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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Oct 07. 2020

배롱나무 있는 풍경

       

골목이 끝나는 곳에

목백일홍이 마침내 지고 있었다.

한 여름을 몸살 앓듯

핏빛 연서같은 꽃은 피고 지면서

헤매는 사람들도 상처처럼 아팠다.

그 골목을 지날 때마다

백일홍 붉은 꽃잎이 펄럭 날려

딱 백일만 긴 불면의 밤을 뒤척였다.     

 

이제 그 골목을 지나는 사람은

다시는 편지를 쓰지 않고

다시는 그리움을 앓지 않는다.

울음보다 붉던 목백일홍이 보낸

매끈한 청색의 신호를 들으며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발소리를 돌려

옷깃을 여며 부드럽게 흘렀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

붉은 꽃잎이 말없이 진 가을.

우리의 비애도 그 어느 날에

자국도 없이 봉합되어

아무렇지 않은 말짱한 얼굴로

생과 같이 저물어갈 것을.

목백일홍 나무가 선 골목에선

그렇게 조용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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