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1개월 만에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다.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참석해 업계 동향을 파악하고 잠재 파트너를 발굴하라는 것이다. 눈 앞이 깜깜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신입사원(정확히는 인턴)이 혼자서 해외출장을 가라니? 내 영어실력은 충분한가? 아니, 애초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업무인가? 그래도 남들은 한번 가기도 힘들다는 해외출장이라는데 가보고는 싶고... 그런데 내 여권이 어디 있더라? 찰나의 순간 복잡한 심경이 머릿속을 스쳤다.
걱정과 불안으로 며칠간 잠을 지새운 뒤, 본부장님이 잡혀있던 일정이 취소되어 출장에 동행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천만다행이었다. 한시름 덜은 나는 본부장님을 최대한 보좌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출장을 준비했다. 먼지 쌓여있던 여권을 찾아 갱신하고, 숙박과 항공권을 예약했다. 예비비를 미화 달러로 환전해 난생처음 이천 달러라는 거금도 손에 쥐었다. 나의 첫 해외출장 준비과정은 순조로웠다.
그리고 대망의 출국일, 나는 비행기 출발 3시간 전 공항 카운터에 도착했다. 늦지 않게 도착했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본부장님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30분을 넘어 1시간이 지나도 본부장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살짝 불안해진 나는 본부장님께 문자메시지를 남겼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당시 난 임원에게 전화를 하는 건 실례라고 생각하는 소심한 사회초년생이었다).
시간이 더 지나도 소식이 없자, 고민 끝에 본부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한 번에 받으셨다. 그런데 이미 출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라운지에서 쉬고 계신 게 아닌가! 알고 보니 본부장님은 탑승 직전에 일행과 합류하는 평소 습관대로 움직였고, 그것도 모르고 나는 카운터에서 본부장님을 하염없이 기다린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미리 본부장님께 동선을 말씀드리지 않은 나의 잘못이었다.
시계를 보니 비행기 출발까지 한 시간도 안 남았다. 카운터에서 탑승구 게이트까지 무작정 달렸고, 게이트에 도착하자마자 간신히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서 본격적인 일정을 소화하기 전 미리 액땜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지루한 9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미리 습득해둔 정보 덕에 택시 호객꾼들의 손을 뿌리치며 "Pre-Paid Taxi"가 적혀있는 간판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프리페이드 택시는 바가지 택시요금을 근절하기 위한 일종의 선불제인데, 창구에서 목적지를 말하면 그 거리에 비례하는 요금을 책정해 바우처를 끊어준다. 그리고 그 바우처를 택시기사에게 전달한 후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우처에 적힌 요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단점이 있다면 배차 택시의 상태가 복불복이라는 것이고, 운 없게도 우리는 퀴퀴한 내음을 풍기는 허름한 스틱 차량에 당첨되었다. 에어컨은 고장 났는지 택시기사가 창문을 열고 달린 덕에 그 악명 높은 뉴델리 스모그를 온몸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오늘 들이마신 스모그가 담배 몇 개비를 핀 것과 같을까 고민할 즈음 숙소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마치고 키를 받아오는데...
"방이 하나야?"
본부장님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그렇다. 나는 방을 하나만 잡았다. 기억으로는 당시 숙소 가격이 1박에 300불이 넘었는데, 행사장과 가까운 호텔 중 '그나마' 묵을 만한 호텔은 이곳뿐이었다. 거기에 인당 해외숙박비를 150불로 제한한다는 사규에 겁먹은 그 소심한 사회초년생은 방을 하나만 잡는 끔찍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체크인 당시 빈방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본부장님과 사이좋게 같은 방을 나눠 쓰게 되었고, 이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는 출장을 몇 번 더 다니고 난 뒤에 깨달았다. 그 당시엔 신입의 패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