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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Jan 11. 2021

눈 오는 날에는 청춘의 교향시를

- '겨레말 큰 사전'을 만들던 벗


눈 온날의 골목 풍경



서울에 폭설이 내렸다. 골목에는 꼬마들이 만들고 간 눈사람이 아직 얼어붙은 채 서 있다.

눈 온 날은 역시 골목 풍경이다. 따뜻하고도 서럽다.


눈내리는 밤에 5살 꼬마가 우리집 앞에 만들어주고 간 눈사람,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꼬마가 눈사람을 만들고 올라가다


눈에 관한 시, 문득 최승호의 <대설주의보>와 김수영의 <눈>이 대비되어 떠오른다.

최승호는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이라고 함으로써 무지막지한 군단처럼 점령한 눈을 시대적 현실의 폭압에 대응했다.


김수영은 '눈은 살아있다' 고 말하면서 순수하게 바라보는 어떤 흰 눈을 그린다. 두 눈이 나오는 시대적 간격은 20여 년이 있지만 눈이 현실을 반영하는 데는 다르지 않다.


폭설이 기습처럼 내린 날 나는 이 두 가지 눈의 양가성을 떠올렸다.

폭설의 난폭함이 아직 우리 시대에서는 아마 한참 갈듯도 하지만, 결국은 그 흰 눈의 순수함이 이길 것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폭설로 덮혔던 눈도 녹았지만, 눈사람만은 녹지 않고 뽐내고 선 골목 풍경


남쪽 지방의 소도시에서 자란 나는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거의 눈 구경을 해본 적이 없다. 눈은 몇 개 정도 흩날리다가 곧 비로 바뀌어서 내렸다. 야, 눈이다고 소리 질러보기도 전에 눈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몇 개의 눈송이는 책에서 보던 눈 구경보다는 꽤 사실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민학교 졸업식 하루 전날, 아침에 눈을 뜨는데 대청마루까지 밀려와있는 폭설을 보았다. 마루 아래 놓인 신발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파묻혔다.

그때 그렇게 기다리던 눈도 너무 지나치면 폭력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이후는 굳이 눈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때까지 중에서 제일 눈 구경을 제대로 한 날이었다.




경복궁 안 카페 '다원'의 서정적인 눈



서울에 올라와서 본 눈은 대단히 서정적이었다. 눈 내리는 날이면 수업도 그냥 펑크내고 지금은 없는 경복궁 안의 카페 '다원'으로 직행했다.

다원은 전면이 전체가 거대한 통유리창이었다. 커피 한 잔을 들고 눈 내리는 경복궁의 그 너른 정원의 정경을 얼마든지 보고 있으면 읽지 못하는 시들이 난무했고, 마음은 설레면서도 서럽고 따뜻했다.

다원에서 바라보는 눈은 어디 하나 막힌 데가 없어서 마치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내리는 눈보라처럼 가슴 뭉클했다. 그때의 눈은 우리에게 멋있는 체하게 만들 수 있는 서정적 장치였다.  


다원에서 눈이 멎을 때쯤이거나 눈이 조금 시시해지면 명동의 필하모니로 갔다. 대부분은 어떤 한 친구와 같이였다.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와서 완벽한 촌뜨기였던 나에게 자신의 방을 처음으로 보여준 친구였다. 그 친구가 가진 수많은 클래식 음반들은 책상 위의 빈 벽에 빼곡했다. 그 친구의 방에서는 들어설 때부터 나올 때까지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제목들이 무엇인지 몰라도 좋았다. 그 친구의 방 앞에 선 아주 오래 묵은 고목에서 잎이 파래지거나 낙엽이 질 때도 그 음악들은 흘렀다.

 

그때 서울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던 명동 필하모니나 종로의 르네상스도 내게 가르쳐준 친구였다.

필하모니에서 그 친구 때문에 알게 된 그럴듯한 클래식 곡을 신청하고 검은색의 깊은 의자에 앉아서 음악을 듣곤 했다.



솔직히 그런 음악들은 잘 알았다기보다 당시 그냥 폼으로 듣는 게 더 맞던 나이였다. 20대의 우울과 불안을 고독하게 날려 보낼 수 있는 것은 또 그뿐이었다.  

필하모니 음악감상실에 들어서면 압도할 듯한 그 어마어마한 스피커만으로도 청춘의 우울과 불안을 파묻었다. 그리고 깊고 아득한 정적을 더 깊게 하던 음악들.     


박종호 작가의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1>을 읽으면  ‘내 사춘기의 낭만과 추억’이 있는 곡이라는 표제를 붙이고 있는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우리는 그때 필하모니에서 신청해서 들었었다. 물론 우리는 사춘기도 아니었고 낭만보다는 우울모드였다. 그럴 때 브루흐의 곡은 딱 어울렸다. 낮은음이 실내에 바닥보다 더 낮게 깔리고 소금더미처럼 무겁게 쌓일 때면 필하모니는 더 적막했다.




명동 필하모니와 침묵의 시대



이미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청춘의 침묵들은 필하모니의 어두운 실내에 가득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애초에 말 따위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고요했다.

70년대의 막바지는 그렇게 침묵이었다. 침묵만으로도 버티기 힘든 시대였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두 어떻게 될지도 모르던 그런 시절이었다.


긴 머리에 큰 키를 가진 그 친구는 마치 르노와르의 소녀에 나오는 그림처럼 구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쓰윽 넘기면 어찌나 우아한지 그 나이에도 어떤 위엄이 있었다. 그 친구의 흉내를 내느라고 가서는 알지도 못하는 신청곡을 끄떡대면서 넣고는 들을 귀도 없으면서 듣는 척하고 앉아있었다.


  



필하모니에서 앉아 있으면 어느새 명동이 저물었다.

인 김영태의 부인이 한다는 인형가게 '밤비노'를 기웃거렸다. 물론 인형은 너무 비싸서 살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커피점에 들어가 한 잔씩 그럴듯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고는 되돌아오곤 했다. 그 당시는 개인용 원두커피 기구를 가져다가 각자 끓여 마시게 하는 게 막 유행이었다.

명동 시인인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펼쳐 읽으며 마치 명동의 저녁거리에서 온갖 우울한 폼을 다 잡고 다닌 시간이었다. 그렇게 70년대는 저물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친구는 공부를 더 해야겠다며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내가 문학을 했다면 그 친구는 국어학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나중에 저서도 많이 내었다.

그리고 돌아와 '겨레말큰사전'을 만드는데 참여했다. 남북한 사전 만들기에 참여한 국어학자들 중에서 유일한 홍일점이었다.


'겨레말큰사전'을 만드는 중에 그 친구가 어느 날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너무도 충격이어서 그날 밤새도록 울었다.

지방에서 올라와서 처음으로 친해졌고, 시대적 데카당스처럼 70년대를 함께 붙잡고 서럽게 절망하던 벗이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촌뜨기에게 명동과 종로와 다원과 그리고 서울 거리를 가르쳐준 친구였다. 그 친구에게 붙은 수식은 국어학자기보다는 클래식 음악과 지독한 커피 애호가, 그리고 공부였다.

그리고 너무도 다정다감하고 따뜻하고 순수해서 '다원'에서 함께 바라보던 그 흰 눈같은 친구였다.


명동의 필하모니, 청춘이 머물고, 다시 저물고 말없이 흘러가던 공간이었다.  

그 친구의 집에 놀러 가면 너무 부러워서 한숨이 다 나오던 그 집. 흑석동의 비스듬히 올라가는 고갯길을 넘어가면 큰 나무 한그루가 현관 앞에 떡 버티고 선 집.

지금이라도 그 집 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 친구의 방에 들어서면 꼭 낮은 소리의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커피 향이 번져갈 것만 같은 그 집.


친구가 가고, 아주 오랜 후에 그곳을 지날 기회가 있어서 나는 그 친구의 집을 찾았지만 너무 변해버려 어디가 어딘지 분간조차 어려웠다. 그런 것일까.

그리운 생각들도 그렇게 변해버리는 것.


서울에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 후, 언제나 그 친구와 앉아있던 경복궁의 '다원'이 떠오르고, 이제 다시는 그 친구는 마시지 못할 그 친구의 커피를 내가 혼자 다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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