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라도
풀잎 하나 없는 절멸의 사막에서 만나더라도
여태 그랬듯이 그냥 스쳐가다오.
까맣게 잊었다는 말을 들으면
남은 생이 더 상처일지 모르니.
우연히라도
풀잎 스치는 푸른 바람이 되어 가까이 서있더라도
여태 그랬듯이 그냥 모른 척해다오.
그리움이 모두 사라진 뒤엔
남은 생이 더 길지 모르니.
차츰차츰 우리는 더 낮은 곳으로 지고,
긴 그림자 하나 벽에 그을음을 남기며 사라지는
그런 계절의 한 복판에서 불현듯 떠올려다오.
누군가 한 번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홀로 편지를 쓰고 있었음을.
깊거나 아득함은 겪은 자만이 모른 채
이미 도처에 엎드려서 우리를 에워싼다.
울지 않는 자만이 거리를 오가고
저릿한 비명은 남은 자만이 부르는 노래다.
우연히라도
어떤 울음을 들으면 그곳에 깔린
깊은 눈부심도 있었다 기억해다오.
그리고 그냥 가던 길을 가다오.
무심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생과 공손히 악수하는 중일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