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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빛보라 Oct 22. 2021

자전거는 인생이다

지구도 살리고 인생도 건지게 된 자전거 추억 이야기


 올해 처음으로 반 아이들과 온책읽기를 해보았는데, 정말 많은 추천을 받은 책이 바로 <불량한 자전거 여행>이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다른 책을 선택했는데 마침 학기 말이 다 되어서 학급 도서구입비를 40만 원이나 지원해준다는 반가운 소식이 왔다. 사서 선생님이 주신 엑셀 파일에 냉큼 사심 가득한 아동 문고들을 잔뜩 적었고 방학이 되기 한 주 전에 겨우 이 책을 만났다. 그리고 방학을 했고 집으로 책을 가져온 뒤에 이제야 1권을 다 읽었다. 이혼하려는 엄마, 아빠가 싫어 집을 뛰쳐나온 주인공 호진이가 자전거 여행 기획자로 살아가는 삼촌을 따라 낯선 사람들과 함께 11박 12일의 자전거 여행을 하는 내용이다. 읽으면서 예전에 했던 여행들이 생각나서 가슴이 벅찼다. 그래, 나 자전거 참 좋아했지.

 



 7살 때 처음으로 자전거를 배운 뒤 내 첫 자전거는 스무 살에 생겼다. 대학에 떨어지고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걸어서 35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급을 받으며 매일 택시를 탈 수는 없었고, 집에는 차도 없고 면허는 당연히 생각도 않았다. 자전거가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20인치 바퀴의 검은색 하이브리드 자전거를 만났다. 출근길에 내리막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8월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도서관에 왔다 갔다 하는 중 도둑을 맞았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 시간이 생명이었으니 훔쳐 간 걸 찾겠노라 다닐 수는 없었다. 다음부터는 도둑맞을 것을 대비해 평범하게 생긴 자전거는 리스트에서 제외했다. 다음 해에 대학을 입학하고 나는 무궁화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하게 되었다. 한 코스 20분이면 지역을 넘어갈 수 있으니 좋았는데, 문제는 역에 도착해서 학교까지가 또 버스 5 정거장이라 또다시 차비를 들여야 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날 좋을 때는 걸어 다니기도 하며 궁리를 하던 중 또다시 자전거가 떠올랐다. 혼자 덜렁 세워놓아야 하면 고민을 했겠지만, 역 뒷마당에 수많은 자전거가 뭔가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잘 타고 다니던 자전거가 고장이 나서 한참을 세워두었다가 수리를 받은 그다음 날, 마침 자전거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내 자전거만 보고 있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 이후로도 두세 번 더 도둑을 맞았고 그중 한 번은 곡절 끝에 범인을 찾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그때 집 근처 수영장에서 같이 수영 수업을 듣던 아주머니의 아들이었다. 민망해하시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몇 번 새롭게 바꾸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 나의 공식 이동 수단은 자전거였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때도, 심부름할 때도, 기차 타러 역에 갈 때도 비나 눈이 심하게 내리지 않는 한은 항상 자전거를 탔다. 한 날은 동네 어르신 한 분이 “너는 언제까지 자전거 타고 다닐래?”라며 차가 없는 걸 은근히 비꼬셔서 화가 나기도 했다.

 



 자전거를 엄청나게 잘 타진 않았지만 자주 타다 보니 단련이 된 건지 그때부터 새로운 욕심이 꿈틀거렸다. 바로 제주도 자전거 일주! 2007년 스물다섯의 패기는 무모하면서도 싱그러웠다. 장거리 자전거 여행의 시작이었다. 비행기와 대여할 자전거만 예약하고는 뜻이 맞는 친구와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한여름의 일주는 정말 힘들었지만 그만큼 추억이 되었고, 나는 마음이 힘들어질 때마다 그 여행을 떠올렸다. 얼떨결에 자전거 여행을 하게 된 책의 주인공 호진이처럼, 나도 그 후로는 마음이 힘들어질 때마다 더 힘든 고행길을 제 발로 찾아 나섰다. 임용에 연거푸 떨어졌을 때는 정말 회복하기가 힘들었는데, 그때 두 발로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정신을 다듬었다. 합격 후 9월 발령을 앞둔 뜨거웠던 여름 다시 한번 제주도 자전거 일주에 지리산을 함께 걸었던 언니와 도전하게 되는데, 겨우 5살 더 먹었을 뿐인 몸뚱이는 생각보다 아주 무거워졌고 힘들어했고 빨리 지쳤다. 30대가 되어서 그런가? 정말 너무 힘들었지만, 그것조차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2012년 7월 2일, 여행 첫날부터 비와 맞서다


 9월부터 교사로서 첫 출근이 시작되었고, 본가에서 차로 15분 거리의 학교여서 처음으로 자전거가 아닌 자동차를 타게 되는 순간을 맞았다. 면허를 따기 전에 언니들이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탈 때는 언니들이 진짜 멋있어 보이고 나는 너무 무서워 절대 운전 못 할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이게 웬걸, 막상 잡은 운전대는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했다. 다른 지역으로의 여행도 대중교통이었으면 망설였겠지만, 자가용이 생기니 망설일 게 없었다. 특히나 주변의 친구들은 대부분 초행길 운전을 꺼렸기에 기사를 자청하여 함께 여행을 자주 다녔다. 신이 났다. 그렇게 자전거는 내 품에서 사라져 가는 듯했다. 다음 해에 언니와 또다시 대구에서 안동까지 1박 2일의 자전거 종주를 제외하면 더 이상의 장거리 여행은 없었다.

 



 그런데 다시 자전거를 타게 된 건 실연의 아픔을 무참히 겪으며 흔들리던 때였다. 매일 밤 울고 잠들기를 반복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새로운 고생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전국 자전거 종주길 여행의 시작이었다. 대운하 공사는 원래부터 반대의 생각이었고 환경 파괴의 안타까운 결과를 낳았지만, 그나마 좋았던 것은 자전거 도로가 전국 각지에 깔리게 된 것이었다.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공도를 타지 않아도 되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자전거를 즐기는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는 무궁화 기차에 자전거를 실어 왔고 나는 차 뒷좌석에 자전거를 실어 가서 신탄진역에서 만났다. 대청댐에서 금강하구둑까지 이어지는 금강 종주를 완주했다. 미리 시즌 온을 하지 못하고 연습 없이 종주에 임했다가 하루 60km만 가는 데도 엉덩이가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래도 강변의 멋진 경치를 보며 페달을 밟는 것은 시련의 아픔을 잊게 해 주었고, 역시 고생은 사서 해야 맛이라며 종주 인증 수첩에 도장 찍는 재미에 폭 빠져 지냈다.


 

 그해 여름 방학 때는 나의 영원한 익스트림 메이트인 언니와 3박 4일 동안 상주 상풍교에서 인천 아라뱃길 서해갑문까지 달렸다. 제법 익숙해진 나와는 달리 매번 뒤처지는 언니를 끌면서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혼신의 힘으로 이화령 고개를 넘은 기억, 인적 없는 강변에서 타이어가 터져 제대로 된 기술도 없이 임시방편으로 겨우 다음 코스까지 이동했던 기억, 시원한 초계 국수를 먹기로 한 곳에 다 와 갈 때 하필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덜덜 떨며 차가운 국수를 먹었던 기억 등. 정말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처절한 투쟁기였다.



 대구에서 부산까지 남은 코스는 인천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도 안 되어 혼자서 무작정 떠나 1박 2일 동안 달려서 완주했다. 그리고 국토 종주 메달을 하나 받았다. 이렇게 뿌듯할 수가. 정말 그해에 나는 자전거의, 자전거에 의한, 자전거를 위한 삶을 살았다. 명절 상여금과 늦은 성과급을 다 털어 새롭게 로드 자전거로 기기 변경도 하고 바보(바이크 오브 보라)라는 조금 유치한 이름도 붙여주었다. 그 자전거로는 섬진강과 영산강 종주를 마쳐 결국 4대강을 완주하게 됐고 메달을 하나 더 받았다.


 



 자전거를 타면서 몸과 마음의 건강까지 얻은 나는 새로운 남자 친구를 사귀었고 2년 뒤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물론 그때도 자전거 사랑은 이어졌다. 내가 동호회 사람들과 라이딩을 즐기는 것이 부러웠던지(질투가 났던 건지)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은 적금까지 깨 가며 자전거를 장만했고, 이후에는 거의 남편과 자전거를 탔다. 그런 우리에게 찾아온 소중한 생명과 육아의 시작은 점점 나를 자전거와 멀어지게 했다. 베란다에서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자전거 두 대는 결국 큰 아이 임신 사실을 알았던 그날부터 만 5년 동안 한 번도 페달을 굴리지 못했다. 휴직 중 거의 독박하다시피 한 육아의 틈에서 자전거를 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지금은 우리 집보다 조금 더 넓은 시댁에 보관하려고 유배 보낸 상태.

 

 자전거를 타면서 인생 공부를 많이 한 것 같다. 오르막길을 진짜 싫어하는데 그래도 헉헉대며 올라가 보면 결국은 시원한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자전거 페달을 굴렸고, 오르막과 내리막을 굽이돌아 가다 보면 결국은 지금의 힘든 일도 내리막을 만날 때가 오겠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자전거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자전거 여행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전국 일주를 했다고 해서 내가 전국 1등이 되는 건 아니다. 전국 일주를 했다고 해서 회사가 아빠를 다시 받아 주지도 않을 거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여행을 하면 여행한 거리만큼 용기가 생긴다는 거다. - 『불량한 자전거 여행2』   


 그런데 생각해보면 두 발을 동력 삼아 가는 자전거는 친환경 이동 수단이기도 하다. 발목만 까딱해서 시속 수십 킬로미터를 오가는 자동차와는 비교가 안 되는 효율성이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자전거가 좋다. 언젠가는 우리 집 꼬꼬마들이 두 발 자전거를 배우고 온몸의 근육이 조금 더 단단해지는 그때, 함께 땅끝마을 해남까지 자전거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불량한 자전거 여행2>권에서 호진이가 엄마, 아빠와 부산에서 서울까지 새롭게 자전거 여행을 하며 가족의 행복을 되찾은 것처럼, 나도 우리 가족 모두 함께 페달을 굴리며 더 단단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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