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의 음식

- 『마야의 예언, 시간의 종말』, 에이드리언 길버트

by 이지현

윤회의 신화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전 세계가 떠들썩했던 2012년 12월 21의 동지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새로운 세계의 열림에 대한 예언이었다는 설이 난무했다.

지구와 우주의 시간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다고 알려진 마야 달력의 명이 다했을까. 우리는 종말론에 민감하다. 죽음에 민감한 것처럼. 그런 심리의 저변을 생각해보는 것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 일지 모른다.


다행히도 이 책은 동양적 사고방식인 윤회가, 마야의 불가사의한 건축물과 관련 있다고 믿는다. 그게 사실일지 어떨지는 차치하고라도 이런 믿음은 불신보다는 오히려 낫다. 인간이 더욱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힘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희망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불가사의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는 문명의 흔적들은 저 먼, 그 기원도 알 수 없는 뇌 속에 각인된 천재들의 기억에 의한 것들로, 이는 윤회로 밖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 책은 조심스레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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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마야인들과 외계인들의 논의, 마야제국과 잃어버린 제국 아틀란티스와의 관련성에 대한 의문도 이 책에서는 끊임없이 추적한다.




옥수수의 신화



마야문명의 불가사의함은 옥수수 때문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옥수수가 멕시코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 약 7천 년 전이라 한다. 거의 인류 농업의 역사와 맞먹을 정도의 연륜을 가진 옥수수는 세계 3대 작물 중의 하나로 칠 만큼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마야의 식민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옥수수의 생산량은 파종량에 비해서 70배 내지는 150배나 되었고, 더구나 이모작까지 가능해 옥수수의 대량생산은 자연히 많은 유휴 노동력을 낳았다. 옥수수 재배에 필요한 시간은 1년에 단지 50일 정도만 필요해서 남은 노동력으로 마야의 거대한 피라미드 등의 건설이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백성들이 너무 시간이 남으면 지배자들은 언제나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마야의 백성들을 부려 불가사의한 마야 건축물을 축조할 수 있었다고 하니, 거대 노동력의 동원이 필요한 건축물 조성이 수긍이 간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야인들과 옥수수의 관련성이, 뜬금없는 윤회론보다는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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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의 신화에서 신은 옥수수 반죽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마야의 천지창조 사상이 담긴 ‘포폴 부’에는 신들이 흙으로 만든 최초의 인간은 부서져 산산조각이 났고, 두 번째 나무로 만든 인간은 뻣뻣했고 멍청하여 자신들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했고,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옥수수 반죽으로 인간을 만들어 마침내 성공했다고 한다.


마야의 옥수수 신인 운우나푸는 이집트의 옥수수 신인 오시리스와 관련이 있으며, 오리온자리 신화와도 밀접하고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즉 마야의 집들에는 중심에 세 개의 돌이 놓인 화덕이 있다. 마야의 여성들은 화덕에 둘러앉아 주식인 옥수수 빵을 구웠다. 이 빵은 토르티야로 옥수수를 가루로 내어서 밀가루 전병처럼 굽는 것이다.


마야 사람들은 오리온의 세 별자리를 바로 이 화덕과 연결시켰고, 바로 마야의 옥수수신과 이집트의 오리온자리 신화가 관련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자칫 민족 간의 이동에서 누가 우월하다거나, 혹은 식민사관으로 변질될지도 몰라서 사실은 매우 조심스럽다.


토르티야는 현재도 멕시코의 전통요리로 속에 넣는 재료와 조리법에 따라 맛이 달라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반으로 접은 토르티야 사이에 각종 고기와 채소를 넣은 것을 타코, 기름에 튀긴 토르티야에 치즈 녹인 것을 얹으면 나초, 여기에 팥이나 구아카몰레소스를 발라 고기나 채소를 얹으면 토스타다, 반으로 접은 토르티야 사이에 닭고기와 살사 소스ㆍ치즈 등을 넣으면 엔칠라다, 토르티야 사이에 치즈ㆍ소시지ㆍ감자ㆍ콩ㆍ호박을 넣고 반으로 접은 뒤 구운 것은 케사디야다.


요즘 사람들도 이 멕시코 음식들에 산뜻한 샤워 소스나 매운 소스를 곁들여 먹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것을 보면 멕시코 음식이 우리의 입맛에 상당히 맞는 모양이다.




신화의 원형성



멕시코 음식이 거부감이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볼 때면 신화의 원형질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묘하게도 마야의 옥수수 신인 운우나푸가 거북의 등껍질을 깨고 옥수수 신으로 부활할 때 그의 쌍둥이 아들인 우나푸와 스발란케가 지켜보고 있는 그림은 매우 익숙하다.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등장하던 <구지가>를 마치 그림으로 보는 듯하다. 마야제국과 그들과 반대편에 살고 있던 가야의 사람들이 동일한 신화소인 거북을 공유하고, 그 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가졌다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사람들의 무의식이 작용한 신화의 원형이 대동소이한 것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런 신화소의 닮음은 이 책에서도 중국의 문명과 마야문명의 관련성을 제기할 때 어느 정도 수긍이 된다.

그러나 마야의 언어가 한글의 모아쓰기처럼 발음을 나타내는 여러 개의 기호를 조합하여 사각형의 공간에 맞춰서 표기했다는 설을 더듬어 생각하면 나는 자꾸만 우리 신화와의 접점을 더 찾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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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인들의 260일 종교력(졸킨) 주기 중의 그들이 사용하는 20일 중에서 4일은 옥수수의 날이며, 칸이라고 부른다. 칸은 몽골 터키 등 유목국가의 군주 칭호와 흡사해, 마치 우리의 가락국기 속 왕의 등장과 마야의 옥수수신의 부활이 거북과 상관있듯이, 마야와 유목국가 간에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옥수수는 중국 음의 위수수(玉蜀黍)에서 유래한 한자의 우리식 발음으로 한국에는 16세기에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냉이로도 불리는 옥수수는 서민들이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특히 옥수수로 만든 올챙이묵은 꼬들하니 맛있다.


어릴 적 강원도가 고향인 외할머니가 옥수수묵을 내리던 모습을 아직 기억한다. 똑똑 장난처럼 떨어지던 동그란 묵은 마치 작은 짐승의 똥 같았는데 올챙이처럼 생겼다고 하니 거기까지 연상은 안된다.

옥수수가 다이어트 음식, 옥수수수염이 건강차로 환영을 받고 있는데, 1970년대 이전까지도 옥수수는 미국의 원조품으로 초등학교에 빵과 죽으로 배급되었다. 큰 솥에 담겨서 풍구로 돌리던 옥수수 죽이 먼저였다가 급식 빵으로 어느 날 변했다. 그 죽을 먹고 싶어서 학교로 달려가던 시간도 있었는데 그 시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진노란 귤빛의 급식들은 큰 네모진 박스에 담겨서 더할 수 없이 구수한 향을 뽐내며 아이들의 침을 꼴깍 넘어가게 했다. 그 죽이나 빵은 지금의 희끄무레한 옥수수빵의 빛깔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그렇게 고소하고 진노란 옥수수가 어쩌면 마야인들이 먹던 아메리카 원산지 맛이었던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옥수수맛의 기억을 쉽게 지우지 못하는 것은 내 안에도 살아있는 신화소가 있을 거라고 우기고 싶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의 빛



마야인들은 옥수수로 인해 적어도 굶주리는 삶을 살지 않은 듯이 보인다. 이런 옥수수가 지금은 음식보다는 산업용 사료로 더 사용되며, 옥수수를 키우기 위해 사용하는 화석연료와 강력 제초제는 환경을 위협한다. 옥수수가 문명을 상징하던 시기는 이제 그 명을 다했는지 모르지만, 인간이 음식을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인간의 문명의 질도 변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한국의 옥수수 박사 김순권 교수가 아프리카에 옥수수 재배 기술을 가르쳐주어 그 나라의 식량 자급에 큰 공헌을 한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런 점에서 옥수수야 말로 지속적으로 인간 문명의 명맥을 이어가게 할 음식물이 아닐까. 그래서 옥수수가 가장 유전자 조작의 논란거리에 서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야인들은 옥수수를 과연 신의 선물이라고 여겼을까. 솔직히 마야인들이 옥수수로 인해서 남은 모든 시간들을, 마야의 불가사의한 문명을 이룬 건축물 조성에 강제노역으로 바쳐야 했다면 슬픈 문명의 아이러니다. 삶은 생존의 질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나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법이 없다. 어차피 곧 닥치니까.’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모두 현재이자 미래인 시간, 과거이자 현재인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다. 가끔씩 역사의 저편으로 말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사라져 간 시간도 더불어 생각하다 보면, 지금 우리가 서있는 자리도 다 지나가는 자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인간만이 최고일 수도, 가장 존중받아야만 하는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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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과 더불어 살면서 함께 엮어가야 할 시간들이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마야의 종말론은 어쩌면 인간의 이기심이 빚은 문명의 종말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경고일지 모른다.



『마야의 예언, 시간의 종말』, 에이드리언 길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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