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사람을 만드는 생각 공부
나무에서 도토리가 떨어진다.
이에 놀란 다람쥐가 뛴다.
토끼가 뛴다.
여우가 뛴다.
사자가 뛴다.
왜 뛰냐?
몰라...
도토리가 떨어지자, 다람쥐가 놀라서 뛰기 시작해! 그러니 토끼, 여우, 사자까지 덩달아 뛰기 시작하는 거야. 그런데 아무도 왜 뛰는지 몰라, 이들이 생각이 없는 애들일까? 아니야 이들도 생각을 해! 긴급한 일이 생겨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 우리 모두 위급한 상황이라고 추측하고 행동하잖아. 위의 동물들도 마찬가지로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뛴 거잖아! 따라서 꼭 공부를 해야지만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의심이 많은 토끼, 여우, 사자라면 다람쥐한테 ‘왜 뛰니?’라고 물었을 거야. 그러면 다람쥐는 아마 이렇게 답할 거야. ‘도토리가 떨어져서.’ 그럼 또 묻겠지. ‘도토리가 떨어지는데 왜 도망을 간 거니?’ 이렇게 묻다 보면 모두 다 아무 이유 없이 뛰는 상황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생각이 많다고 철학을 잘하는 것이 아니야. 철학하기는 생각을 통해서 ‘의심’하는 연습을 하는 거야. 의심하는 능력을 기를 때 철학하기가 시작되는 거야.
배고플 때 밥 생각이 나고, 졸리면 잠 생각이 나고, 갑자기 친구 생각, 엄마 생각도 나잖아! 우리들 대부분은 공부하지 않더라도 생각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잖아! 그런데 왜 '생각하는 공부'가 필요한 거지? 생각하는 것은 배우고 익히지 않아도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니니?
‘생각을 공부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머릿속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공부한다는 것이 아니야. '생각을 공부한다는 것'은 ‘의심’한다는 것을 의미해. 정확히 말하면 '의심하는 법을 익히는 공부'야. 다람쥐가 뛰면 위급한 일이 생겼구나라고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다람쥐가 ‘왜 뛸까’를 의심해보는 것은 평상시에 의심하는 연습, 습관이 들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단다. 그래서 ‘철학하기’는 생각을 공부하는 거야.
의심하는 것이 철학의 첫 번째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 야. 의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동물과 다름없단다.
'철학하기'는 '의심하면서 생각하는 것'이야. 하지만 다들 '철학하기'를 어려워해. 그러나 '철학하기', '철학 공부'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이야. 다른 공부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우리가 공부하는 과목들을 한번 생각해보자.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등을 배우잖아. 그런데 이러한 교과서에 대한 공부는 '의심하는 것'을 익히는 것이 아니야. 우리가 모르는 세상에 대한 지식, 정보를 우리의 머릿속에 넣는 과정이야. 그래서 일반적인 학교 공부는 의심하기보단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어.
우리는 세상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체험하면서 이해하지 않아. 우리는 교과서라는 것을 '매개'로 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거야. 그러니 그 과정은 아래와 같은 과정과 같아!
‘나’ → 세계 (국어, 사회, 영어, 수학, 과학 등의 교과서) → 이해
그래서 학교 공부, 어른들이 말하는 공부는 의심하는 것보다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거야.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180도, 속도는 시간당 이동거리라는 것을 정확히 이해해야지. 그래서 학교 공부를 할 때는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어. 그러나 철학 공부를 할 때는 하나가 더 추가돼! 이해한 것을 토대로 더 나아가서 의심해보는 것이야. 의심을 하다 보면 새로운 것이 발견될 수 있거든.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물체가 땅에 떨어진다고 해서 ‘만유인력’의 법칙, 중력의 힘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거든. 뉴턴이 생각한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니야. 왜 사과는 떨어지지만, 저기 멀리 있는 별은 지구에 떨어지지 않을까? 의심하고, 그 의심에 스스로 답을 찾아본 거야. 그래서 사고 실험을 해서 사과를 조금씩 높이 올려보면 특정 지점까지는 떨어지고, 그 이상에서는 별처럼 떨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을 한 거지. 그래서 중력은 두 물체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규칙을 찾아낸 거야.
우리는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라고 우리는 배우거든. 그러나 의심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항상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지구 위에 엄청나게 큰 삼각형을 그린다면 그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 일까? 아니야 구에 위치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보다 더 커. 따라서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은 평면에서는 타당하지만 3차원적인 공간에서는 다를 수 있어. 원이나 굽어진 평면에 있을 때는 내각의 합이 달라질 수 있거든. 그래서 아무리 당연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의심하면 새로운 생각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우리가 알고 있는 당연한 것도 의심하다 보면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거든. 위대한 사람들의 출발은 모두 의심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어. 이들의 의심이 세상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 거야.
그렇다고 무조건 의심만 하면 철학을 잘하게 될까? 그건 아니야. 의심을 하더라도 그 의도가 좋아야 해! 의심을 통해서 좋은 결과나 의도 혹은 재미라도 있어야 돼! 그냥 단순히 딴지 걸고, 비난하기 위한 의심은 진정한 의심이 아니야. 이렇게 딴지 거는 아이들의 의심은 ‘내가 왜?’, ‘내가 왜 해야 되는데’와 같이 일방적이야. 이건 나쁜 의심에 가까워.
그런데 사춘기가 시작되면 아이들도 점점 예민해지고 불만도 많아지잖아. 바로 이때 ‘자아’가 생기기 때문이야. 나만의 모습이 점점 갖추어지는 시기이거든 이때는 모든 것이 짜증스럽고 불만스러울 거야. 그러나 불만이 많아지고 투덜 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아. 그나마 조금이라도 내가 만족할 방법을 찾아보아야 해! 즉 좋은 의심을 해야 된다는 것이지!
'○○○'은 공부하라는 소리를 자주 들어. 그런데 자신은 왜 공부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야! 의심이 들었지. 왜 부모님이 자꾸 공부하라고 하는 걸까? 그래서 마인드 맵을 그려보았어. 그리면서 생각해보니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되었어!
물론 어떤 학생은 공부가 아니라 노래가 될 수도 있고, 춤, 연기가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우리는 의심을 통해서 좀 더 분명한 자기 자신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런데 이 의심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단다. 그건 바로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을 우리에게 가져다주거든.
그래서 ‘철학하기’는 의심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