과학자야. 사람들이 파괴적인 복종에 굴복하는 이유가 성격보다 상황에 있다는 것을 밝혔어. 굉장히 설득력 있는 상황이 생기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윤리, 도덕을 무시하고 권위자의 명령에 따라 잔혹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거야. 밀그램은 "징벌에 의한 학습 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집해서 이들을 교사와 학생으로 나누었어. 그러나 사실 학생은 배우였고, 전기 충격 장치도 가짜였어. 오로지 교사 역할을 하는 사람만 진짜인지 믿고 있는 거지.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실험 전에 실험에 참여한 예일대 학생에게 '누군가가 비인간적인 행위를 요구했을 때 당신은 따르겠는가?'라는 설문조사에서 92%는 '그럴 수 없다'라고 답한 거야. 그래서 밀그램은 실험에서도 잘해야 마지막 10단계인 450v의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은 0.1%로도 나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어. 하지만 실험 결과는 65%가 450v까지 전기충격을 가한 거야. 사람들은 실험 주체자의 명령을 그대로 따른 거지.
결과는 참혹할 정도야. 부당한 행위라고 할지라도. 권위자, 권력자가 이야기하면 대부분 생각해보지도 않고 복종하다는 거야. 우리 일상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거나, 똑같이 행동하거든 그런데 그것은 큰 재난을 일으킬 수 있어. 만약에 우리들이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용기 있는 선택을 했을까?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처럼 비슷한 선택을 했을까?
아이히만은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인 학살 계획의 실무를 책임졌던 인물이야. 전범재판에서 그는 자신의 상관이 시킨 대로만 했을 뿐이라며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는 거야. 또한 주변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거야.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엄청난 학살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
무사유, 생각 없음, 시키는 데로 행동하기, 관성, 습관화 된 행동에서 무시무시한 악을 행하는 거야. 악이 특별히 악마적인 어떤 것에 기원하는 게 아니라, ‘아무 생각 없는 일상적 삶에서 악이 출현’한다는 거야. 일제 강점기의 이광수는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서 해방이 이렇게 빨리 올지 몰랐다고 변명하거든. 이명박근혜 시절 정권이 시키는 데로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자리만, 자신의 이익만 지키면 된다는 사고 속에 악이 내재해 있는 거야.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실천적 용기가 필요한 거야.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학생이 있다고 생각해봐. 우리는 당연하게도 왕따 학생을 괴롭히는 것이 나쁜 것인 줄 알고 있어. 그런데 주변 친구들과 함께 괴롭히다 보면 너무나 재미있고, 그렇게 나쁜 행동인지도 느껴지지도 않을 거야. 왕따 학생을 도와주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를 괴롭히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해. 물론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면 더 좋겠지. 그러나 왕따 학생을 괴롭히는 학생들 틈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거야. 그래서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용기가 필요한 거야.
그러니 철학하기는 어떤 결정이든, 어떤 선택이든 최대한 나 스스로 이해하고 생각해보고 결정해야 하는 거야. 무작정 다른 사람이 시키는 데로 하다가는, 나를 잃어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까지 하게 될 위험이 있어,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도 있어. 자신도 모르게 악마가 되는 거지. 그래서 용기는 일상에서도 필요한 거야.
철학하기! Doing Philosophy는 하나의 실천이야. 내 삶의 모든 순간에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야.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지 쉽게 판단할 수는 없어. 종종 틀릴 때도 있고, 실수할 때도 있고, 때로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기도 할 거야. 하지만 '철학하기'를 실천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자기의 자리를 찾아갈 가능성 있다고. 철학하기는 절대 명사가 아니야. ‘어떤 책을 읽으면, 이것만 하면’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사기꾼이야. 철학하기는 동사야! 의심하고 실천하면서 돌파구를 만들어 내는 모든 행동, 삶의 태도, 자세가 철학하기야.
그래서 정리하면,
첫째, '철학하기'는 의심하기야.
둘째, '철학하기'는 의심을 통해 현실을 벗어날 가능성을 만드는 거야.
셋째, '철학하기'는 용기 있는 실천이야.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면 알을 파괴해야 해! 따뜻하고, 안락한 알에서 머물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단다.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안락함을 깨고, 힘이 남아 있을 때 자신을 보호해주는 딱딱한 껍질을 깨야 하는 거야. 용기가 없으면 안주하고 머무르게 돼! 하지만 우리들은 때론 용기가 아니라 객기를 부리기도 한단다. 나쁜 짓을 누가 더 잘하는지, 빨간 불에 신호등 건너기, 자신이 힘센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친구를 괴롭히기와 같은 것은 용기가 아니라 객기야. 우리는 일상에서 용기와 객기를 명확하게 구별하기 어렵단다.
가끔 객기를 부리는 것도 나쁘진 않아. 나와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금기에 도전하는 것은 어려서부터의 연습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거든. 하지만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죽을 정도로 위험한 객기를 부리는 것은 안 돼! 사람에겐 가끔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가 있거든. 그러니 객기 부리다가 죽는 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야.
따라서 '철학하기'가 '좋은 의심'인 것처럼, 용기 또한 '좋은 용기'가 되어야 해! 적어도 내가 발휘하는 용기가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거야. 물론 '비뚤어진 사회'에서는 내가 발현하는 용기가 나쁜 용기가 될 수도 있어. 어려서부터 조폭 집단에서 자란 아이에게 좋은 용기는, 학교에서 친구들을 괴롭혀서 돈을 뺏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야.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은 그런 극단적인 환경에서 살지 않잖아. 그러니 내 양심을 믿고, 내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용기 있게 실천하는 것이 중요해!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인 이카로스는 미노스 왕에 의해서 탑에 갇히는 벌을 받게 돼. 다이달로스는 무엇이든 만드는 뛰어난 재주가 있는 장인, 발명가였거든. 다이달로스는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서 새의 깃털을 모아 밀랍을 이용해서 날개를 만들고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탑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단다. 탈출 직전에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
"이카로스야, 하늘과 바다의 적절한 높이로 날아야 한다. 너무 저공을 날면 바다의 습기가 날개를 무겁게 할 것이고, 너무 상공을 날면 태양의 열이 날개를 녹일 테니까, 내 곁으로 따라오너라."
다이달로스는 아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어.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심조심 날았지. 탈출에 성공하자 기쁨에 들뜬 나머지 하늘 높이높이 올라갔어.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기쁨을 만끽하고 싶었던 거지. 태양에 가까워질수록 이카로스의 밀랍은 점점 녹았고, 날개는 떨어져 버리고 바다로 빠져 죽게 된 거야. 그래서 그가 떨어진 바다의 이름이 이카로스 해가 된 거야.
다이달로스는 감옥에 갇혀 있는 현실을 뛰어넘기 위해서 생각을 해! 좋은 의심을 하는 거지. 생각 끝에 깃털을 모아 날개를 만드는 탈출 방법을 찾아낸 거야. 현실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게 된 거야. 그러나 그의 아들 이카로스는 자유롭게 날 수 있다는 것에 취해 객기를 부리다 바다에 빠져 죽게 된 거야.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아주 상징적이야. 다이달로스는 오늘날로 말하면 과학자, 발명가, 기술자라고 볼 수 있어. 과거에 누구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 그가 만든 날개는 오늘날의 인터넷, 스마트폰, DNA 복제, 인공지능과 같은 발명품들이야. 오늘날 우리는 과학자들의 용기로 인해서 과거와 다른 편리한 세계를 누릴 수 있게 된 거야. 하지만 우리는 이카루스처럼 적절한 높이를 생각하지 않고 마구마구 하늘을 날고 있거든. 그래서 스마트폰에 중독이 되고, 환경이 오염되고,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하는 거야.
과학자들은 지구 상에 없는 것을 만들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야. 이들은 우리를 더욱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우리의 현실을 초월하게 해준단다. 하지만 인문학자, 철학자들은 그 용기가 어디까지 발휘해야 되는지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칼을 예로 들어 설명할게. 과학자들은 천만년이 지나도 상하지 않고 날카로움이 유지되는 칼을 만드는 사람이야. 이들은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좋은 칼을 만들 수 있을까 연구하거든. 그렇지만 과학자들은 이 칼을 누가,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크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돈만 주면 만들어주거든.
반면 인문학자, 철학자는 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어. 하지만 이 칼을 요리에 쓸 건지, 수술용으로 쓸지, 어떤 사람에게 이 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거든. 도둑, 정신이상자, 살인자에게 칼이 함부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거잖아. 따라서 철학하기는 용기를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위해서 얼마만큼 발휘할까’를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철학하기'는 좋은 의심을 통해 용기가 실현되는 방향을 찾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