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가 일부러 깜빡한 거야

왜냐고? 다 너희들을 위해서. 최강 자기합리화 부부 탄생.

by 초록빛보라

애 낳으면 다 그렇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 몸은 안 망가질 거라는, 내 기억력은 남들보다 더 오래 총명할 거라는, 늘 꾸미기에 소홀하지 않을 거라는 바람들이 정말 바람에서만 그쳤을 때 오는 그 망연자실이란. 바람과 현실 사이의 장벽은 만리장성만큼이나 길고도 넓다. 나도 별 수 없는 아줌마구나 싶은 마음에 서글픔이 밀려온다.


결혼 전에는 주로 늦잠을 자서 출근할 때 허둥댈 때가 많았다. 그런데 출산 후 복직을 하고 나니 절대 늦잠을 자지 않는데도 늘 허둥지둥이다. 일단 머리부터 감고 나와 어린이집 준비물부터 얼른 챙긴다. 아이들이랑 먹을 빵이랑 과일 따위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을 깨운다. 아이들이 먹는 동안 나는 더 빨리 먹고 머리를 말리고, 다 먹고 난 아이들 세수와 복장 준비를 마치고 화장을 한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면 그래도 지각은 면하겠지만, 꼭 아이들은 평소보다 더 늦게 먹고 어제 못 본 책을 읽어달라고 떼를 쓰고 신발을 신다가 갑자기 응가가 마렵다고 한다. 출근하기도 전에 혼이 쏙 빠진다.




그런데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첫째가 나를 부른다.

"엄마! 크리스마스 책 들고 가요!"

소설책『달러구트의 꿈 백화점』이었다. 읽지는 못해도 출근할 때 늘 들고 갔다가 그냥 퇴근하고는 매일 밤 애들 재워놓고 읽어야지 하며 새롭게 침대 맡에 올려놓기를 일주일 가까이하고 있었다. 아이 눈에는 중요해 보였던 것 같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얼른 책을 받아 출근 가방에 챙겨 넣었다.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으며 남편에게 아침에 있었던 이 일을 이야기했더니 남편도 자기 이야기를 해주었다. 요즘 남편이 나 대신 등원을 시킬 때가 많은데 커피를 담은 텀블러와 차 키를 챙기는 걸 몇 번 깜빡했다는 것이다. 주차장 차 앞에 도착해서야 "아빠 깜빡했다!" 하면 "에이~ 아빠~~." 하는 투정을 몇 날 며칠 들었단다. 그런데 어디 투정 몇 번으로 쉽게 고쳐질 깜빡증이던가. 그러니 어느 순간 집을 나서려고 현관문을 열면 첫째가 말한단다. "아빠, 차 키 챙겼어요?"




예전에 남편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리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 정말 성실하고 참한 청년 형제 둘이 있는데 내가 그 청년들을 두고 정말 잘한다고 칭찬하는 말을 했더니 남편이 말했다.

"그건 엄마가 맹해서 그래. 그러니까 애들이 뭐든 빠릿빠릿하고 머리도 똑똑하잖아."

뭔가 일리 있는 말이면서도 웬 엄마 탓인가 싶어 듣는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었다.


그런데 아이가 자신에게 차 키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고 요즘은 일부러 차 키를 놓고 갈 때가 있다고 했다. 깜빡증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뭔가 엄청난 교육 철학으로 밀고 나가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빵 터져버렸다. 이어서 하는 말은 더 가관이다.

"요즘 엄마들이 너무 똑똑해서 다 알아서 해 주니까 아이들이 반대로 자기 할 일을 제대로 못 하고 스스로 결정도 잘 못 내리는 거잖아.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좀 못 해도 괜찮아. 자기 살 길은 본인이 챙겨야지."

다섯 살, 세 살짜리 아빠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나도 모르게 설득당하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이후로도 깜빡하는 일은 또 생겼다. 남편처럼 일부러 그러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안 그러고 싶다고 생각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깜빡하지 않아야겠다 생각할수록 깜빡하는 나 자신에게 더 짜증이 나고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 순간 남편의 교육 철학을 떠올렸다. 그래, 행동을 바꿀 수 없다면 생각을 바꿔 보자! 깜빡해버린 나 자신에 대한 원망 말고 엄마가 너를 위해 일부러 깜빡한 거라고 생각을 바꾸자 희한하게도 짜증이 덜해진다. 그래도 엄마 아빠는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아이들의 촉은 더 예민해지니 상부상조 아닌가 싶은 것이.. 부부는 닮는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싶다.


내일은 무얼 두고 나갈까? 매일 그러면 너무하니까 티 안 나게 3일에 한 번 정도로 하자. "엄마, 커피 컵 챙겼어요?" 하면 이마에 주름살을 하나 그리고 "아니! 엄마가 깜빡했네." 말하면서 속으로는 씩 웃는 명품 감정 연기를 보여 줘야지.


20211127_164237.jpg 너희들도 커서 애 낳고 살아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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