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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바차 Jun 17. 2024

눈 밭에서 자랑 찾기

45. 녹색 바다는 그렇게 차갑지만은 않았다.

내 키를 훌쩍 넘은 눈을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강원도 산꼭대기에서 맞이하는 겨울은 내가 알고 있던 겨울과 차원이 달랐다.

내게 친숙한 겨울은 어여쁜 눈송이를 몽글몽글 피워내는 것이 다였지만

이곳에서 마주한 겨울은 뼈 시린 강추위와 앞이 보이지 않는 거센 눈보라의 향연이었다.

장장 4일 밤낮을 끝없이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눈에

막사 입구는 눈에 파묻혀 제 기능을 상실해 버렸고

창문을 넘어 거대한 흰 벽을 걷어내고서야 비로소 제 역할이 가능했다.


걷어진 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그만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온 세상이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있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는 상황

작은 한숨과 함께 묵묵히 눈 속으로 몸을 내던진다.

고개를 처박고 하염없이 긴 시간 허연 눈덩이들을 걷어낸다.

목과 허리는 당장 끊어질 것 같은 통증에 고통스럽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언제부터인지 낱개가 아닌 하나의 덩어리로 느껴졌다.

육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무엇보다 막막함에 느껴지는 정신적 괴로움이 더 컸다.


허연 눈 때문인지 아니면 내 눈이 돌아버린 건지 눈앞이 새하얗다.

내가 왜 이곳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눈을 치워야 하는지 의문이 들고 혼란스러웠다.

마치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이 막막하고 터무니없는 상황.

머릿속에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차오르더니 이내 더는 내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이 나기 싫어 명령을 수행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있으니 꼭 로봇이 된 것만 같다.

정신이 점점 피폐 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시작한다.  

이제 겨우 시작된 잔인한 겨울로부터 나는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스스로를 세뇌하기에 이른다.


"지금 나는 자랑거리를 만들고 있다!"


먼 훗날 사회에서 첫눈을 바라보는 때를 상상해본다.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으스대는 내가 보인다.

그곳의 눈은 무지막지했고 그 겨울로부터 나는 살아남았다고

내 말을 믿지 못하는 친구에게는 핏대를 세워가며 사실임을 강조한다.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기란 터무니없이 힘든 고된 일이 되겠지만

고생 끝에 찾아낸 바늘은 아마 평생을 떠들어도 좋을 엄청난 자랑거리 될 것이다.

정신이 돌아오고 얼어붙은 몸에 온기가 퍼진다.

더뎌졌던 삽질에 다시금 활력이 생기기 시작한다.


지금 나는 자랑거리 만들고 있다.

이 고단함이 지나 오늘을 자랑하는 그날을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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