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묻은 누더기, 오랏줄에 묶여 머리는 다 뜯긴 초췌한 남자가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며 나무 창살로 만들어진 수레에 실려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무슨 장면일까요?
조선시대 양반이 죄를 짓고 유배를 가는 모습입니다. 아마 TV에서 자주 접했을텐데요. 그런데 이 형벌은 곤장을 맞거나 주리를 트는 것보다 힘겹고, 또한 사형 빰치게 무서운 형벌이라고 합니다. 과연 조선시대 유배생활이 어땠길래 그런 걸까요?
조선시대에 있었던 5가지 형벌인 ‘태장도유사’는 회초리를 맞는 태형, 곤장을 맞는 장형, 관에 갇혀 강제 노동을 해야했던 도형, 귀양을 가는 유형, 그리고 사형을 뜻합니다. 그 중에서 죄인을 변방으로 무기징역 보내버리는 유배형은 사형 다음으로 강력한 형벌이었다고 합니다.
유배하면 벼슬하는 공무원들만 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유배는 조정관료 뿐만 아니라
죄를 지은 일반 선비, 평민, 천민 모두 갔습니다. 남성 뿐 아니라 여성도 갔고 하다못해 동물도 갔는데요. 1413년 태종 때는 사람을 밟아 죽인 코끼리가 전라도 장도에서 귀양살이를 했죠.
죄질에 따라 가야 하는 거리가 달랐습니다. 2천리, 2천5백리, 5천리 3단계로 나뉘었는데요. 하지만 한양에서 강진까지도 3천리가 되지 않습니다. 명나라 법을 따른 규정이라 실정이 맞지 않은 겁니다. 처음에는 거리를 맞추기 위해 국토를 여러 번 왕복했다고 해요. 그러다 세종 때, 법이 바뀌었습니다.
유배지로 가장 자주 이용된 곳은 제주도, 거제도, 진도, 흑산도, 남해 등인데요.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는 휴양지로 가장 각광받는 곳들이죠.
죄인이 유배지로 가는 모습은 어땠을까요? 대부분 소달구지를 타고 가는 모습을 상상할텐데요. 당시에는 달구지로 갈법한 도로나 길이 전국적으로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유배인들의 교통수단은 말, 말이 없다면 걸어가야 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하루에 약 30km를 이동해야 했고 빠르게 움직여 정해진 기간 안에 도착해야 했어요.
유배 가는 동안 주막에서 먹고 자는 등의 모든 경비는 직접 해결해야 했습니다. 유배 비용을 대다가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심지어 감시하는 호송관의 경비 일부도 유배인의 몫이었습니다. 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유배 가는 동안 힘들었다고 하니 유배길이 상당한 고역이었겠죠.
유배지에 도착한 죄인은 관아에서 정해준 집으로 향합니다. 집주인은 각종 세금을 면제받는 대신 유배인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감시자 역할을 했어요. 하지만 창고나 처마 밑에서 자면서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었죠. 게다가 마을 사람들 모두 유배인을 싫어했습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유배인에게 줄 밥을 대접하거나 식량을 내야했기 때문인데요. 그렇다보니 농사나 장사, 구걸을 해서 근근이 먹고 사는 유배인도 많았고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며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반역죄같은 중죄를 저지른 왕족이나 관리는 유배형 중에서도 ‘위리안치’라 불리는 최고난도 형을 받았는데요. 마을 안에서 돌아다닐 수 있었던 일반 유배와는 달리 가시 울타리 안에만 갇혀 살았습니다. 햇빛도 잘 들지 않았고 가끔 음식이나 생필품을 받았죠. 우리가 잘 아는 연산군도 위리안치를 받아 강화도로 유배를 갔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반복되는 일상의 갑갑함에 스스로 유배를 떠납니다. 하지만 공동체 사회였던 조선의 귀양살이는 고립되어 수십년 간 빈곤과 치욕에 시달리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떠남은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함이라면 과거의 유배는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