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조던의 다큐 <알바트로스>를 보고
저는 코딱지를 먹는 어린이였습니다. 옆 짝꿍이 먹는 걸 보고 따라 했는지, 순수한 호기심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매일 거울로 보는 친근한 나의 얼굴 한구석에 붙어 있던 그 짭조름한 이물질을 먹으면 안 된다고 경고한 사람은 없었어요. 아마 누가 먹지 말라 했어도 ‘왜 안돼?’라는 반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이의 시간을 살며 얼마큼의 코딱지를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탈은 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코딱지를 많이 먹어서 탈이 났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신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러다 코딱지 먹는 걸 그만둔 이유는 자연스럽게 먹어도 되는 것과 먹으면 좀 이상한 걸 구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딱히 맛이 없진 않았는데 말이죠.
굳이 자랑할 거리도 아닌 기억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연일 보도되는 기사 때문입니다. 먹으면, 아니 입에 넣어서도 안 되는 인간의 물건을 기어코 먹고는 탈이 나서 죽어버린 동물들의 부고였습니다. 죽은 야생 동물들의 꺼진 뱃속에서 끄집어낸 날카로운 플라스틱 조각이, 소화액으로도 끊기지 않는 질긴 비닐이 직접적인 사인입니다.
바다에서 플라스틱 조각을 먹고 죽은 새는 연간 100만 마리에 달하고, 바다거북은 10만 마리가 죽어간다고 합니다. 인간은 일부러 플라스틱을 먹지 않지요. 어렸을 때 어쩌다 요구르트를 거꾸로 뜯어먹거나 플라스틱 빨대를 씹곤 할 때 잠깐 맛보았지만, 별맛도 없습니다.
바다에 기대어 사는 동물들은 왜 플라스틱을 먹는 걸까요?
당신은 시대의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있습니까?
얼마 전 크리스 조던 감독의 다큐 <알바트로스> 상영회를 열었습니다. 다큐는 북태평양 한가운데, 미드웨이(Midway) 섬에 서식하는 알바트로스의 일생을 담았습니다. 촬영을 위해 다가간 인간을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순수한 새들의 눈동자, 그리고 유난히 크고 무거운 날개 덕에 뒤뚱거리는 뒷모습은 익살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생애 첫 비행을 위해 태풍에 몸을 싣는 알바트로스의 날갯짓은 그 자체로 장관이더군요!
영화의 장면과 장면은 아주 천천히 전환됩니다. 새가 태어나고 자라 처음 바다 위로 힘차게 날아가기까지, 그리고 사이사이 어떻게 플라스틱으로부터 위협을 받는지 느린 호흡으로 따라갑니다. 새의 한 생애를 바로 옆에서 함께 견딘 것처럼 영화 속 시간은 무겁게 흐릅니다.
한번 날면 몇 달 동안 육지를 밟지 않고 바다 위를 비행하며 먹이활동을 하는 알바트로스가 한참 만에 돌아와 자신의 새끼에게 먹이를 토해주는 장면에서 먹이와 섞인 이질적인 물질이 등장합니다. 딱딱하고 뾰족한 모서리를 가진 플라스틱 조각들이 소화액과 뒤엉킨 채 새끼 새의 부리를 통과합니다. 자연을 가장한 채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던 이물질은 어미 새로부터 새끼 새에게 전해지고, 결국 새끼들은 죽어갑니다. 그 순간 슬픔인지, 죄책감인지 모를 응어리가 목구멍에 탁 하고 걸립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감독이 영화를 통해 던진 질문의 답, 바로 우리가 직시해야만 하는 이 시대의 불편한 현실을 마주합니다.
플라스틱을 잔뜩 먹은 알바트로스가 고통스러운 몸부림 끝에 생을 달리 한 후, 감독은 보란 듯이 부검을 감행합니다. 이윽고 어쩌면 이미 익숙해진 재앙이 포착됩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조각들, 새의 배 속에서 갓 꺼낸 이물질, ‘플라스틱’ 말입니다. 플라스틱이 생태계를 파괴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파괴하고 있다는 확신에 이어 딸려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마구 뒤엉킵니다. 감독의 떨리는 손끝을 빌어 목격한 재앙은 비단 알바트로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테지요.
크리스 조던 감독은 영화에서, 그리고 상영회 때 진행된 감독과의 대화 자리에서 고백합니다. 자신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모르는 알바트로스와 달리, 감독 스스로는 너무도 잘 아는 그 절망스러운 현실이 촬영하며 가장 마주하기 힘들었노라 회고합니다. 이 새는 플라스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배를 채우러 나가서 바다 위에 떠있는 플라스틱을 오징어인 줄 오인하고 먹는 것입니다. 바다거북은 비닐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저 해파리와 비슷하게 생겼기에 먹을 뿐이지요. 플라스틱을 먹지 말라고 배우지 못한 동물들은 아직도 플라스틱을 먹고 있습니다. 그들의 본능은 그들의 조상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자연이 제공하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삼킨 조각이 소화 불가능한 이물질이고, 나를 죽일 거라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축적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른이 되기 전 입에 넣기를 그만둔 코딱지처럼, 플라스틱을 먹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기까지 얼마큼의 시간이 걸릴까요.
그래서 화면 속 알바트로스는 또 다른 종의 새이기도 합니다. 고래이기도 하고, 바다거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기도 합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다에서 부식된 플라스틱이 미세 플라스틱으로 결국 우리 인간에게 돌아와 얼마나, 어떻게 인체에 유입될지, 어떠한 위험에 처하게 할지 말이지요. 플라스틱의 위협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린 모두 알바트로스입니다.
문득 주위를 둘러봅니다. 도심엔 초록색 나무나 풀보다 회색 콘크리트 벽이 더 많아 보입니다. 폭염 속 길을 걷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지자체에서 설치한 천막 아래에 섭니다. 나무 그늘이 없는 곳도 많기 때문이지요. 저희 집 냉장고에는 싱싱한 제철 음식보다 플라스틱 포장재에 담겨 판매된 가공식품이 더 많습니다. 나름대로 쓰레기 제로를 실천하려 노력하지만, 플라스틱과 비닐로 개별 포장된 채 마트에 진열된 상품들의 모습은 모욕적이기까지 하네요. 2050년에는 바다에 물고기보다 플라스틱이 더 많아질 거라 합니다. 인공이 자연을 초과하는 순간, 시나브로 그 순간이 덮쳐올 때 우린 이미 늦었다 탄식하게 될까요?
다큐 <알바트로스>는 만다라 이미지로 수미쌍관을 이룹니다. 지구 상 한 존재의 생에 시작과 끝이 있다면 그것은 우주의 아름다움으로 시작하고, 우주의 완전함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감독의 희망일까요? 어떤 순환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감독은 미드웨이(Midway) 섬이 갖는 이름처럼 우리가 위치한 좌표를 귀띔해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간 어디쯤, 그곳은 어쩌면 태평양 한가운데일 수도 있고, 알바트로스라는 한 종의 탄생과 소멸 사이일 수도 있고, 우리 지구 공동체 운명의 한 복판일 수도 있습니다. 우주의 완전함을 뜻하는 숭고함의 상징 만다라, 세계를 통과해간 수많은 생과 죽음. 그 사이에 지금 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 조던 감독은 이야기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라고요.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중간 지점(Midway)에 서 있습니다. 인간이 쉽게 쓰고 버린 플라스틱 조각들은 생태계 여기저기에 상처를 냅니다. 플라스틱으로 인한 해양 오염, 생태계 교란, 미세 플라스틱의 위협 등 현실을 직시할 용기를 갖고, 지금부터 플라스틱과의 결별을 선언합시다.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려는 노력, ‘플라스틱 프리(Plastic Free)’ 사회로 향하는 실천을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합시다.
2018.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